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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91화 (9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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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 당장 죽여야 하나?”

김창은 만네르헤임을 죽이면 안 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 당장 죽이면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만네르헤임이 얼마나 강한 악마인지 잘 알고 있다. 그건 멍청한 칼레드리온과 다르게 교활하기까지 하니까. 그러니 지금 며칠 내로 당장 죽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른 시일 안에 죽여야 할 적이라는 건 맞지.”

아라비타스의 말을 들은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되겠는데.”

“안 되겠다고? 만네르헤임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안 받겠다는 건가?”

아라비타스가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칼레드리온을 죽였다고 하기에 대단한 전사인 줄 알았더니 실은 겁쟁이였나?

김창은 아라비타스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그러나 화를 내는 대신에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걔 말고 다른 놈들을 죽여달라는 거면 괜찮은데, 걔는 안 돼.”

“···만네르헤임은 안 된다고? 어째서지?”

김창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 친구는 내 고객이거든.”

잠깐 정적이 흘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김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방금 뭔 소리를 들었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아라비타스였다.

“고객이라는 게 내가 아는 그 뜻이 맞나? 그러니까 만네르헤임이 너한테 돈을 주고 일을 맡겼다고?”

“그래.”

“왜?”

아라비타스는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다가 곧 김창이 이방인 출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치들은 어딘지도 모를 먼 곳에서 갑자기 나타났는데, 그쪽 세상의 신이 인간쓰레기들만 모아서 여기다 버린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성격이 이상한 놈들 말고는 없었다.

아라비타스는 이방인이 처음 나타났을 때 세상의 안위를 위해 그들을 구제(驅除)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면서 대악마와 거래하고 있는 놈이 나오는 걸 보면 그때 더 강력하게 주장하여 요정왕의 허락을 받아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정말 믿기 어려운 소리군.”

절그럭 소리는 칼자루 쥐는 소리였다. 김창은 가만히 시선을 돌려 비아스를 쳐다봤다.

아라비타스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흑요정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요정 기수들이 노련한 사냥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그는 잔혹한 처형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김창은 그가 길고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적을 죽여 왔다는 걸 알았다. 그 숫자는 아마 자신이 지금껏 죽였던 목숨보다 더 많을 것이다.

만약 비아스가 저대로 칼을 뽑는다면 자신은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짜증을 내야 하나.

아까도 생각했지만 신성 좀 얻자고 가문 하나를 멸하는 건 수지가 안 맞는 장사가 아닌가······.

“단명종이 어리석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어. 악마와 거래하고 있다고? 그것도 그 유명한 만네르헤임과? 진실을 고해라, 단명종. 나는 테네벨레의 가주이자 음지의 수호자로서 악을 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비아스는 아라비타스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강할 것이다. 아마 죽이면 개눈깔과 비슷한 양의 신성을 줄 텐데 그거면 적은 양은 아니다.

김창이 천천히 칼자루 위로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라비타스가 다급히 말했다.

“···네가 정말 악의 하수인이라면 만네르헤임과 거래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하진 않았겠지. 내 생각에 그 거래라는 건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으로 보이는데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나?”

티샬레가 불안한 눈으로 아라비타스와 비아스, 그리고 김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에리엇은 여차하면 무기 들고 싸움에 끼어들 모양인데 티샬레는 그럴 생각 따윈 없었다.

다행히도 김창은 칼을 뽑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긴 했지만 당장 뽑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가 만네르헤임과 한 거래는 간단하다. 그 녀석이 다른 대악마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주면 내가 가서 죽인다. 그리고 돈을 받지. 그게 끝이야.”

“······그러니까 만네르헤임이 다른 대악마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는 건가?”

“그래.”

어이없는 소리지만 아라비타스는 만네르헤임이 왜 그런 부탁을 했냐고 묻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대악마라고 해서 서로 친구는 아닐 테고 오히려 경쟁자에 가까운데 남의 손을 빌려서 적수를 죽일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당장 자신만 해도 김창의 손을 빌려서 청부살인을 할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

“그래서 만네르헤임을 죽일 수 없다는 거군. 그와의 거래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래. 만약 만네르헤임을 제일 마지막에 죽여도 된다면 네 의뢰를 받아들이지.”

여전히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리고 있던 비아스가 아라비타스에게 말했다.

“자네는 저 말을 믿나?”

