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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45화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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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눈 마주쳤다가 칼 맞지 말고 다들 눈깔아.”

김창은 유유히 적진 속을 걷고 있었다. 수적으로 따지자면 병사들 쪽이 훨씬 더 유리했으나 그들은 감히 이 무시무시한 칼잡이에게 덤벼들 각오를 다지지 못했다.

병사들은 원탁에서 어중이떠중이 취급을 받는 사람도 전장에 나서면 그들을 학살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고무신은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을 학살할 수 있는 실력자라는 것도 알고.

이제 그들은 저 칼잡이가 그 잘난 고무신을 학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됐다.

세상 어떤 멍청이가 저 남자에게 감히 칼을 들이밀겠는가? 죽음을 원한다면 그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많이 있다. 심지어 더 깔끔하고 덜 고통스럽기까지 한.

“전쟁은 끝났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가서 왕이 왜 그냥 돌아왔냐고 묻거든 머지않아 알게 되리라고 전해.”

김창은 남은 병사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인데, 김창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정신 나간 살인마가 아니다.

어쩌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일진 몰라도, 어쨌거나 그는 항상 이유가 있을 때만 사람을 죽인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고무신은 죽었고 병사들은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저들을 싹 다 죽인다고 해서 신성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런 짓거리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유가 없으면? 그럼 사람을 왜 죽이나? 미친놈도 아니고.

“저기······.”

고참 병사로 보이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창이 그를 쳐다보자 병사가 흠칫 놀랐다.

“왜?”

김창의 목소리는 따뜻하진 않았지만 싸늘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무적이었을 뿐이기에 병사는 조금의 용기를 얻고서 말했다.

“저, 정말 우릴 그냥 보내줄 겁니까? 당신네 입장에선 우린 침략군인데······.”

“만약.”

김창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만약 전사로서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게 수치라면, 그래서 여기서 싹 다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다면, 그러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죄 죽여줄 수는 있지. 그건 아주 귀찮고 수고로운 일이겠지만 난 곧 죽을 사람 소원도 못 들어줄 만큼 야박한 사람은 아니야.”

“아니, 아닙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저들을 죽이고 있던 건 김창인데 그 사람한테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말하는 건 참 우스운 일이다.

김창은 얼른 가보라는 듯 대충 손을 흔들었고 병사들은 빠르게 후퇴를 결정했다. 그들이 무기며 식량 따위를 챙기는 걸 가만히 보던 김창이 문득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돌아가서 다른 군대에 붙어서 다시 싸우고 그러지는 마. 이건 충고야. 너희를 살려주는 건 내가 자비로운 인격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죽일 이유가 없어서 그런 거야. 그런데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땐 이유가 생길지도 모르지.”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병사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철수를 서둘렀다.

김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지나 호엔 쪽으로 걸었다. 성벽이 가까워지자 병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구원자 김창 만세!”

“김창 만세! 만세!”

“원탁에서 사람 제일 잘 죽이는 김창 만세!”

마지막 건 누가 외친 거야?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며 성벽 위를 쳐다보자 산자이가 깔깔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김창은 쯧 하고 혀를 차며 활짝 열린 성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정복자와 산자이, 그리고 한석구까지 세 사람이 김창을 반겼다.

“수고했다, 김창. 우리가 1년이나 질질 끌던 싸움을 1시간도 안 돼서 끝내버렸네.”

정복자가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탁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호엔의 영주로서, 내 기꺼이 고개 숙여 감사하지. 고맙다, 김창. 네 덕분에 내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김창은 징그럽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툴툴거리는 건 칭찬을 받으면 부끄러워서 몸을 베베 꼬는 사춘기 소년이나 할 법한 짓이다.

“감사 인사는 일 다 끝나고 나서 듣기로 하지.”

“하기야 아직 전쟁이 안 끝나긴 했지. 그래서 지금 당장 가려고?”

“고무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저쪽에 전해지기 전에 끝내야 해. 괜히 시간 끌었다가 저쪽이 기습에 대비할 시간을 줄 필요는 없지.”

“그것도 맞는 말이군.”

정복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줄곧 조용히 있던 한석구가 말했다.

“아까 싸우는 걸 보니까 정말 놀랍더라.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노란 쥐새끼도 아니고 몸에서 막 전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칼질은 또 얼마나 빨라? 내가 저 멀리서 마법으로 지켜봐서 그런 게 아니라 가까이 가서 직접 봐도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겠던데.”

“벼락 부리는 건 마법사면 누구나 다 하는 건데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칼잡이는 이만큼 강해져야 겨우 그런 짓 할 수 있다는 거 생각하면 이만한 쓰레기 직업도 없어.”

“그거 엄청 노력해서 공중부양 할 수 있게 된 놈이 새는 원래부터 날 수 있는데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말하는 것만큼 어이없는 소리인데.”

“뭔 소리냐. 사람이 노력한다고 공중부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TV에 나오는 사기꾼 초능력자냐?”

미안한데 보통은 노력한다고 몸에서 전기가 뿜어져 나오지 않아. 한석구가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인데 잡담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차원문 열 테니까 갔다 와. 너 하는 거 보니 이번에도 금방 돌아올 것 같으니 차원문은 안 닫고 그냥 둘게.”

한석구가 주문을 외우자 곧 차원문이 생겨났다. 방금 막 전투를 마치고 온 참이지만 김창은 잠깐의 휴식도 없이 바로 차원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 저게 뭐지······?”

“갑자기 웬 문이?”

차원문을 통과하자마자 들려온 건 사람들의 당황한 목소리였다. 김창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잘 다듬어진 정원수와 길게 뻗은 흰색 회랑, 그리고 바쁘게 지나가다 발길을 멈춘 사람들을 보면 여긴 어느 저택 안인 듯했다.

