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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오우거는 트롤 왕이 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건가? 그건 대단히 종 차별적인 발언인데.”
오우거는 덩치 큰 야만전사처럼 생긴 주제에 말씨만은 점잖았다. 트롤들과 다르게 혼자만 제대로 무장을 갖춰 입은 걸 보면 의외로 단순한 괴물은 아닐지도 몰랐다.
“오우거가 트롤 대장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종이 다르면 트롤 왕이라는 말은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김창이 말하자 오우거가 작게 웃었다.
“뭘 착각한 모양인데, 나는 ‘트롤의 왕’이지 ‘트롤 출신의 왕’이 아니다. 그러니 오우거라 하더라도 트롤 왕일 수 있는 거지. 혹시 이게 이해가 안 된다면 내 친절히 설명해줄 수도 있는데.”
그런 건가? 하기야 트롤의 왕이라는 뜻에서 트롤 왕이라고 칭한다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김창은 뭔가 납득이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듯한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우거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애초에 종이라는 게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가? 왕이라는 것은 어리고 미숙한 제 백성을 돌보는 자비로운 아버지요, 또한 약하고 여린 양 떼를 지키는 목자로다. 왕도를 알고 행하는 것이 왕 될 자의 자격일 진데 종의 차이가 그토록 큰 문제가 될 수 있나?”
이 새낀 뭐라는 거야. 김창이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쓸데없이 철학적인 오우거로군. 내가 오우거는 오늘 처음 봐서 그러는데, 너희 종족은 원래 다 그러냐?”
“이 세상에 지적인 탐구를 할 수 있는 종족이 너희 인간뿐이라고 생각했나? 미안하지만 오우거도 지성이 있고 문명이 있다. 물론 한때의 영광일 뿐이고 지금은 몰락한 신세긴 하지만.”
오우거도 문명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데. 그러면 정말 오우거 왕국이 있고 오우거 왕도 있다는 소리인가?
김창은 트롤 왕을 자처하는 오우거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로 오우거가 한때 제대로 된 왕국을 이룰 만큼 발달 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면 저런 무장을 갖추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잘난 오우거 왕국의 생존자가 여기서 뭘 하는 거냐? 트롤들 데리고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건가?”
김창이 빈정거리며 묻자 오우거, 그러니까 트롤 왕이 말했다.
“나는 망국의 생존자이자 무너진 문명의 후손으로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의무가 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든 오우거가 그러하지. 나는 내 방식으로 왕국을 재건할 것이며 무너진 문명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지. 아주 큰 힘.”
“몰락한 왕국을 재건하겠다고? 트롤들을 데리고?”
“그래. 모든 오우거에겐 각자가 꿈꾸는 왕국이 있다. 내가 세우려는 왕국은 오우거의 것만이 아니야. 나는 인간이나 요정, 그리고 난쟁이에게 밀려 괴물 취급을 받고 사는 모든 종족을 한데 모아 거대한 제국을 이룰 것이다. 내가 트롤 부족을 통합하고 트롤 왕 자리에 오른 것도 그 원대한 꿈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게임 속에선 플레이어블 종족도 아니고 그저 몬스터 취급만 받던 트롤이나 오우거 따위를 모아서 그들만의 제국을 만들겠다는 소리다.
김창은 참 재밌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 꿈을 이룰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겠지만 이미 김용걸의 의뢰를 받았으니 그럴 수 없다.
트롤 왕이 얼마나 더 성장할지는 몰라도 당장 대악마보다 신성을 더 주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트롤 왕은 여기서 죽인다. 김창은 마음을 굳히고 칼자루를 고쳐잡았다.
“네가 뭔 목적을 가지고 있든 나랑은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널 죽이라는 의뢰를 받았다는 것 하나뿐이다.”
“의뢰라······. 그건 오두막에 살고 있는 흑마법사한테 받은 건가? 내가 떠나라고 할 때 조용히 떠났어야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사람을 고용해 나에게 칼을 겨누다니.”
