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97화 (97/200)

97

이미 죽은, 그것도 상반신과 하반신이 잘려 죽은 놈이 말하는 건 아무리 봐도 기괴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창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런 기괴한 일을 할 수 있는 놈이라면 분명 보통은 아닐 테니까.

“나한테 뭐 불만이라도 있나? 그러면 지껄여 봐.”

김창의 말에 트롤 왕이 얼굴을 움직였다. 그의 눈은 죽은 생선처럼 빛을 잃고 탁해졌지만 입만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불만 있냐고? 물론 있지. 이 빌어먹을 칼잡이야. 네가 가는 곳마다 내 하수인을 전부 죽이고 다니고 있잖나?”

“네 하수인? 이 오우거 놈 말인가?”

“그래, 그놈. 오우거인 주제에 트롤 왕이 되겠다고 설치는 그 이상한 놈 말이다.”

오우거가 트롤 왕 노릇을 하는 건 다른 사람이 봐도 이상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김창이 재밌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네가 트롤 왕에게 힘을 나누어 줬나? 분신 능력 말이야.”

“그거 말고 다른 것도 줬는데 그건 안 쓰던가?”

“그 전에 죽었어.”

“이런 제기랄. 하여튼 오우거 놈, 도움이 안 되는군.”

트롤 왕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정말 짜증이 난다는 듯 욕설을 중얼거렸다. 김창이 이죽거렸다.

“저 오우거를 하수인으로 부린 걸 보면 뭔가 해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 되서 안타깝군.”

“너 때문에 안 된 거다, 이 빌어먹을 칼잡이야!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나? 왜 내 일을 자꾸 방해하는 거지?”

“내가 뭘 자꾸 방해했다는 거냐? 나는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널 방해한 적도 없어. 물론 이번 오우거 일은 유감이다만.”

“지난번에 내 하수인을 죽였던 걸 잊었나?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그걸 죽여, 이 개자식아!”

내가 근래에 뭔가 죽인 적이 있던가? 김창은 기억을 더듬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많이 죽여서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내가 뭘 죽였는데?”

“···굳이 내 입으로 그 이름을 말해야겠나? 마왕이다, 마왕! 외눈의 마왕! 그녀는 내 하수인으로서 이 세상에 거대한 악을 몰고 왔어야 했는데 너한테 죽고 말았지! 제기랄, 하수인을 부려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그걸 지켜보는 게 내 작은 낙인데 그걸 왜 자꾸 방해하는 거냐?”

누구라고? 김창의 얼굴이 싹 굳었다. 그는 얼른 칼을 뽑아들고 이미 죽은 트롤 왕을 겨누었다.

“네가 개눈깔의 주인이라고? 걔한테 힘을 주고 영혼 약탈자로 만든 게 너란 말이냐?”

“···개눈깔은 또 뭐냐? 외눈의 마왕을 말하는 건가? 그래, 내가 그녀의 주인이다.”

“이런 식으로 찾을 줄 알았으면 요정 기수 따라갈 필요도 없었군. 아니지, 덕분에 의뢰를 받았으니 시간 낭비는 아니었나.”

김창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걸 본 트롤 왕이 이미 무너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말했다.

“혼자 뭘 지껄이는 거냐? 왜, 내가 외눈의 마왕을 지배하는 진정한 어둠의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니 두려움에 돌아버린 게야? 그럴 수 있지. 나는 너 따위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위대한 존재니까.”

“지랄. 네가 위대한 존재면 나는 신 후보쯤 된다. 염병할 소리 그만하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뭐, 뭐어······?”

트롤 왕 너머에 있는 사람이 당황하는 가운데 김창이 말했다.

“너 어디 사냐. 주소 불러. 한 번 붙자.”

뜬금없는 결투 신청에 침묵이 이어졌다. 김창이 얼른 대답하라는 듯 칼로 트롤 왕의 몸을 쿡쿡 찔렀지만 그래봤자 저 너머까지 충격이 전해질 리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잠깐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트롤 왕의 입이 열렸다.

“내가 어디 사는지는 왜 묻는지 차치하고, 방금 뭐라고?”

