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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08화 (10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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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발!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 협조하면 반병신이 되는 선에서 끝내주겠다며!”

마법사가 악에 받혀 소리치자 김창이 코웃음을 날렸다.

“그건 너희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몰랐을 때의 이야기지. 너희가 먼저 날 속였으면서 자비를 바라나?”

거기에 대해선 마법사도 할 말이 없었다. 김창의 말대로 거짓말을 했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대로 죽을 생각은 없었다. 추하긴 하지만 살기 위해선 뭐든 해야만 했다. 마법사가 다급히 외쳤다.

“잠깐! 날 죽이지 않고 살려주면 요안니스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요안니스는 지난 시대의 승천할 자야! 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건 이제 나 외에는 아무도 없어!”

“정확히 말해서 인간 중에는 너 외엔 없는 거지.”

“뭐? 그게 무슨 소리······.”

김창이 마법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 생각대로라면 요안니스는 고대의 요정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그에 대한 정보는 요정에게 물어야겠지.”

“그,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 요정은 인간을 열등종이라 부르며 깔보고 있다. 그 재수 없는 귀쟁이들이 너에게 순순히 협조할 리가······.”

거기까지 말하고 마법사는 흠칫 몸을 떨었다. 김창은 칼 한 자루 들고 찾아와서 협조하면 반병신이 되는 선에서 끝내주겠다고 말하는 미치광이다.

그런 남자가 요정이 상대라고 다른 태도를 보일까? 분명 지금 그랬던 것처럼 칼 한 자루 들고 찾아가서 요안니스에 대한 정보를 뱉어내라고 윽박지를 가능성이 크다······.

“아, 아무리 승천할 자라도 요정 왕국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건 미친 짓이야! 일곱 요정 대가문의 기수는 물론이고 가주, 그리고 요정왕까지 그 전부는 모두 뛰어난 전사들이다! 아무리 승천할 자라도 그 전부를 상대하는 건 무리야!”

김창이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소리 내며 말했다.

“대체 뭔 상상을 하는 거냐? 아무리 나라도 요정 왕국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짓거리는 안 해. 애초에 나는 딜루키둠 가문과 인연이 있단 말이다. 굳이 칼부림할 이유 없어.”

그 말을 듣고서 마법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김창이 정말 딜루키둠 가문과의 인연이 있다면 자신의 가치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괜한 도발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승천할 자 놀이에 너무 심취해서 내가 진짜 승천할 자라도 되는 줄 착각했어. 아니, 애초에 이 개자식은 우리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뭔 수로 찾아온 거냐고······.”

마법사가 망연자실한 듯 중얼거리는 걸 본 김창이 비웃음을 흘렸다.

“새끼야, 애초에 깝죽거리질 말았어야지. 인제 와서 후회하면 뭘 해? 고개나 똑바로 들어. 움직이면 한 번에 안 끝난다.”

마치 사형수의 목을 베는 사형집행인처럼 칼을 어깨 위에 걸친 김창이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그는 마법사의 목을 칼로 가만히 겨누다가 곧 휙 하고 휘둘렀다. 점차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본 마법사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요안니스, 고대의 승천할 자여! 내 간청하건대,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부디 저 씹새를 죽여주소서!”

서걱!

목이 잘리고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던 머리는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뜬 채였다.

김창은 그걸 가만히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름 훔친 놈 부탁을 잘도 들어주겠다, 멍청아.”

그는 그대로 방을 나와 지상으로 올라갔다.

가게 위로 올라와 보니 가게 주인이 반으로 갈라진 진열대에서 쏟아진 술을 걸레로 훔치고 있었다.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든 가게 주인이 김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시선이라 김창이 말했다.

“왜, 저 아래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가? 이 비밀 통로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

가게 주인은 김창의 몸에서 짙은 피 냄새가 난다는 걸 눈치챘다. 그가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궁금하면 한 번 가봐.”

“안 궁금한데요?”

가게 주인은 절대로 궁금하지 않다는 듯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그걸 본 김창이 웃으며 가게를 나섰다.

“많이 팔라고.”

대답은 없었다. 하기야 자기 가게 아래에서 뭔 일이 났는데 대답할 마음이 나겠냐마는.

김창은 거리를 걷다가 자신이 통과했던 차원문으로 들어갔다. 원탁으로 돌아가니 두런두런 떠드는 말소리가 들렸는데 고개를 돌리니 한석구와 에리엇이 보였다.

저거 자기 가문으로 돌아간다더니 아직 안 갔나? 김창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에리엇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니, 벌써 죽이고 왔나? 아무리 그래도 몇 시간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요안니스 말하는 거면 아직 안 죽였다.”

“음? 그러면 왜 돌아왔나? 설마 겁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니지. 그것보다 너는 왜 안 돌아갔어?”

에리엇이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차라도 좀 마시고 가라 해서. 그래서 차 마시던 중이었는데 담소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군?”

“아, 그러셔.”

김창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한석구가 물었다.

“그런데 너 왜 돌아왔냐? 혹시 거기에 요안니스 없디?”

“그래, 없더라.”

“없었다고?”

에리엇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가? 암흑 의회를 건드렸다면 분명 요안니스가 나섰을 텐데?”

“내가 암흑 의회 애들 싹 다 조지고 왔는데 안 왔어. 애초에 올 수가 없지.”