“전 이 칼잡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군요. 그가 정말 악의 하수인이라면 애초에 만네르헤임과의 거래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얻는 이득도 없고 오히려 우리의 의심만 살 텐데.”

“···하기야.”

비아스가 이제야 칼자루 위에서 손을 내렸다. 티샬레가 남몰래 한숨을 내뱉는 가운데 김창이 말했다.

“그래서 어쩔 거냐? 나한테 의뢰를 맡길 건가?”

아라비타스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네가 다른 대악마 둘을 죽이고 나면 다시 의뢰를 맡기도록 하지. 설마 그때는 거절하지 않겠지?”

“의뢰 내용을 바꾸면 맡아주지.”

“뭘 바꿔?”

“의뢰 내용 바꾸자고. 만네르헤임만 죽이는 게 아니라 다른 대악마 둘도 죽이는 걸로. 물론 보수도 더 올려서.”

아라비타스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굳이 그런 의뢰를 하지 않아도 너는 만네르헤임과의 거래 때문에 다른 대악마를 죽여야 하잖나? 그런데 내가 왜 돈을 더 써야 하는 거냐?”

“내가 만네르헤임과 한 거래는 다른 대악마들을 모두 죽이는 거다. 만네르헤임까지 죽인다고는 안 했어.”

아라비타스는 김창을 노려봤다. 그러니까 이 칼잡이는 지금 만네르헤임의 목숨을 가지고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더 올려서 다시 의뢰하지 않으면 만네르헤임도 죽이지 않겠다고.

건방진 단명종 놈. 아라비타스는 부득 이를 갈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악마 하나를 죽이기 위해선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악마는 그만큼 강력한 적이니까. 당장 자신만 해도 칼레드리온과 싸우다가 크게 다치지 않았나?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있다면 그 값이 얼마든 상관없다. 천금을 내더라도 목숨의 무게에 비하면 아주 쌀 테니까.

그러니 아라비타스는 김창의 협박을 무시할 수 없었다.

“···거래를 받아들이지. 그러면 추가 보수 역시 원탁으로 보내두겠다.”

“아니, 그건 여기서 받지.”

“대악마 둘의 목숨값이라면 아주 비쌀 텐데 그걸 여기서 받겠다고? 혹시 아공간을 다룰 수 있는 건가? 아니면 그런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나?”

황금은 무겁다. 대악마 둘의 목숨값만큼의 양이라면 더더욱.

아라비타스가 묻자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돈 말고 다른 걸로 받겠다.”

“영약이나 그런 걸 원하나?”

“아니, 다른 거.”

돈도 싫고 영약도 싫다면 뭘 받겠다는 건가? 설마 요정이라도 하나 내달라는 건가? 설마 그런 호색한으로 보이진 않는데.

아라비타스가 물었다.

“그럼 뭘 원하지?”

김창의 대답은 간단했다.

“칼.”

“칼? 무기 말인가?”

아라비타스가 김창의 허리춤을 쳐다봤다. 그가 차고 있는 칼은 칼집이 낡긴 했어도 칼자루만 봐도 상당한 명검이라는 걸 얼른 알 수 있었다.

이미 저만한 칼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왜 또 칼을 보수로 달라는 건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라비타스가 물었다.

“이미 칼 한 자루를 가지고 있는데 왜 또 칼을 보수로 요구하는 거지?”

“한 자루 더 필요해서.”

설마 쌍검술이라도 하려는 걸까? 하지만 김창이 이미 가지고 있는 칼은 쌍검술을 쓰기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아라비타스는 의문이 많았지만 더 캐묻진 않았다. 어쨌건 자신은 보수를 주기만 하면 될 일이니까.

“칼 한 자루면 되나? 대악마 둘의 목숨값으로 칼 한 자루면 조금 모자란 것 같은데.”

“그거면 되니까 쓸만한 걸로 하나 가져와.”

아라비타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아스 님, 가문의 창고로 안내해주시지요.”

“···응? 아니, 의뢰를 한 건 자네 아닌가? 그런데 왜 보수는 내가 줘야 하나?”

“비아스 님, 저번에 저한테 돈 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 왜 연회에서 무희들에게 돈을 너무 많이 뿌려서 얼른 금고를 채워두지 않으면 부인분에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당장 가지.”

비아스가 얼른 움직였다. 김창이 말했다.