“한 번 붙자고.”

“아니, 그거 말고. 그보다 더 전에.”

“내가 신 후보쯤 된다는 거?”

“그래, 그거. 이 얼치기 놈이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게야? 네가 신 후보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뭔 뜻이긴? 승천할 자라는 소리잖아.”

김창이 무심하게 대답하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지 않았다.

“흐흐, 하하하! 그래, 그런 거였나! 외눈의 마왕을 그토록 쉽게 쓰러트리길래 대체 뭐 하는 놈인가 했더니! 승천할 자라면 그럴 수 있지! 신 후보쯤 되는 놈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하하하!”

돌았나? 갑자기 왜 자기 혼자 웃고 지랄이지?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며 쳐다보는 가운데 뜬금없는 웃음은 갑작스레 그쳤다.

“너! 이름이 뭐냐! 내가 아는 승천할 자 중에 너 같은 놈은 없다! 정체를 밝혀!”

“김창.”

“김창? 뭐 이름이 그따위냐?”

“사람 이름 가지고 놀리기 있나? 그러는 넌 이름이 뭔데?”

“내 이름을 물었느냐? 그러면 귀를 크게 열고 듣도록 하여라. 내 이름을 직접 듣는 것은 흔치 않은 영광일 테니. 나는 어둠의 공작이며 심연의 대군주이자 다섯 검을 다루는 자, 또한 암흑 의회의 주인이며······.”

“야 이 씹새야. 내가 네 이름 물었지, 궁금하지도 않은 칭호에 대해서 물었어? 그런 식으로 자기소개할 거라면 나도 악마 아카온와 혼니르를 썰어 죽이고, 대악마 칼레드리온을 썰어 죽이고, 요정 기수 베르고니아를 썰어 죽이고, 승천할 자 하이나를 썰어 죽인 김창이다.”

이 새낀 뭔데 죄다 썰어 죽인 것 말고는 없어? 트롤 왕 너머의 사람이 당황하다가 문득 물었다.

“누굴 죽였다고?”

“악마 아카온과 혼니르, 대악마 칼레드리온······.”

“아니, 그딴 놈들 말고. 아니, 아니, 칼레드리온을 죽인 건 좀 대단하긴 한데 그거 말고. 제일 마지막.”

“하이나?”

“···하이나를 죽인 게 너냐? 승천자의 규율을 깨려 했던 게 너냐는 말이다.”

“맞다면 어쩔 건데.”

무심하게 대답하는 김창을 트롤 왕이 노려봤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그 너머에 있는 존재가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김창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람은 칼에 맞아야 죽는 거지, 누가 좀 째려봤다고 죽진 않는다.

그러니 째려볼 테면 얼마든지 째려보라고 해라. 그래봤자 제 눈만 아플 일 아닌가.

“···내 소개를 다시 하지. 나는 요안니스, 승천할 자다.”

얘도 승천할 자였나? 하기야 개눈깔 정도 되는 놈을 부하로 삼으려면 승천할 자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이나도 이정민을 자기 부하로 부렸는데 그런 걸 보면 승천할 자 사이에선 플레이어를 부하로 삼는 게 유행인 걸까?

이거 한석구가 알면 길길이 날뛰겠군. 김창이 혼자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부터 깔끔하게 자기 이름만 말했으면 됐잖아.”

“하, 길고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승천자의 규율을 깨려는 자가 대체 누구인가 했더니, 설마 이런 얼치기 놈이었을 줄이야. 아이야, 너는 지금 네가 한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나 있느냐?”

“승천할 자 하나 죽인 거 가지고 웬 염병이야. 내가 듣기로 하이나 그 녀석 오랫동안 살면서 나쁜 짓도 많이 했더만. 그랬으면서 언젠가 칼 맞을 줄은 몰랐나 보지?”

요안니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논리라면 나도 곧 칼 맞아 죽어야겠군.”

“그래, 내가 칼침 놔줄 테니까 집 주소 부르라고.”

