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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10화 (10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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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너희뿐이라서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이군······. 어쨌건 도와주겠다는데 나쁜 소리는 더 안 할게. 고맙다. 진심으로 고마워.”

김창은 정복자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서 흠 소리를 냈다. 저 멍청한 놈, 원래는 그리 자존심 세면서 이럴 땐 그리도 쉽게 고개를 숙인다.

저걸 착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어쨌건 김창으로선 일하고 보상만 받으면 그만이었기에 별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말했다.

“사람 여럿 보내 달라고 했지? 하지만 굳이 줄줄 여럿이 몰려갈 필요 있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나 아주 세서 역병 군주고 뭐고 혼자서 썰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자기 입으로 하긴 좀 그런 말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정복자가 바로 대답했다.

“내가 아직 역병 군주 놈 얼굴도 못 봐서 걔가 얼마나 센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보다 강하진 않겠지. 하지만 너 혼자 와선 안 돼.”

“왜?”

“이게 던전 속 보스 레이드였으면 너 혼자 와도 되겠지. 넌 혼자서 보스 죽일 수 있는 놈이니까. 그런데 이건 보스 레이드가 아니라 전쟁이야. 내가 아까 말했지? 역병 군주 놈 죽이려고 해도 그 밑에 부하들이 너무 많아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내가 이젠 너보다 약할지 몰라도 역병 군주가 무섭다고 도움 청하러 올 만큼 좆밥은 아니다.”

혼자서 딜탱은 물론이고 힐까지 가능한 성기사는 그 누구보다 보스 레이드에 특화된 직업이다. 심지어 신성 마법도 쓸 수 있어서 잡몹 처리까지 가능하다.

그러니 성기사는 능력만 된다면 혼자서 보스를 잡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다. 그런데 그런 직업을 가진 정복자가 원탁에 도움을 청했다는 건 뭘 의미하는가?

그건 적이 너무 많아서 그 잘난 성기사조차 혼자서 역병 군주에게 도달하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아무리 보스 레이드를 잘해도 결국 보스 룸까지 가지도 못하면 그게 뭔 의미가 있나?

생각해보라. 신성 마법을 쓸 수 있는 성기사조차 역병 군주에게 도달하지 못했는데 그저 칼 한 자루 휘두르는 게 전부인 칼잡이는 과연 가능하겠는가?

김창의 칼질은 위협적이지만 그건 몹시 정직하게도 한 번에 한 놈만 죽일 수 있다. 보스를 칼질 한 번으로 죽일 수 있지만 잡몹도 똑같이 칼질해서 죽여야 한다는 건 이번 상황에서 그리 유리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발도 쓰면 한 번에 싹 쓸어버릴 수야 있겠지만 필살기를 잡몹들한테 낭비하는 건 좀 ······.’

김창은 헤인리히스와 싸우면서 자신도 방심하면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죽는 게 두렵진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심해서 죽으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이 어디겠는가?

죽을 때 죽더라도 제대로 싸우고 죽어야지, 그런 식으로 죽어선 안 될 일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싸움을 하기 위해선 역병 군주를 만나기 전까지 컨디션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잡몹들이 귀찮다고 신성의 힘을 아무 데나 뿌리는 건 확실히 낭비다.

“뭔 소리 하는지 알겠군. 그러면 내가 역병 군주랑 싸울 수 있도록 따까리들 상대해줄 놈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네.”

“그래. 그리고 내가 듣기로 역병 군주 밑에는 친위대가 있는데 걔네도 제법 강하다더라. 그러니 걔네 맡아줄 사람도 필요해.”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석구가 말했다.

“그런 거라면 내가 가지. 솔직히 원탁에서 나보다 쫄 처리 잘할 놈 없을 테니까.”

한석구는 마법사다. 손짓 한 번으로 괴물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건 지난번 전투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정복자가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석구 네가 와주면 너무나 고맙지. 그런데 자리 비워도 돼? 일 많지 않나?”

“괜찮아. 자리 비워봤자 겨우 며칠 아닌가? 다른 애 보내면 일 끝내는데 며칠 더 거릴 텐데 그럴 바엔 그냥 내가 가서 빨리 끝내는 게 더 나아.”

김창이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김용걸 보내는 게 낫지 않나. 전쟁에선 오히려 걔가 더 나을 텐데. 걔 사령술도 쓰고 그러니까 괴물들 죽여서 되살리면 우리 쪽에서 사상자도 안 나올 텐데.”

