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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타스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너한테 돈을 빌린 적이 있나?”
“아니, 없는데.”
당연히 없을 것이다. 아라비타스는 그런 기억이 없으니까. 애초에 요정 대가문의 가주인 그가 인간 따위에게 돈을 빌려야 할 이유가 뭔가?
“그러면 나한테 돈을 맡겨두기라도 했나?”
“돈 맡겨두진 않았는데 받아야 할 돈은 있지.”
아라비타스는 치솟는 짜증을 억지로 삼키며 말했다.
“무슨 돈을 말하는 건가?”
“지난번에 나한테 요정 기수 보내서 헛짓거리했던 거 기억나나?”
김창이 어떤 일을 말하는 건지 아라비타스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 따위에게 이런 모욕을 느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한테 그 일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러 왔나?”
“난 원래 공짜로 사람 안 죽이는데 너 때문에 무보수 노동을 했으니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게 맞긴 해. 근데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그럼? 아라비타스가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김창이 고개를 돌려 티샬레에게 말했다.
“너 혹시 너희 가문에 말 안 했냐?”
“무슨 소리인지 잘······.”
“내가 분명히 말했지. 괜히 사탕발림으로 나 꼬드기려 들지 말고 시킬 일 있으면 돈 가져오라고 말이야.”
확실히 그런 말을 하긴 했다. 그때 또 뭐랬더라? 돈이 없으면 칼로 싸워서 쓰러트려 보라던가?
티샬레는 새삼 그때 안 까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겁도 없이 칼 들고 설쳤으면 자신도 베르고니아와 같은 꼴이 됐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너한테 일을 시키려면 돈을 달라는 소리인가? 이번 시대의 악의 대적자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치고 속물적이군.”
“지랄. 원래 용사는 남의 집 들어가서 물건 털고 그러는 것도 모르냐? 속물적인 게 아니라 그게 근본이야.”
아라비타스가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비아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라비타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이건 돈 달라는 건 대체 뭔 소리고? 자네 인간한테 돈 빌렸나?”
“돈 빌린 적 없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남자는······.”
아라비타스는 김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번 시대의 대적자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경박해서······.
그가 고민 끝에 말했다.
“칼잡이입니다. 아주 실력 있는.”
“아까 이 남자가 외눈의 마왕을 무찔렀다고 했지?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군.”
아라비타스와 비아스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김창이 말허리를 잘랐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내 돈 내놔.”
“아까부터 무슨 돈을 달라는 건지 모르겠군. 딜루키둠 가문은 부유하지만 금고의 황금이 무한한 건 아니지. 아무 이유도 없이 바닥에 돈을 버릴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 너는 내가 너에게 돈을 줘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아라비타스는 수백 년을 살아온 요정이다. 그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요정과 난쟁이, 그리고 인간을 만나왔다.
그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과 관록은 겨우 인간 따위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살아있는 역사와 같은 존재라서 고작 수십 년을 사는 인간은 그 목소리만 들어도 주눅이 들고 만다.
아라비타스는 김창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이유라면 있지. 네가 대악마 죽여달라며. 죽였으니까 돈 달라고.”
딜루키둠의 가주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말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김창이 한 말이다.
뭘 죽였다고? 아라비타스는 방금 자신이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대악마를 죽였다고 했던가?
아니, 분명 이번 시대의 악의 대적자로서 싸우라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대악마를 죽였단 말인가?
김창은 베르고니아는 물론이고 외눈의 마왕도 이길 정도의 실력자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다.
“아니, 정말 대악마를 죽였다고? 자네가?”
테네벨레의 가주인 비아스도 그 말이 믿기 어려운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김창은 버릇처럼 칼자루를 매만지며 말했다.
“믿기 힘들면 증거라도 보여줘야 하나?”
“증거가 있나?”
“있지. 칼 뽑으쇼. 보여드릴 테니까. 잘 봐야 할 거야. 다신 못 볼 거거든.”
에리엇이 뜨악 하고 입을 벌렸고 티샬레가 어이구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미친놈은 증거를 보여주겠답시고 테네벨레의 가주를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김창이 테네벨레 가주 이상의 실력자라고 해도 그건 위험한 발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테네벨레의 요정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에리엇은 그리 생각했지만 티샬레는 생각이 달랐다.
‘저 미친놈, 기어코 학살을 벌이려고······.’
혼자서 대악마는 물론이고 승천할 자도 이긴 남자를 뭔 수로 이기나? 티샬레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거 허세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정말 대악마를 죽였는지 아닌지 궁금하면 다른 방법도 있지. 태양신의 신전에 사람 보내서 물어봐. 걔넨 알고 있으니까.”
아라비타스는 김창이 태양신의 신전을 들먹이는 걸 보고 이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신전이 이미 대악마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왜 그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냐는 것이다.
잠깐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답이야 명확했다. 태양신의 이름으로 악을 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신전의 입장에선 대악마를 무찌른 게 원탁의 이방인이라는 게 자존심 상했기 때문일 터다.
하여튼 멍청한 단명종 놈들. 고작 자존심 때문에 그런 진실을 숨기나? 아라비타스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그래서 네가 죽인 대악마의 이름은 뭐지?”
“칼레드리온.”
김창의 대답에 아라비타스가 몸을 굳혔다. 곁에서 비아스가 주절거렸다.
“칼레드리온이라면 이백 년 전에 자네와 싸웠던 대악마가 아닌가? 아마 그때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던 것 같은데······.”