“······이 멍청아. 승천할 자가 승천할 자를 죽인 것은 곧 전쟁을 의미한다. 네가 감히 겁도 없이 승천자의 규율에 도전했으니 다른 승천할 자들이 가만히 있을 줄 아느냐? 널 죽이려 들 거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승천할 자는 이제 몇 명 남았냐? 너까지 합쳐서.”

요안니스는 이 맹랑한 승천할 자에게 뭔 말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는 한참 고민하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나까지 넷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널 노리겠지. 너는 승천할 자 중에서 가장 경험이 적고 나약한 존재니까. 네가 네 명이나 되는 승천할 자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생각보다 많은데. 신이 될 자격을 가진 자가 이토록 많다면 신이라는 것도 사실 별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김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한 놈씩 덤빈다면.”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이나를 죽이고 그녀의 신성을 얻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나? 그녀는 오래 살았고 강력한 마법사지만 나에 비할 정도는 아니야. 네가 하이나를 이겼다고 해서 나한테 까불어도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눈 잘 보여. 난 그냥 너랑 한 번 붙자는 것뿐인데 뭔 혓바닥이 이렇게 길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집 주소나 불러.”

“하! 내가 그걸 왜 가르쳐 줘야 하지? 내가 왜 불청객의 침입을 허락해야 하느냔 말이다.”

이 새낀 신이 될 마음이 없나? 승천할 자를 넘어 승천자가 되려면 당연히 다른 승천할 자와 싸워야 할 텐데 얜 왜 자꾸 헛소리만 지껄이나?

하이나는 적어도 싸움을 피하려 들진 않았다. 집 주소를 안 가르쳐주긴 했는데 그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착각해서 그런 거고.

김창은 요안니스가 점점 더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라. 네가 안 가르쳐줘도 찾을 방법이 있으니까.”

“···호오, 그래? 그런 식으로 내빼고서 나에게서 도망치려는 건 아니고?”

“왜 이렇게 깝죽거리지? 혀 뽑아 달라고 그러는 건가?”

“하하하! 웃기는 놈이군. 네가 그럴 수 있다면 해봐라!”

“곧 찾아갈 테니까 기다려라.”

김창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지금 에리엇이 개눈깔의 안대를 조사하고 있으니 언젠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자기가 집 주소 안 알려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가면 그만이지. 김창이 픽 웃자 요안니스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웃어? 내가 우습나?”

“그럼 우습지, 안 우습나? 목 씻고 기다려라. 곧 찾아가서 죽일 테니까.”

“그럴 수 있으면 한 번 해―봐―라!”

요안니스가 소리치자 갑작스럽게 강력한 마력이 몰아쳤다. 트롤 왕의 상반신이 폭발하자 그 안에서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그건 괴물의 형상을 이루더니 곧 김창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것은 강력한 마력의 덩어리라 육체에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릴 만한 힘이 있었다.

김창이 보기에 저게 오히려 트롤 왕보다 더 강해 보였다. 그럼 차라리 저런 걸 몇 개 만들어서 세상에 뿌리지, 뭐하러 오우거 따위를 부하로 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어―어―어!”

마력 괴물이 두꺼운 손을 휘둘러 김창의 머리를 짓뭉개려 했다. 그러나 김창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할 필요는 없었다. 가벼운 눈짓 한 번에 허리춤에 꽂혀 있던 요도가 스스로 빠져나와 마력 괴물의 핵을 찔렀으니까.

“···뭣?”

마력 괴물이 마치 비늘에 찔린 풍선처럼 터져 나가는 걸 본 요안니스가 당황했다. 승천할 자인만큼 저런 것에 당하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방금 그건 대체?

“방금 그건? 분명히 외눈의 마왕이 쓰던······.”

“보고 베꼈다. 설마 표절이라고 욕하진 않겠지.”

요안니스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참 재밌는 놈이군. 그래,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고 했지? 언제 올 거냐?”

“좀 걸릴 것 같은데. 내가 먼저 손 봐줘야 할 놈이 있어서.”

“크큭, 겁을 먹은 건 아니고?”

왜 이렇게 까불지? 김창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지랄. 대악마 하나 잡고 레벨 업해서 갈 테니까 딱 기다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