“용걸이 바빠. 마탑주 되고 나서부터 여기저기 거래 뚫고 다니는데, 옛날에는 마탑이랑 거래 안 했던 애들도 용걸이가 가니까 이상하게 거래하자고 그러더라. 덕분에 일거리 늘어나서 돈은 많이 들어오니 나야 기쁜 일이지만.”

그거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강매하고 다니는 거 아닌가? 김창이 허 소리를 내는 가운데 정복자가 말했다.

“김용걸? 걘 또 언제 마탑주가 됐어?”

“좀 됐지? 지난번에 신전에서 시비 걸어서 그냥 우리가 인수하기로 했는데 왜?”

얘넨 뭘 하고 다니는 거지? 정복자가 어이없어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쨌건 석구랑 김창, 너희 둘이 와주는 거지? 정말 고맙다. 너희 둘만 와도 정말 든든할······.”

“아니, 더 보내야지. 내가 알기로 호엔에 병력도 별로 없잖아? 원탁에서 받은 돈은 죄다 민생 구제에 쓰고 있어서 상비군 늘릴 여력 없고, 애초에 누가 시비 걸면 너 혼자서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병력 늘릴 이유도 없으니 군대가 치안 유지만 겨우 할 정도로만 있다던데. 그러면 사실상 전쟁을 우리 셋이서 해야 하는데 아무리 우리가 잘나도 그건 좀 무리지.”

역병 군주의 군세는 혼자서 호엔 주변의 도시들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하다. 역병의 존재 때문에 전쟁을 하면 할수록 그 병력은 더욱 늘어날 텐데, 그걸 생각하면 지금쯤 그 세력은 군단에 가까우리라.

한석구의 말대로 그 정도 숫자는 셋이서 상대하기 버겁다. 이길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싸움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소리다.

“그러면?”

“애들 좀 데려가야지. 내일 바로 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그리고 일단 되는 대로 식량하고 보낼 테니까 사람들한테 조금만 견디라고 해주고.”

정복자는 씩 웃는 한석구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많이 데려오면 데려올수록 전쟁은 더 빨리 끝날 테고, 그러면 사람들 역시 더욱 빨리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다.

그러면 정복자로선 그걸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정말 너무 고맙다. 그러면 내일 보자.”

정복자가 차원문을 통해 호엔으로 돌아갔다. 그는 호엔의 영주로서 사람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누굴 데려가려고?”

김창이 묻자 한석구가 웃었다.

“그건 내일 되면 알 거야. 난 일단 저쪽에 식량이나 좀 보내야겠네. 민우랑 여기저기 돌면서 식량 싹 사들여서 차원문으로 보내면 며칠은 버티겠지.”

전쟁에서 보급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고립된 도시가 금방 항복하는 이유가 뭔가? 아무리 잘 싸우는 전사들이라도 먹을 게 없으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원문을 마음대로 열 수 있는 원탁의 전쟁 수행 능력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우수했다.

만약 누군가가 칼라드를 포위하더라도 차원문으로 식량을 조달해 공급하면 끝이니까. 차원문 마법을 방해하려고 해도 심민우는 차원문 마법에 한해선 달인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방해할 수도 없다.

‘반대로 우리가 공격할 때도 한석구가 심민우만 데리고 여기저기 차원문 열고 테러만 하고 도망쳐도 저쪽에선 막을 방법이 없지······.’

현대 병기로 따지자면 심민우는 수송기요, 한석구는 폭격기다. 둘이서 차원문 열고 주요 도시에서 순회공연만 몇 번 열어도 적들은 금방 항복할 게 분명하다.

국가와 전면전을 벌이는 건 원탁으로서도 자살 행위지만 그런 식으로 싸운다면 아무리 거대한 나라라도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탁이랑 싸울 놈들은 날 제일 먼저 제거할 게 아니라 심민우랑 한석구를 우선으로 죽여야겠군. 그래야 팔다리 다 잘리는 셈일 테니까.’

김창은 새삼 원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집단인지 깨달았다. 일개 집단이 국가와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은 물론이고 승산조차 몹시 크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김창은 혼자 웃으며 바쁘게 자리를 떠난 한석구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한석구가 정말 왕이 되려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잠자코 내일을 기다렸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떠오르는 아침에 김창은 어제 그 자리에 다시 섰다.

홀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만 지금은 더욱 많았다. 그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저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일단 김창은 두 명을 알아봤다.

