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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눈깔이 뭔가 말하려다가 왈칵 피를 쏟아냈다. 걸쭉한 핏덩이가 바닥으로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녀가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그걸······.”
김창은 개눈깔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여기가 게임 속 세상이라 그런가?”
“···뭐?”
“원래 사람은 심장 찔리면 죽거든? 그런데 게임에서 보스 몹을 잡으면 말이야, 바로 죽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여기서도 그래. 내가 지금까지 죽인 놈 중에서 좀 강하다는 애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바로 안 죽고 실컷 떠들고 가더라고.”
개눈깔은 자기가 바로 죽지 않은 건 아직 몸 안에 남은 마력이 자기 심장을 억지로 뛰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나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아주 약간뿐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닥치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김창이 무심히 말했다.
“게임 속 칼잡이 스킬 중에 어검술이 있었지 아마.”
개눈깔이 뒤죽박죽된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래, 확실히 그런 스킬이 있긴 했다.
캐릭터의 공격력에 비례해서 몇 초당 한 번씩 적에게 데미지를 주는 스킬이던가? 켜두고 있으면 괜히 다른 몹까지 건드려서 일부러 안 배우는 사람도 많았었지.
개눈깔은 오랜만에 떠올린 게임 생각에 희미하게 미소 짓다가 곧 얼굴을 굳혔다.
김창이 왜 저런 소리를 했을까? 설마 게임 속 스킬을 따라 했다고 말하려고?
“너 설마······.”
“왜, 너도 하는 짓인데 나는 하면 안 되나?”
개눈깔은 바람 빠지듯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미친놈, 나는 게임 속 스킬을 따라 한 게 아니야······.”
“어쨌건 결과는 같았지.”
“스킬이란 게 따라 한다고 되는 거였나? 게임 속 캐릭터가 보여주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모든 행동 전부가?”
“나는 승천할 자다.”
“······뭐?”
개눈깔이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 시선을 받으니 김창은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거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가 영혼 약탈자니 지껄이던 개눈깔 보던 내 시선이랑 다를 게 없지 않나?
자기 입으로 승천할 자라고 말하는 건 생각보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김창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내가 신성을 가졌다는 소리다. 그리고 신성이 있으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지. 가령 아까 같은 일.”
“신성으로 스킬을 구현했다는 거냐? 그게 말이 되는······.”
“왜 말이 안 되지? 내가 아는 어떤 승천할 자는 그걸로 자신만의 공간도 만들고 하던데. 그런 것에 비하면 내가 한 건 별 대단한 일도 아니야.”
확실히 하이나가 보여줬던 것에 비하면 하늘에 칼 좀 날리는 건 별 대단한 일이 아니다. 물론 하이나를 본 적이 없는 개눈깔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건, 그건······ 내가 온갖 노력 끝에 만들어낸 비기다. 칼 네 자루를 내 수족처럼 다루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나 해?”
“나야 모르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지금 내가 궁금한 건 하나뿐이야.”
“···그게 뭐지?”
김창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뒤에 있는 자가 누구냐? 누가 너한테 힘을 주고 타락시켰지?”
“크큭······.”
개눈깔이 웃기 시작했다. 마치 실성하기라도 한 듯 맥락없는 웃음이라 김창이 얼굴을 구겼다.
“뭐가 웃기지?”
“내 처지가 우스워서.”
개눈깔이 비틀거리다가 힘이 다했는지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설치지 말고 얌전히 살았어야 했는데. 다른 놈들이 그러듯이 나도 그냥 놀러나 다니고 그랬어야 했어. 하지만 너한테 지고 난 뒤로······ 그럴 수가 없겠더라고. 나는 네게 복수할 마음이 없다고 했지만 다 거짓말이었어. 나는 네가 미웠고 복수심이 들끓······ 끄악!”
김창이 쓰러진 개눈깔의 배를 찔렀다. 당연히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른 개눈깔이 욕설과 함께 말했다.
“이 개자식아, 뭐 하는 짓거리야!”
“누가 구구절절한 사연 설명하래? 네 사정 따윈 안 궁금해. 그냥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개눈깔은 김창의 고요한 눈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쉬려고 했지만 목구멍을 타고 핏물이 올라와서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켁켁 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말해줄 수 없다.”
“그러면 말하지 마. 내가 알아서 들을게.”
김창이 다시 칼을 들자 개눈깔이 다급히 말했다.
“말해주기 싫다는 게 아니다. 말해줄 수 없다는 거다!”
“그게 뭐? 말 안 하면 결국 똑같은 거 아니야?”
“정말이다······. 괜히 수작질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김창은 개눈깔의 왼쪽 눈의 불꽃이 점차 꺼져가는 걸 봤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 숨이 끊어지기 전에 대답을 들으려면 이런 사소한 말다툼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빨리 대답해.”
“금제다. 내 입 안에는 금제가 걸려 있어. 나를 외눈의 마왕으로 만들어줬던 자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면 안 된다는 금제.”
개눈깔이 입을 벌려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만 보니 입천장에 뭔가 그려져 있긴 했다.
“금제를 어기면 무슨 일이 생기지?”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되지.”
“그러면 곧 죽을 몸인데 그냥 고통 한 번 느끼고 정체 말하면 되겠네.”
미친놈인가? 개눈깔이 욕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불가능하다. 내 주인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고통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니까.”
가지가지 하는군. 김창이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 금제를 우회해서 약간의 힌트라도 주는 건 안 되나?”
“금제는 그런 허술한 게 아니야. 다만··· 저 귀쟁이 놈들에게 내 마력에 대해 조사하게 하면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김창이 고개를 돌려 에리엇을 쳐다봤다. 개눈깔은 이미 무력화됐지만 이형의 괴물은 아직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공간의 틈이 점차 닫히고 있었으니 곧 사라질 게 분명했다. 김창은 칼을 휙 하고 던져서 에리엇을 향해 날아가게 했다.