티샬레가 비아스를 찌릿 쳐다봤다. 지금 그런 소리는 왜 하냐는 시선이었는데 비아스도 그걸 알아듣고 무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랬던 것 같다고······.”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때 칼레드리온과 승부를 내지 못해 몹시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칼잡이가 제 의무를 대신 행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김창은 아라비타스를 빤히 쳐다봤다. 칼레드리온과 승부를 내지 못했다면 아라비타스가 대악마와 호각의 실력자라는 소리인데, 그러면 이 남자를 죽이면 대악마를 죽였을 때만큼의 신성을 줄까?
하지만 아라비타스를 죽이면 그 가문이 복수하려 들 텐데.
“신성 좀 얻자고 가문을 몰살시키는 건 수지가 안 맞나······.”
김창이 혼자 중얼거리는 걸 보고 티샬레가 경악했다. 미친놈, 드디어 일을 벌이려고 하는구나.
“응? 방금 뭐라고 했나? 내가 나이가 든 탓인지 귀가 영······.”
비아스는 아라비타스 이상으로 오래 살았지만 그 외모만은 청년의 것과 같았다. 그런 그가 귀에 손을 대고 늙은이 행세를 하자 좀 우스웠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내 돈 줄 건가? 난 원래 무보수로 일 안 하는 사람이라 꼭 돈을 받아야겠는데.”
아라비타스는 내가 대악마 죽이면 돈 주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왜 줘야 하느냐고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막 저 칼잡이를 다루는 법을 깨우친 참이다. 말하는 걸 듣자 하니 돈만 주면 정말 뭐든 죽여주는 듯하다.
딜루키둠의 가주로서 돈이라면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저 칼잡이에게 황금을 뿌리는 것만으로 악을 물리칠 수 있다면 가문의 요정 전사들의 희생은 얼마나 줄어들 것인가?
그리고 저 칼잡이를 이용하면 죽이기 껄끄러운 상대도 손쉽게······.
“야, 돈 줄 거냐고.”
김창의 말에 아라비타스는 상념에서 깼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줘야지, 돈. 대단한 위업을 달성한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이 있어야 해. 너에게 황금을 주마. 두 손으로 전부 쥘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황금을 말이야.”
“그거 원탁으로 보내 둬라. 들고 다니기 귀찮으니까.”
아라비타스의 미소가 깨질 뻔했다. 그가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러지.”
“혹시나 돈 보낸다고 하고 안 보낼 생각은 하지 마라. 그땐 너희 집으로 직접 찾아갈 테니까.”
수금하러 온 깡패도 아니고 저게 무슨······. 티샬레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가운데 김창이 몸을 돌렸다.
“용무 끝났으니 난 간다. 둘이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정말 자기 용건만 해결하고 떠나는 걸 보고서 에리엇이 어이없어했다. 티샬레가 김창을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여기 있어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아라비타스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 네 용무는 끝났을지 몰라도 내 용무는 안 끝났으니까.”
“또 뭔 용무? 혹시나 돈 떼먹을 궁리하는 거면 그냥 말하지 마라.”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나는 네 방식을 이해했다.”
뭘 이해해? 김창이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네가 어떤 원칙에 의해 움직이는지 이해했다는 말이다. 너는 돈을 주면 누군가를 죽인다. 하지만 돈을 주지 않으면 죽이지 않지.”
가끔 안 줘도 죽이긴 하는데. 김창이 아라비타스를 빤히 쳐다봤다. 가령 너 같은 애들.
“참으로 알기 쉬운 원칙이야. 하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지. 난 너에게 의뢰를 하려고 한다. 물론 사례라면 충분히 할 거야.”
“내 돈 떼먹는 쌍놈인 줄 알았는데 고객님이셨군. 그래서 누굴 죽이면 되나? 방금 너한테 깝죽거린 이 요정? 말만 해라. 언제든 죽여주지. 지금 당장 죽일 수도 있어.”
“응? 나 말인가?”
“···아니, 비아스 님은 왜 죽이나? 솔직히 아까 깝죽거릴 때 조금 짜증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테네벨레의 가주를 죽이진 않아.”
“아라비타스? 나 여기 있네만?”
김창과 아라비타스는 비아스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면 누굴 죽여주면 되나? 상대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지니까 미리 말해주면 고맙겠는데.”
“조금 위험한 상대이기는 해. 하지만 너라면 잘 해내리라 믿는다. 넌 대악마를 죽인 남자니까.”
“뭘, 별거 아니었어.”
김창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걸 고깝게 쳐다보던 아라비타스가 얼른 얼굴을 고치고 말했다.
“내 의뢰는 전과 같다. 대악마를 죽여라. 그러면 너에게 더 많은 황금을 주지. 그 외에 귀한 영약이나 보물도 줄 수 있다. 그러니 사례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안 그래도 대악마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은 참인데 또 같은 의뢰를 받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김창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무 대악마나 죽이면 되나? 칼레드리온이 죽었으니 이제 셋 남았던가?”
“그래, 이제 셋 남았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중 하나뿐이야.”
“누굴 죽이면 되지?”
아라비타스가 녹색의 눈을 형형히 빛냈다.
“지옥의 처형자이자 심연의 대군주.”
그 별명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데. 김창이 생각하는 사이에 아라비타스가 씹어뱉듯 말했다.
“만네르헤임, 그를 죽여.”
걘 내 고객인데. 김창이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