김창은 갑자기 나타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못 본 거요. 목숨 아까우면 내가 말한 대로 해.”

저택의 사람 중에는 무기를 든 경비병도 있었는데 그에겐 저택에 침입한 무뢰한을 붙잡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경비병은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의무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들고 있는 창을 감히 침입자에게 휘두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이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떠올랐다.

“내 말 알아들었으면 대답해. 알겠나? 지금 당신들 눈에는 뭐가 보이지?”

하녀와 하인들은 김창의 살기에 짓눌려 입을 열지 못했으며 심약한 자들은 숨이 막히는지 컥컥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그나마 경비병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남자만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 수 있을 뿐이었다.

“아, 아무것도······.”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사람들을 지나쳐 회랑을 걸었다. 길고 긴 회랑을 지나는 동안에 몇몇 사람을 만났지만 그들 역시 김창을 붙잡지 못했다.

분명 모두가 침입자를 봤음에도 아무도 침입자를 보지 못했다. 그래야만 했다.

덕분에 김창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러 갈 수 있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것인지 방 주인이 반대쪽에서 문을 연 것이다.

김창은 가만히 문이 전부 열리길 기다렸고 곧 자신의 목적과 마주했다.

“······너?”

쾅! 멍청한 목소리는 둔탁한 타격음에 묻혔다. 김창은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주먹을 날려 방 주인의 얼굴을 뭉개버렸다.

“컥!”

“오랜만이다, 정우신.”

정우신, 원탁 랭킹 9위. 독 묻은 화살로 김용걸을 저격했던 놈.

“너희 집 오는데 빈손으로 오긴 그래서 죽빵이라도 가져왔는데 입에 맞나? 그럼 다행이고. 또 있으니까 사양 말고 먹어.”

보통 사람이었다면 첫 일격에 얼굴이 완전히 박살 났어야 할 테지만 정우신은 꼴에 랭커라고 코뼈가 부러지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는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손으로 부여잡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너, 너, 뭐야? 여긴 어떻게? 내가 듣기로······.”

“내가 지옥에 갇혀서 몇 년은 못 나온다고 하던가? 누가 알려줬는지 몰라도 참 입이 싼 놈이야. 여기저기 다 떠들고 다니는 걸 보면.”

“이, 이봐. 날 죽이면 김용걸은······.”

정우신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마 그대로 거리를 벌리고 벽에 걸린 활을 집어 공격하려는 셈이겠지.

상대의 수가 뻔히 보이는데 가만히 있는 건 바보짓이다. 김창은 빠르게 거리를 좁혔고 정우신의 멱살을 붙잡았다.

“김용걸은 뭐? 네가 죽으면 해독제 만들 놈이 없으니 걔도 죽는다고 협박하려는 거냐?”

“큭, 그래. 그러니까 일단 대화로······.”

쿵! 정우신의 몸이 붕 날았다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김창은 바닥을 부수고 그 안에 처박힌 정우신의 몸을 발로 힘껏 짓밟았다.

순간적으로 뱃속의 공기가 모두 토해져 나오고 새빨간 핏물이 목구멍에서 울컥 쏟아졌다. 정우신이 뭔가 말을 하려고 하기 전에 그 몸이 다시 공중을 날았다가 벽에 부딪쳤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던졌는지 정우신의 몸이 벽을 부수고 그 너머 방의 가구들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김창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서 정우신이 쓰러진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말했다.

“내 직업이 뭔지 아나?”

“케, 케윽······.”

“그래, 칼잡이야. 그런데 내가 왜 칼 안 쓰고 주먹으로 널 때렸는지 아나? 네가 죽을까 봐 그런 거야. 내가 이 정도로 널 배려해주고 있는데 넌 감히 김용걸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 해?”

“으으윽······.”

“명심해라, 정우신.”

김창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는 정우신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난 협상 같은 거 안 해. 만약 하더라도 할지 말지는 내가 정하는 거야.”

쾅! 김창이 정우신의 머리를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 걸 보면 광대뼈가 부러졌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도 몇 개나 부러졌을지 모른다.

김창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기절해버린 정우신의 머리를 붙잡은 채로 복도로 나섰다.

저택의 사람들은 제 주인이 머리채를 붙잡힌 채로 질질 끌려가는 걸 그저 지켜만 봐야 했다. 그 누구도 정우신을 위해 나서지 못했다.

복도 위에 길게 이어진 핏자국은 마치 살인 현장처럼 섬뜩했다. 그러나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런 짓을 했다간 자신의 목숨도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나 왔다.”

호엔으로 돌아온 김창은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정우신을 내던졌다. 그걸 본 한석구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게 뭐야?”

“정우신. 오다 주웠다.”

“아니, 사냥하고 자랑하려고 주인한테 시체 가져오는 고양이도 아니고 이걸 왜 가져 와?”

“얘 안 죽었어. 김용걸이 얘한테 화살 맞고 앓아누웠다며? 보니까 얘가 해독제 만들 수 있는 것 같은데 깨어나면 해독제 만들라고 해.”

“그게 정말이냐?”

한석구가 두 눈을 크게 뜬 걸 보면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하기야 김용걸의 상태에는 영 차도가 없고 이러다 영영 그를 잃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고 하니까 놀라는 것도 당연한······.

“네가 사람을 안 죽였다고? 이럴 수가! 네가 사람 안 죽이고 일 해결한 건 여기 와서 이번이 처음 아니야? 장하다, 김창!”

그쪽이었나? 김창이 어이없어하며 답했다.

“뭔 소리야? 해독제 만들고 나면 죽일 거야. 신성 먹어야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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