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44화 (143/200)

144

“원래 그거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아닌가? 협상할지 말지는 테러당한 쪽이 정하는 거지, 테러하는 쪽이 정하는 게 아니지 않나? 애초에 협상 안 할 거면 테러를 왜······.”

테러리스트가 테러를 하는 이유가 뭔가? 상대방이 들어줬으면 하는 요구가 있는데, 그걸 순순히 들어줄 것 같진 않으니까 내 말 들어달라고 칼이며 총 들고 협박하는 것 아닌가?

물론 금전적인 요구 말고 종교적 신념에 의해 테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고무신이 보기에 이 테러리스트는 그런 쪽의 인간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테러를 하는 테러리스트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미치광이 살인마?

고무신이 어이없어하는 동안에 김창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날 모르는 모양이군. 장난도 이쯤 했으면 알아차릴 법도 한데.”

“···무슨 소리냐?”

“아까 협상 안 할 거면 테러는 왜 하냐고 물었지? 사실 목적이 있긴 해. 그런데 그게 네가 들어줄 수 없는 것이라 요구하지 않을 뿐이야.”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요구? 그게 뭐냐?”

김창이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목숨. 난 한석구가 보내서 온 거다. 이만하면 상황이 이해가 가나?”

그 말에 줄곧 멍청하게 있던 고무신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가 등에 메고 있던 전투 도끼를 빠르게 손에 쥐었다. 그 움직임은 확실히 숙련된 전사의 것이었다.

“넌 누구냐!”

“김창. 서로 얼굴 보는 건 처음이라도 이름 정돈 들어봤겠지.”

김창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고무신이 얼굴을 찡그렸다.

“네가 김창이라고? 내가 듣기로 넌 지옥에 떨어져서 몇 년은 못 나온다고 하던데. 그런데 뭔 수로······.”

“내가 지옥에 떨어진 건 누가 말해줬냐. 한석구가 굳이 너희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네가 물으면 내가 대답해야 하나?”

고무신이 자세를 낮추며 왼쪽 어깨를 정면을 향해 비스듬히 내밀었다. 당장이라도 돌격할 듯한 모습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나 김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대답해야 할걸. 나중엔 할 기회도 없을 테니까.”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군. 난 옛날부터 네 실력이 궁금했다. 어쩌다 한석구를 만나면 늘 네 이야기를 했거든. 그 녀석 말로는 네가 원탁 제일의 고수라던가? 물론 네가 정복자와 서하연을 이겼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 원탁 제일을 논하기엔 부족하지. 그 두 명은 나보다 아랫급이니까 말이야.”

김창은 고무신을 가만히 쳐다봤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억센 손아귀와 두꺼운 허벅지를 가진 그는 누가 봐도 용맹한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단순히 커스터마이징으로 만들어진 껍데기 같은 게 아니다. 고무신의 억센 손은 사람의 목 정도는 간단히 부러트릴 수 있을 것이고 두꺼운 허벅지는 인간을 초월한 근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무신의 몸에는 수많은 흉터가 그려져 있었는데 저것 모두는 수많은 전투를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새겨진 훈장이었다.

원탁의 사람 중 대다수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고무신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김창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저 남자는 강하다. 만약 고무신 혼자만 이 세상에 떨어졌다면 대영웅 소리를 듣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떨어진 그 혼자만이 아니다.

“이 새낀 정복자랑 개눈깔이 좆으로 보이나.”

“···뭐?”

“정복자랑 개눈깔이 좆으로 보이냐고. 네 눈엔 내가 좆밥으로 보이니까 나한테 진 정복자랑 개눈깔도 좆밥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난 너 같은 애들 보면 참 애잔해.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알거든.”

“뭔 개소리냐! 정복자가 나보다 랭킹이 위일지는 몰라도 실력은 한참 아래다. 걘 게임 할 때도 나한테 PVP로 이긴 적이 없어! 그런데 지금은 이긴다고? 정말 그랬으면 이 전투도 정복자의 승리로 끝났겠지!”