“주제를 모르는 건 너지, 등신아. 김용걸 걔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트롤들을 싹 다 죽였다가 다시 되살려서 한 번 더 죽일 수도 있었어.”
“···그 흑마법사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혼자 아닌가? 이만한 숫자를 전부 상대할 수는 없을 텐데.”
김창이 픽 웃으며 뒤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지금 저기서 난리 치고 있는 마법사 놈 보이지? 김용걸이 쟤보다 더 세다.”
트롤 왕이 김창의 등 뒤에서 트롤들을 날려버리고 있는 한석구를 쳐다봤다. 마치 쓰레기를 치우듯 손을 휙휙 휘두르기만 할 뿐인데 트롤들이 마구잡이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용맹한 트롤 전사들이 마법사 하나를 상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김용걸은 그보다 더 강하다고?
트롤 왕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렀다.
“···입으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 자기 집에 황금 송아지가 백 마리쯤 있다고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김용걸의 실력을 황금 송아지로 따지자면 백 마리도 넘어. 그러니까 괜히 깝치지 말고 얌전히 꺼져. 왕국 부흥 운동은 다른 데 가서 하던가.”
트롤 왕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다른 곳으로 떠나면 얌전히 보내줄 건가?”
“아니, 쫓아가서 죽일 거다. 난 받은 의뢰는 확실하게 끝내는 사람이거든.”
트롤 왕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건방진 놈! 누굴 우습게 알아!”
이제 대화는 끝났다. 트롤 왕이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며 돌격하자 김창도 곧장 전투 자세를 잡았다.
마치 수호령처럼 그의 주위를 날아다니던 칼이 트롤 왕을 향해 직진했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고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저돌적으로 돌격하던 트롤 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징 박힌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날아오는 칼은 그냥 몸으로 받아내며 그대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을 보면 방어 따윈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보였다.
과연 덩치에 걸맞은 무식한 전투 방법이군. 아까 지성의 탐구가 어쩌고 한 게 우스울 정도다.
김창은 혼자서 웃으면서 빠르게 칼을 내질렀다. 트롤 왕은 날벌레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요도를 무시하며 마주 몽둥이를 휘둘렀다.
두 개의 무기가 서로 부딪치자 거친 바람이 일어났다. 김창은 순간이지만 손목에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에 움찔했다.
과연 커다란 덩치답게 엄청난 힘이었다. 아무리 김창이 플레이어라고 해도 이런 무식한 힘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는 손목을 비틀어 트롤 왕의 공격을 흘려낸 뒤에 거리를 바싹 좁혔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고 당황한 트롤 왕의 얼굴이 잘 보였다.
“쥐새끼 같은 놈!”
트롤 왕은 자신을 괴롭히는 요도를 손으로 쳐내고 오른발을 내질러 김창을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재빠른 일격이 다리를 베었다. 오우거답게 다리가 두꺼운 만큼 일격에 잘리진 않았지만 상당한 타격인 건 분명했다.
트롤 왕의 자세가 흔들리고 몸이 기우뚱하는 순간 김창은 번개처럼 칼을 휘둘러 종아리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아무리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오러를 상대로는 그냥 종잇장에 불과했다. 칼날이 트롤 왕의 종아리 안쪽에 단단히 박혔다.
“크아아악!”
트롤 왕이 괴성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다가 날아온 요도에 왼쪽 눈을 크게 베이고 말았다.
김창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벅찬데 칼까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으니 트롤 왕으로선 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우거 왕국을 재건하니 어쩌고 하더니 별 대단한 것도 없구만.”
김용걸은 뭘 이런 걸 보고 조심하라고 경고를 한 거지? 김창이 어이없다는 듯 칼을 휘두르며 트롤 왕의 몸을 난도질했다.
하늘을 나는 칼도 주인을 보고 신이 났는지 더욱 재빠르게 움직이며 트롤 왕의 몸을 썰기 시작했다.