“올 수가 없다니?”

김창이 무심히 대답했다.

“내가 가서 칼빵 놔주면서 물어보니까 애초에 그런 사람 없다더라. 승천할 자 요안니스라는 건 죄다 자기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래.”

이건 또 뭔? 에리엇과 한석구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너무나 어이없는 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혀 있는데 김창이 말을 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걔네가 말하는 요안니스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야. 그런데 그 원본이 되는 인물 자체는 있어.”

“그건 또 뭔 소리인가?”

“이건 내 추측의 영역이다만······.”

김창은 암흑 의회의 마법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에리엇에게 들려줬다. 이야기를 경청하던 에리엇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하지만 그럴 수가 있나? 지난 시대의 승천할 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번 시대의 신좌를 노린다니? 아무리 요정이라고 해도 그건 미치광이나 할 법한 짓이라 난 도무지······.”

“그만큼 신의 자리가 탐났나 보지 뭘. 그것보다 너한테 시킬 일이 있다.”

부탁할 일도 아니고 시킬 일이라니? 에리엇은 이 건방진 단명종의 말투가 불만스러웠지만 감히 따지고 들 수 없었다. 요정이라고 몸에 칼 안 드는 건 아니었으니까.

“···무슨 일?”

“진짜 요안니스에 대해서 조사해 봐. 그리고 요정 왕가의 혈통 중에 그런 요정이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글쎄, 요정은 손이 귀한 종족이야. 왕족쯤 되면 더욱 귀하지. 그러니 요안니스라는 왕족이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안 찾아올 건가?”

이러면 없는 왕족도 만들어서 찾아와야 할 판이다. 에리엇이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한 번 알아보지.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러면 주인장, 차 잘 마셨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자고.”

에리엇이 인사하자 한석구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흑요정 전사들은 곧 차원문을 통해 테네벨레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한석구가 말했다.

“이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 설마 요안니스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실은 존재하긴 해도 과거의 사람일 줄은 더 몰랐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뭘 어째. 쟤가 뭐라도 물어올 때까지 잠정 휴업이지.”

그 말에 한석구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사람이 게임만 너무 많이 하면 정신 이상해지는 거 알지? 사람 죽이는 것도 똑같아. 그런 짓만 자꾸 하고 다니면 너 커서 이상한 사람 돼.”

“이미 다 컸어, 자식아.”

“그래, 이미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고개를 돌려 창문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을 창문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더 멀리 보고 있었다.

그건 미래에 대한 응시였다. 언젠가 찾아올 승천할 자와의 싸움에 대한 응시.

* * *

정복자는 호엔의 영주다. 영주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이 땅의 주인이자 지배자라는 뜻인데 처음엔 이 역할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는 성기사지만 그 본질은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청년일 뿐이다.

당연히 남 위에서 군림하는 일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보이지 않는 신분의 격차가 있다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주 같은 게 있진 않다.

현대 사회에서 재벌 2세가 돈으로 남들 위에서 군림할 수는 있어도 남들 다 보는 길바닥에서 아무 죄 없는 사람 뺨을 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선 영주가 길 가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놈 뺨을 때리다 못해 반죽음을 만들어도 감히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왜? 영주니까. 이 땅의 주인이자 지배자니까.

정복자는 그러한 사실이 몹시도 불편했다. 하지만 감히 그걸 뜯어고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그냥 그런 식으로 길고 긴 세월을 살아왔다. 이제부터 신분제는 없다고 말해봤자 누가 듣기나 할까?

그 왜 미국 건립 때 사람들은 대통령이라는 걸 그냥 투표로 뽑힌 왕 같은 거로 생각했다지?

그러니 여기 사람들도 투표로 새 지도자를 뽑아봤자 그냥 영주의 다른 이름쯤으로 생각할 게 뻔하다.

그러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뭔가? 여기 사람들에게 억지로 민주주의니 신분제 폐지니 그딴 걸 주입할 게 아니라 그냥 잘 다스리면 된다······.

정복자는 그 사실을 깨닫고서 자신의 책무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왕 맡게 된 자리니 여기 사람들을 잘 돌보는 게 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원탁에서 지원금을 뜯어낸 뒤 있는 대로 영지 재건에 쏟아부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을 중용하여 밤낮없이 뛰어다녔더니 어느 정도 영지 운영의 뼈대가 잡히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방인 영주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보이던 사람들도 어느새 진심으로 정복자를 찬양했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정복자는 기쁘기도 하면서 입맛이 썼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사람이 사람을 잘 지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찬양을 받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답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제 양심에 따라 행동할 뿐.

“영주님?”

정복자는 상념에서 깼다. 그는 자신이 잠깐 손을 놀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서류 더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비서가 다시 한번 말했다.

“영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급한 용무인데요.”

“급한 용무? 뭔데? 또 다른 영지에서 시비 거나? 가서 손 좀 봐주면 돼?”

비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일단 나가보셔야겠는데요······.”

아직 일이 많이 남았는데. 정복자는 끙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비서를 따라서 영주궁을 나와 성벽 위로 올라갔을 때였다.

정복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저게 다 뭐야···?”

성벽 아래엔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게 전부 무장한 병사였다면 이토록 놀랍진 않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영주님,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오갈 데 없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부디 자비를!”

저건 난민이었다. 대체 어디서 온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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