“정복자가 철퇴 들고 네 머리통 깨러 안 온 건 그냥 너희 쪽 병력이 많아서 그런 것뿐이야. 전쟁이라는 게 대장끼리 한 번 붙고 끝내는 거였으면 진작 끝냈을걸. 그리고 개눈깔? 걔가 얼마나 강한지 궁금하면 곧 알게 해주지.”

고무신이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서하연은 너한테 죽었다고 하던데? 이미 죽은 사람 실력을 뭔 수로 확인하지? 애초에 너 따위한테 죽은 놈인데 굳이 실력을 확인해야 하나?”

이 새낀 내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건가? 서하연이 죽은 걸 알고 있는 걸 보면 정보 습득이 빠른 것 같긴 한데, 영 영양가 없는 정보만 알고 있는 걸 보면 좀 멍청한 것 같기도 하다.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시간 아깝고. 내 직접 알게 해주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고무신이 뛰었고 김창이 칼을 휘둘렀다.

“뒈―져!”

쾅!

칼과 전투 도끼가 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원래 날카로운 금속끼리 부딪치면 쨍한 소리가 울려야 하지만 지금 건 둔탁한 타격음일 뿐이었다.

고무신의 근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탓에 공격을 받아낸 김창의 발이 땅속으로 약간 꺼졌다.

대부분 게임이 으레 그러하듯 근접 전투 직업군은 힘 능력치에 보너스를 받는데 그중에서 전사는 가장 많은 수치의 보너스를 받았다.

고무신은 게임 속에서 가장 강한 전사 캐릭터였고 당연히 그 근력은 초월적인 수준이었다. 만약 여기 있는 게 김창이 아니라 일반 병사였다면 첫 공격을 받아내는 순간 손목부터 어깨까지 전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어쭈, 막아? 그럼 이것도 막아봐라!”

고무신이 더욱 속도를 올려 전투 도끼를 휘둘렀다. 빠른 속도는 강한 근력에서 나오는 법이기에 고무신은 거대한 덩치를 가졌음에도 마치 사슴처럼 날렵했다.

그가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연달아 울리는 쾅쾅 소리는 마치 천둥 같아서 싸움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모두 귀를 막아야만 했다.

그러고도 귓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소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고무신의 괴력이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이다.

“막기만 할 거냐? 이게 네 진짜 실력이야? 고작 이 정도로 내게 깝죽거렸던 거냐!”

고무신이 전투 도끼를 크게 휘둘러 김창을 공격했다. 순간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칼이 크게 들렸고 김창의 가슴이 훤히 열렸다. 고무신은 그 틈을 노려 발차기를 날렸고 김창은 가슴을 방어할 새도 없이 뒤로 빠르게 날아갔다.

쿵! 뒤쪽으로 날아간 김창이 막사 몇 개를 부수고 결국엔 바닥에 처박혔다.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먼지구름이 일시적으로 시야를 가렸고 고무신은 그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손에 든 전투 도끼에서 붉은빛이 반짝였다. 이미 날카롭게 벼려진 도끼날을 더욱 위협적으로 만드는 그것은 뛰어난 전사의 상징인 오러였다.

고무신은 이 싸움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정복자와의 싸움이 너무 길어져서 짜증이 나던 차였다.

정복자만 쓰러트리면 금방 끝날 것 같은데 그는 바퀴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성기사답게 끈질기게 버텼고 결국엔 지금까지 싸움을 끌어오고 있다.

이건 고무신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랭커들에게도 그리 기꺼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원탁을 해치우고 나면 왕까지 몰아내고 왕국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영 요원한 일이다.

“그러니까 상대를 잘 봐가면서 덤볐어야지, 김창. 고작 정복자랑 서하연을 이긴 것 가지고 너무 나댔······.”

파지직!

창백한 빛이 번쩍이고 먼지구름이 일시에 걷혔다. 눈으로 감히 쫓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일격이 공기를 찢으며 질주했고 고무신의 눈이 한 박자 느리게 깜빡였다.

