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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09화 (10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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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요 며칠 동안 자신이 생각보다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에리엇에게 요안니스에 대한 정보를 알아 오라고 시킨 게 며칠 전의 일인데, 그다지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아무런 소식이 없자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요안니스라는 요정왕의 혈통이라 아직까지 살아남아 이번 시대의 신좌를 노린다는 건 자신의 망상일 뿐이었나?

요안니스라는 고대의 승천할 자가 정말 존재했다는 건 마법사가 가지고 있던 유물로 증명됐지만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가 한때는 승천할 자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각 유물에 자신의 힘을 나누어 봉인하지 않았나?

승천할 자라고 해도 칼 맞으면 죽는데, 신성을 잃은 존재는 그보다 더욱 쉽게 죽을 수 있다.

만약 요안니스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진작 힘을 되찾았을 것이요, 자신의 이름을 사칭하는 암흑 의회를 응징하러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을 걸 보면, 심지어 웬 마법사 따위가 여러 유물 중 하나를 얻은 걸 보면 요안니스는 진작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한 건 다 헛짓거리가 되는데. 내가 썼던 시간이며 노력, 그런 건 다 누가 보상해주나······.’

만약 요안니스가 정말 죽었다면 이젠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있지도 않은 고대의 승천할 자에게 매달릴 게 아니라 당장 바깥으로 나가서 새로운 적을 찾는 게 맞았다.

‘내가 잡을 승천할 자가 다 없어지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지.’

김창은 다른 승천할 자가 더 많은 신성을 얻어 신이 되는 걸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그냥 자기가 한 번 붙어볼 만한 적이 없어지는 게 싫을 뿐이다.

게임으로 치면 딱 한 명만 해볼 수 있는 컨텐츠가 있는데 그걸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는 격이다.

한때 망겜을 즐기던 사람으로서 그건 끔찍하게 싫은 일이었다.

“가봐야겠어.”

“또 어딜?”

열심히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한석구의 집무실 안에서 종이접기나 하고 있던 김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열심히 접은 종이 개구리를 손가락으로 날려 보내더니 말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 좀이 쑤셔서 안 되겠다. 나가야지.”

“좀이 쑤시니까 어디 가서 누구 칼로 쑤시고 다닐 셈이냐? 그런 거라면 얌전히 기다려. 에리엇이 정보 가져다주겠다고 했잖아? 그게 겨우 며칠 전 일인데 인내심이 벌써 바닥난 거야?”

“언젠가 반드시 요안니스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몇 주고 몇 달이고 기다릴 수도 있어.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어쩌면 요안니스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원래 주식도 분산 투자해야 안전한 거 알지? 요안니스 하나에만 매달리고 있다가 못 찾게 되면 내 시간만 손해잖아. 그러니 다른 승천할 자도 찾아봐야지.”

“뭐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굳이? 한 몇 달 기다린 것도 아니고 겨우 며칠 기다린 건데 나라면 일주일이라도 진득하게 기다려보겠다. 그리고 너 떠난 뒤에 에리엇이 오면 어쩌려고? 그러면 길 엇갈려서 그것도 시간 낭비 아닌가?”

“그것도 그런데······.”

김창과 한석구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의장님?”

원탁에서 접수원을 맡은 서수민이었다. 그녀는 김창을 보고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곧 한석구를 향해 말했다.

“잠깐 나가보셔야겠는데요. 손님 오셨어요.”

“손님?”

설마 에리엇인가?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김창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두 사람이 서수민의 뒤를 따라서 홀까지 걸어갔다.

거기엔 과연 아는 얼굴이 있었다. 다만 기다리던 손님은 아니었다.

김창이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말했다.

“정복자? 우리 영주 나리께서 여긴 또 무슨 일이냐?”

“오랜만에 보는데 여전히 재수 없는 면상이로군. 너 만나러 온 거 아니니까 꺼져.”

저번에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얼마간 얼굴 안 보내고 지냈더니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 몸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김창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오른쪽으로 비켜서자 한석구가 말했다.

“왜 그래? 뭔 일 있어? 설마 영주 때려치우고 다시 원탁으로 돌아오겠다는 거 아니지? 너 이제 영주 노릇에 제법 재미 붙여서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아니야. 석구야, 나 좀 도와주라.”

“도와달라고? 왜, 또 돈이 부족해서 온 거야?”

한석구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복자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돈 필요해. 그리고 돈만 필요한 게 아니라 식량이나 옷가지, 그리고 사람들 지낼 곳도 필요해.”

정복자의 목소리에서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한석구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뭔 일인데? 설마 전쟁이 터져서 영지가 망하기라도 했니?”

“그런 건 아닌데 비슷하긴 해.”

“비슷하다는 게 뭔 말이야?”

정복자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얼마 전부터 호엔으로 난민이 모여들고 있어. 오는 거야 괜찮은데 문제는 그 숫자가 너무 많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호엔은 작은 도시다. 난민 한둘이면 몰라도 수천 명을 수용할 수는 없어. 당장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난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건 무리야. 임시로 지낼 거처를 만들어주기도 어렵고.”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한석구가 눈을 끔뻑였다. 그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난민이 모여들고 있다고? 난민이라면 내가 아는 그 난민이 맞나? 그 왜 오갈 데 없어서 몰려든 사람들?”

“그래.”

“허, 그러면 근처 영지에서 전쟁이라도 하고 있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천 명이나 되는 난민이 호엔으로 몰려들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정복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야. 역병이다.”

“역병? 전염병 같은 거?”

“역병이라고 할까, 엄밀히 말해선 저주 비슷한 거야. 처음엔 고열이 발생해서 사람을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다가 그 뒤엔 극심한 두통이 머리를 괴롭히지. 마지막엔 아주 백치가 돼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데 그러다가 며칠 뒤에 죽어.”