“끝내자.”
이건 너무 약해서 신성도 안 주겠는데.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할 때였다.
“끝내긴 누구 마음대로 끝―내!”
트롤 왕이 악에 받친 괴성을 내질렀다. 김창은 그러거나 말거나 칼을 휘두르려 했다.
횡으로 길게 날아간 칼날이 트롤 왕의 허리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음?”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김창이 미간을 좁히는 순간 등 뒤에서 트롤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는 건 너다!”
아니, 뒤쪽만이 아니었다. 오른쪽과 왼쪽까지, 총 세 방향에서 트롤 왕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김창은 멍하니 있지 않았다. 그는 세 방향에서 한 점으로 모이는 몽둥이를 보며 즉시 자리를 피했다.
쿵! 세 개의 무기가 바닥을 때렸다. 물론 김창은 그 자리에 없었고 이미 멀찍이 물러난 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한 세 명의 트롤 왕을 쳐다봤다. 어디 숨어 있다가 다른 오우거가 나타난 게 아니라 처음의 트롤 왕이 세 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무슨 오우거 닌자냐? 뭔 분신술까지 쓰고 있어?”
분신을 소환하는 건 마법사의 스킬 중 하나다. 하지만 저 오우거가 마법사 같아 보이진 않으니 뭔가 다른 방법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 힘을 빌리거나 했을지도······.
“내가 입으로만 왕국의 재건을 떠드는 줄 알았느냐!”
김창이 생각에 잠긴 사이에 세 명의 트롤 왕이 쿵쿵 소리를 내면서 일시에 내달렸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세 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곤죽으로 만들어주마!”
김창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트롤 왕들을 보면서 흠 소리를 냈다. 확실히 세 명을 상대하는 건 귀찮다.
아무리 요도가 한 명을 맡는다고 해도 이쪽이 두 명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애초에 신성도 주지 않을 것 같은 적을 상대로 그런 수고를 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김창은 이 의미도 없는 싸움을 얼른 끝내버리기로 했다.
“이것까지 쓸 생각은 없었는데······.”
김창이 자세를 낮추고 칼자루에 칼을 꽂았다. 거칠게 달려오던 트롤 왕들은 동시에 인상을 썼다.
싸움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뭔? 자세를 보면 뭔가 준비한 게 있는 모양인데 트롤 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칼의 단점은 무엇인가? 한 번에 한 놈만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세 명이니 날아다니는 칼에 한 명이 쓰러지고 저 공격에 또 한 명이 쓰러지더라도 아직 한 명이 남아있으니 김창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뒈―져―라!”
세 명의 목소리가 겹쳐서 커다란 울림이 되었다. 김창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칼자루를 당겼다.
“다음부턴.”
허공에 긴 선이 그어지더니 세 명의 트롤 왕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김창이 휘둘렀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자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듯 그 몸이 기우뚱했다.
일자로 길게 이어진 선을 따라서 트롤 왕들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반신에서 떨어져 나온 상반신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쭙잖은 재주로 깝치지 마라.”
트롤 왕이 쓰러지자 두 개의 분신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허리가 끊어진 채로 바닥에 떨어진 트롤 왕이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씨발··· 뒈졌는데 다음이 어디 있······.”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근래 싸운 적들은 하나 같이 죽은 뒤에도 한참을 떠들길래 트롤 왕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러면 신성도 주지 않겠군.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두 자루의 칼을 칼집에 꽂을 때였다.
“음?”
내면의 신성이 늘어났다.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늘어나긴 확실히 늘어났다.
하지만 어째서? 고작 이 정도 적을 죽이고서 신성을 얻는 건 이상한데. 김창이 다시 트롤 왕의 시체를 쳐다보자 이미 죽은 오우거가 이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칼잡이 놈. 대체 날 몇 번이나 방해할 셈이야······.”
그래, 뭔가 더 있어야 말이 맞지. 김창이 더 지껄여 보라는 듯 턱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