인식은 결과보다 느렸고 먼저 일어난 결과의 뒤를 인식이 부지런히 쫓아왔다.

반짝이는 직선과 잘려 나간 어깨,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차츰 빛을 잃어가는 전투 도끼, 휘몰아치는 격통,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온 인식.

“···어?”

툭.

시간이 느려졌다가 갑자기 빨라진 것처럼 길게 늘어졌던 인식이 재빠르게 결과를 붙잡았다.

고무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를 쳐다봤다. 없었다. 거기 달려 있어야 할 게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주 깔끔하게 어깨가 잘려있었다. 어쩌면 지금 빨리 어깨를 주워서 붙이면 다시 착 달라붙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재롱 잘 봤다. 네가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좀 더 봐주려고 했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너 말고도 목 따야 할 놈들이 좀 있어서.”

고무신의 시선이 김창에게 고정됐다. 거기 있는 건 벼락이었다. 아니, 반신이었다.

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왜······.”

“왜 처음부터 이 모습으로 안 싸웠냐고?”

벼락의 화신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살아있는 벼락이 무력한 인간을 향해 고했다.

“그래야 네가 더 절망스러울 테니까. 원래 게임에서도 내가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역전당하는 것만큼 좆 같은 게 없거든? 지금 네 기분이 그럴 거야.”

“고작 그딴 이유로······.”

고무신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건 본능적인 행위였다. 뜨거운 걸 만지면 손을 떼는 것처럼, 날카로운 것에 베이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육체가 보여주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김창은 뒤로 물러나는 고무신을 굳이 쫓지 않았다. 그의 칼은 이미 벼락 그 자체로 변해 있어 거리를 무시하고 참격을 날릴 수 있었다.

또한 그 속도는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만큼 빨라서 고무신 따위가 감히 반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김창은 아주 느긋하게 고무신을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을 뒤로 물러나던 고무신은 발치에 부딪힌 무언가를 보고서 제자리에 멈췄다.

그건 아까 날아갔던 자기 어깨였다. 손은 여전히 전투 도끼를 꽉 쥐고 있었는데 그걸 보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내가 도망치고 있다고? 전사 중의 전사인 이 내가? 고무신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전투 도끼를 향해 뻗었다.

머리는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몸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내가 뭘 하는 거지? 전사답게 죽으려는 건가? 정신 차려라. 나는 진짜 전사가 아니야. 그냥 게임 속에서 전사 캐릭터를 열심히 키웠던 백수일 뿐인데······.

“김―창!”

고무신이 왼손으로 전투 도끼를 힘껏 던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김창과 반대쪽으로 달렸다.

지독한 수치심이 몰아쳤지만 머리는 의식적으로 그 모든 감정을 차단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놈이 강한······.

“아까 말했지. 개눈깔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해주겠다고.”

고무신의 등 뒤에서 피가 솟구쳤다.

“지옥 가서 개눈깔한테 안부 전해줘라. 걔가 이제 지옥 대빵이니까 가서 내 이야기하면 섭섭지 않게 대우해줄 거다.”

“그게 뭔 소리······.”

“내가 말을 어렵게 했나? 아까 한 말 그대로야. 개눈깔이 죽어서 지옥 갔는데, 거기서 대빵 자리 먹었어. 그러니까 가서 잘 봐달라고 하면 잘 봐줄 거라고. 어쩌면 부하로 부려 먹을 수도 있는데 가서 괜히 깝치진 마라. 너 이젠 개눈깔한테 안 돼.”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뿐이었지만 그래도 고무신은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등이 완전히 갈라져 바닥에 쓰러진 그가 울컥 피를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씨발······. 한석구 씹새끼······. 이 정도로 강한 괴물인 걸 미리 말해줬으면······ 배신, 안 했을 텐데······.”

후회는 항상 늦다. 그리고 매번 의미가 없고.

김창은 내면에서 넘실거리는 신성을 느끼며 호엔 쪽으로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