“그거··· 참 끔찍한 병이네.”

“문제는 죽고 난 뒤야. 역병이 돌면 원래 시체를 소각하는 거 알지? 괜히 병균이 다른 사람 몸에 옮겨붙는 걸 막기 위해서. 그런데 어느 마을에서 시체를 한데 모아서 소각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시체가 괴물로 변해서 사람들을 습격했다. 그래서 그 괴물에게 물리면? 그대로 같은 괴물이 돼버리는 거지.”

“병에 걸려도 괴물이 되는데 괴물한테 물려도 괴물이 된다고? 뭐 그딴 게 다 있어?”

정복자가 버릇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이게 제법 큰 문제야. 수천 명이나 되는 난민이 다 어디서 왔나 했더니 주변 도시가 대부분 역병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어. 가만히 있으면 병에 걸려서 괴물이 되거나 괴물한테 물려서 괴물이 될 판이니 다 도망치는 거지.”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이 세상에서 역병은 크나큰 문제다. 그냥 역병이 돈다고 해도 큰일인데 걸리면 괴물이 되는 저주에 가까운 역병이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한석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난민들이 왜 다 호엔으로 몰려드는 거야? 그게 저주에 가까운 역병이라면 신전에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나? 내가 알기로 호엔 근처에 대도시가 하나 있어서 거기 가면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설마 난민 받기 귀찮다고 다 쫓아낸 건 아닐 테고.”

“굳이 호엔으로 온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첫째는 다른 데도 상황 다 비슷해서고 둘째는 나 때문이고.”

“네가 왜?”

정복자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말했다.

“아까 네가 신전에 가서 도움 청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 이번 역병이 저주에 가까운 거라 약초 뜯어 먹는 걸로는 해결이 안 되니까. 그래서 호엔으로 오는 거야. 거기에 신전은 없어도 세상에서 제일 강한 성기사가 있으니까. 내가 있으니 뭔가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뭘. 실제로 난 신 같은 거 믿지도 않는데 말이야.”

한석구가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그래서 너 진짜로 역병을 낫게 할 수 있는 거냐?”

“성기사도 힐 스킬 있긴 한데 자기한테만 쓸 수 있어. 딜탱 다 되는 캐릭터가 남한테 힐까지 줄 수 있으면 아무도 사제 안 키울 테니까. 그리고 저주는 원래 저주 해제 스킬 있어야 하는데 성기사는 그거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찾아와봤자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야.”

정복자가 난 그냥 내 영지 하나만 잘 다스리면 끝일 줄 알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냐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가운데 김창이 불쑥 말했다.

“그래서 그 역병의 원인이 뭔데? 그냥 역병이면 몰라도 그런 저주 같은 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게 아닐 거잖아.”

“아, 그거 말이지. 내가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니까 호엔 근방에서 웬 잡놈이 설치고 있다더라. 자기 말로는 역병 군주라고 하던데 뭐 하는 놈인진 별 관심 없고 나 혼자 쳐죽이자니 그 밑에 따까리들이 너무 많아서 아주 짜증스러워.”

역병 군주라. 누군진 몰라도 에리엇을 기다리는 동안 죽이면 되겠군. 김창이 혼자 입맛을 다시는 동안 정복자가 말했다.

“그래서 석구야? 내 염치없는 부탁인 거 알지만 나 좀 도와주라. 그 많은 사람 그냥 다 굶어 죽게 둘 수는 없잖아.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 좀 해줘. 그리고 역병 군주도 죽여야 하니까 사람 좀 보내주고.”

정복자는 한석구가 제법 오래 고민하리라 생각했다. 원탁이 돈이 많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한하지는 않다.

원탁의 자본은 칼라드와 아산트 섬, 그리고 마탑에서 나오는데 그 돈을 일면식도 없는 난민들 살리는데 쏟아붓자고 하는 건 한석구로서 별로 기꺼운 일이 아닐 터다.

“그래, 그러자. 사람도 보내달라고? 그러지 뭐.”

그러나 생각한 것과 달리 한석구는 너무나도 빨리 대답했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인 대답을.

정복자가 두 눈을 끔뻑이고 있는데 한석구가 김창을 향해 말했다.

“너 심심하다고 했으니까 네가 갔다 와. 혹시 더 데려갈 사람 있으면 데려가고. 설마 거절은 안 하겠지?”

“그럴 리가 있나. 금방 다녀오지.”

정복자가 한석구를 보며 말했다.

“내 요구를 들어줘서 고맙긴 한데, 어째서? 너 원래 플레이어만 챙기던 사람 아니던가?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솔직히 난민들이야 굶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아까 듣자 하니 역병 때문에 호엔 주변이 아주 난리라지? 굳이 자기 살던 곳도 버리고 호엔으로 온 걸 보면 각 도시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게 분명한데 그럼 이 기회를 그냥 버릴 수는 없잖아.”

“뭔 소리야?”

한석구가 왜 이걸 이해 못 하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은 그 역병 군주인가 하는 놈만 죽이면 다 끝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걸 해결하는 건 우리한테 아주 쉬운 일이지. 그럼 호엔 주변 땅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다 먹을 수 있는데 안 도와줄 이유가 뭐야?”

그런 이유였나? 정복자가 아연한 얼굴로 한석구를 쳐다보고 있는데 김창이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 역병 군주라는 놈이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다던가 실은 과거의 인물이라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저번에 한 번 매물 사기를 당한 적이 있어서.”

이 새낀 또 뭐야? 정복자는 이 인간들의 도움을 받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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