“같이 가지. 내가 가서 보고 고르려니까.”

“마음대로 하게.”

“그러면 다 같이 가지요. 티샬레, 같이 가자꾸나.”

결국 모두가 비아스의 뒤를 따라서 창고로 향했다. 테네벨레의 저택이 넓은 만큼 창고까지 가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여기일세.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테네벨레의 요정 중에는 뛰어난 장인이 많지. 무지한 놈들은 난쟁이 장인의 물건이 제일인 줄 알지만 실은 요정 장인 역시 그에 못지않아. 오히려 더 나은 것도 많지. 내가 몇 개 추려줄 테니 천천히 보라고.”

비아스가 에리엇을 시켜서 창고 안의 칼 몇 자루를 가져오게 했다. 전부 미려한 외형을 가진 칼들이었는데 과연 요정의 미적 감각이 듬뿍 들어간 듯했다.

김창은 천천히 칼 한 자루씩을 손에 들어봤다. 손에 감기는 감각, 무게, 길이, 칼날의 모습, 그 외 많은 것들을 꼼꼼히 확인하던 김창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툭 하고 바닥에 던졌다.

“이거 말고 다른 거 없나?”

“···마음에 안 드나? 여기 있는 칼은 전부 다 천하의 명검이야. 한 자루만 바깥으로 나가도 이걸 가지려고 온갖 기사들이 돈을 들고 찾아올 텐데.”

“이건 너무 가볍고, 이건 쓸데없는 장식이 너무 많아. 이건 또 뭐냐? 칼에다 보석은 왜 박아? 싸우다 질 것 같으면 뽑아서 목숨 구걸할 때 쓰는 거냐?”

김창이 내뱉은 신랄한 말에 비아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김창이 요정 장인들의 솜씨를 비웃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 그러면 대체 뭔 칼을 원하나?”

“그냥 날 잘 드는 칼이면 돼. 저런 거 말이야.”

김창이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칼 한 자루가 걸려 있었는데 칼집에 더러운 얼룩이 가득했다.

아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을 게 분명한 칼이었다. 아직 칼집에 꽂혀 있는데도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만 해도 그랬다.

“···저건 안 돼.”

“왜, 비싼 거라서 주기 아깝나?”

“혹시 시력이 나쁜가? 누가 봐도 위험한 칼이라서 안 된다는 거잖아! 저건 저주를 받은 칼이야. 손에 쥐는 사람을 홀려서 미치광이 살인마로 만들어버리지. 아주 위험한 물건이라 우리 테네벨레가 봉인해두고 있는 걸세. 그러니 저건 안 돼.”

“그러니까 저 칼이 사람 잘 죽인다는 소리군. 그러면 됐네. 저걸로 한다.”

“아니, 안 된다니까!”

비아스가 말리기도 전에 김창이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칼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에 착 하고 달라붙었다.

그걸 본 비아스와 에리엇이 동시에 무기를 손에 들었다. 만약 저 칼잡이가 요도(妖刀)에 홀린다면 당장 처단해야 할 테니까.

“그 칼을 당장 버려!”

비아스가 소리치자 김창이 칼을 휙 하고 던졌다. 그걸 보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공중으로 떠오른 칼이 멋대로 날아다니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은 곧장 비아스를 향해 날아갔고 그를 공격했다. 비아스가 얼른 칼을 들고 공격을 막아내자 에리엇이 가세했다.

칼은 이리저리 날면서 두 사람을 상대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김창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마치 제 주인을 지키는 수호령처럼 공중에 둥둥 떠다녔다.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이거 자동 사냥이 가능할지도······.”

에리엇은 칼이 날려 보내는 게 김창의 능력이라는 걸 알았다. 그가 보기에 김창은 요도에 홀린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이 멀쩡해 보였다.

그러면 방금 공격은 칼의 성능을 보려고 시험 삼아 해본 것인가? 그게 무슨 미친놈도 아니고······.

“쟤 왜 멀쩡해? 원래 저 칼 들면 바로 미쳐버려야 정상인데······.”

비아스의 중얼거림에 티샬레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쟨 저 칼 없어도 사람 잘 썰고 다니는 놈인데 요도 좀 들었다고 미칠 리가 없잖아요.”

하기야 미친놈이 저주 걸린 칼 들었다고 또 미칠 리는 없나······. 비아스가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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