“악령 든 칼이다!”
에리엇이 혼자 날아다니며 괴물과 싸우는 칼을 보고 깜짝 놀란 듯했다. 김창은 다시 고개를 돌려 개눈깔을 쳐다봤다.
“이제 너한테 볼일은 다 끝났다. 빨리 죽어라.”
“······아무리 적이라도 그게 할 소리냐?”
“그럼 내가 뭐 널 위해서 울어 주기라도 할 줄 알았냐.”
개눈깔이 찡그리듯 웃었다.
“그랬으면 역겨웠을 것 같군······.”
뭔가 기분 나쁜데.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자 개눈깔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염치없는 부탁인 건 알지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내 시체는 곧 재가 되어 사라질 거다. 그럼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는 영영 사라지는 셈이지. 나는 그런 게 싫어. 그러니 원탁에 내 무덤 하나만 만들어줘. 거창할 필요는 없고 그냥 이름 석 자만 새겨서······.”
“난 네 이름 몰라.”
“······.”
개눈깔 자신이 했던 말대로 그녀의 몸은 재가 되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김창은 그녀의 마지막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시체가 없어지면 뭔 수로 마력을 조사하지? 이러면 잿더미라도 들고 가야 하나?
혹시 몰라서 다급히 잿더미 속을 뒤져보니 그 안에서 안대가 나왔다. 주인의 몸은 재가 되어 사라졌건만 그것만은 그을음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 안에선 미약하지만 개눈깔의 마력이 느껴졌다. 일단 이거라도 챙겨야 할 듯했다.
김창은 개눈깔과 싸운 뒤에 자신의 신성이 늘어난 걸 확인하고는 에리엇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봐, 김창! 여기 악령이 깃든 칼이······.”
아직 헛소리를 하고 있는 에리엇을 향해 김창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칼이 주인의 손으로 날아와 착 감겼다.
“···음? 악령이 든 게 아니었나?”
“그냥 내가 날려 보낸 것뿐이야. 그래서 누구 다친 사람 있나?”
에리엇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테네벨레의 전사들을 얕보면 곤란하지. 다친 사람 하나 없이 멀쩡해. 그런데··· 외눈의 마왕은 무찌른 건가?”
김창이 개눈깔이 쓰고 있던 안대를 보여줬다. 그걸 본 에리엇이 오오 소리를 내더니 곧 활짝 웃었다.
“과연 원탁의 이방인은 대단하군! 그들이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김창, 테네벨레의 기수로서 자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자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한 거야.”
베르고니아 때문에 요정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생긴 걸까? 티샬레나 에리엇처럼 상식적인 요정을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확실히 귀쟁이라고 해도 전부 나쁜 놈은 아닐 텐데 그런 선입견은 나쁘다고 할 수 있다. 김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부탁? 어떤 거지? 자네의 부탁이라면 내 당연히 들어줘야지!”
호탕하게 웃는 에리엇을 보며 김창이 안대를 흔들었다.
“난 개눈깔을 타락시킨 놈을 찾고 있다. 그런데 걔 말로는 자기한테 금제가 걸려 있어서 알려줄 수가 없다던데. 대신 너희한테 자기 마력을 조사하게 시키라고 하더군. 그러면 뭔가 힌트가 있을 거라면서.”
“아, 그런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자네는 정말 정의로운 자로군. 외눈의 마왕을 무찌른 것도 모자라 그 배후까지 찾아내려 하다니? 어쩌면 자네는 이번 시대의 악의 대적자일지도 모르겠어.”
티샬레도 저번에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나?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개소리인 건 똑같다.
난 그냥 더 강한 적을 찾아 떠도는 것뿐이야. 마치 전투광이나 할 법한 소리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찾을 수 있나?”
“아니, 이런 건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야 해. 그리고 난 마법사가 아니라 전사지. 그러니 자네만 괜찮다면 우리 가문으로 초대할까 하는데, 같이 가겠나?”
“테네벨레 가문으로? 내가 거길 왜 가?”
“첫째로 외눈의 마왕의 안대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 둘째로 세상을 구한 자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세상을 구하긴 뭘 구해. 개눈깔 정도야 그냥 뒀어도 자기들이 알아서 죽였을 건데.
김창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에리엇의 초대를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개눈깔의 안대에 대해 조사하긴 해야 했으니까.
“그러면 같이 가지. 근데 가서 귀찮게 하진 마라.”
손님이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에리엇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 그러지. 아마 지금 돌아가면 손님맞이 때문에 조금 소란스럽긴 할 텐데 자네가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신경 쓰도록 하지.”
“손님? 뭔 손님?”
“혹시 일곱 요정 대가문 중 하나인 딜루키둠 가문에 대해서 아나? 내가 알기로 딜루키둠의 가주가 우리 테네벨레 가문의 저택에 방문한다고 하더군. 아마 그게 오늘이었을 텐데 돌아가면 조금 소란스러울 수도 있을 거야.”
딜루키둠 가문?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김창이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왜 티샬레가 기수로 있는 가문?”
“오, 티샬레에 대해 아나? 베르고니아의 죽음 이후로 새롭게 기수 자리에 올랐는데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씩씩하더군. 그런데 요즘 어디 갔는지 통 보이질 않는단 말이야.”
걔 지금 원탁에서 정원수 하고 있어. 김창은 그 말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러면 지금 가면 딜루키둠의 가주도 볼 수 있나?”
“볼 수야 있지. 그런데 왜? 용건 있나?”
김창이 말했다.
“있지, 용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