그리고 저쪽에서도 이쪽을 알아봤다.

“안녕!”

활기차게 웃으며 인사하는 건 요정이었다. 원탁에 요정이라고는 두 명뿐인데 하나는 정원에 박혀 있으니 지금 여기 있는 요정은 산자이였다.

“넌 왜 여기 있어?”

“석구 아저씨가 불렀으니까 있지? 우리 뭐 전쟁하러 간다며? 그래서 사람들 구해주러 간다고 들었는데?”

김창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너도 가냐?”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뭘 어쩌겠냐? 심지어 난 지난번에 지은 죄가 있어서 싫다고 말할 처지도 아니고······.”

한숨을 쉬며 말하는 건 하오성이었다. 가기 싫다고 말하는 것치고 그 목소리는 제법 밝았다.

어째서인가? 산자이는 몰라도 하오성은 원탁의 랭커가 으레 그러하듯 이런 일에 끼는 걸 아주 싫어할 텐데.

김창이 의아해하는데 산자이가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그는 그 쓸데없는 말을 대충 한 귀로 흘려버렸다.

산자이는 한참 떠들더니 하오성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럼 나중에 전장에서 봐!”

김창은 고개만 끄덕였다.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심민우가 나타나 차원문을 여는 게 보였다.

그가 한 줄로 서서 순서를 지키면 더 빨리 갈 수 있다느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다가왔다.

김창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뭔 생각이냐?”

“뭔 생각이긴? 복자가 도와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사람들 보내는 건데 왜?”

김창이 이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가 한석구를 보며 말했다.

“산자이랑 하오성을 불렀더군. 걔네도 랭커니까 이번 일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 그런데 꼭 걔네 아니어도 될 텐데 왜 굳이? 그리고 랭커도 아닌 애들은 왜 무더기로 보냈어?”

“대충 둘러댈 말이 있고 진짜 이유가 있는데, 어느 걸로 들을래?”

김창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진짜 이유.”

한석구는 굳이 이유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설명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이번 전쟁이 끝나면 산자이랑 하오성한테 영주 자리 줄 거야.”

뜬금없는 소리였다. 김창이 눈썹을 까딱이자 한석구가 이어 말했다.

“복자 말대로라면 호엔 주변의 영지가 지금 주인도 없이 버려진 셈이라지? 그거 우리가 먹을 생각인데 그러면 누군가한테 영주 자리를 나눠줘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산자이랑 오성이한테 영주 자리 주겠다고.”

“그러니까 왜 산자이랑 하오성이냐고. 영주 자리는 아무나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무나 해선 안 되지. 내 말 잘 듣는 놈이 해야 나한테도 이득 아닌가? 내가 지난번에 말했지, 내 말 잘 듣고 공 세우는 놈들에게 영주 자리 주겠다고. 그러면 이번에 산자이랑 오성이가 영주 자리 받는 거 보고 다른 랭커들이 뭔 생각할까? 아, 한석구 저 새끼 말을 잘 들어야 콩고물이 떨어지겠구나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일로 네 말 안 듣는 랭커 놈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겠다고?”

“그들에게 원탁에 복종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거지. 나는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의무를 지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랭커라면 응당 약자를 수호하고 원탁을 위해 일해야 할 의무가 있어. 하지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놈들이 순순히 원탁의 말을 들을 리가 없지. 그러나 이젠 달라. 내가 공적에 따라 영주 자리를 나눠주게 되면 그들은 자존심 다 버리고 원탁에 복종하게 될 거다.”

그 말을 하는 한석구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원탁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창이 물었다.

“그럼 다른 애들까지 싹 데려가는 건?”

“원탁을 위해 일한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함이지. 쪼렙이 언제까지고 쪼렙일 리는 없지. 우리가 보기엔 좆밥이어도 언젠간 그들 중에서도 영주 노릇할 만큼 강해지는 놈이 나올 거야. 만약 새로운 랭커가 탄생한다면 난 기꺼이 영주 자리를 줄 거다. 원탁을 위해 헌신했다면 영주가 될 권리가 있으니까.”

김창은 점차 플레이어 출신 영주가 늘어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 위에는 원탁이 군림할 것이다.

그러면 그 원탁의 주인인 한석구는 어찌 될 것인가? 원탁이 충분히 커지고 나면, 그때의 그는 무엇이 될 것인가?

김창이 물었다.

“너 왕이라도 되려는 거냐.”

한석구가 웃었다.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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