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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망겜이라 그런지 정상인 놈이 하나 없어. 게임에서 딜러 아닌 캐릭터로 딜 가는 놈들 몇 명 보긴 했는데 너처럼 힐도 안 찍은 놈은 처음이다.”
김창이 쯧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게임을 하던 시절엔 별 이상한 방식으로 캐릭터를 키우던 놈들이 좀 있었는데 대개 만렙에 도달하기 전에 캐릭터를 삭제하는 일이 빈번했다.
각 직업에는 고유한 역할이 정해져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캐릭터를 키웠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캐릭터를 키울 수 있었다면 애초에 직업을 구분하고 역할을 나눌 필요조차 없을 터다.
“그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제가 옛날부터 힙스터 기질이 있어서 남들 다 하는 대로 하긴 싫더군요.”
김여래가 후훗 웃더니 곧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런데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당신은 김창인 것 같은데, 맞나요?”
“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내가 김창이겠지.”
“흠, 내가 듣기로는······.”
“네가 듣기로는 뭐? 내가 지옥에 갇혀서 몇 년 동안 못 나오고 어쩌고저쩌고 그거? 그 이야기라면 오늘 벌써 세 번째니까 그만해라. 똑같은 이야기 자꾸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말허리를 잘린 김여래가 미간을 찡그렸다.
“같은 이야기를 세 번째 하는 중이라면······ 아무래도 고무신과 정우신을 쓰러트린 모양이군요.”
“고무신은 뒈졌고 정우신은 해독제 만들고 나면 죽을 거다. 그리고 너도 뒈질 건데 너무 걱정은 하지 마라. 한석구 말대로라면 넌 지옥에 떨어질 텐데, 거기 가면 동향 사람 있어서 잘해줄 거야.”
“그게 누구······.”
“그게 누구냐면.”
김창이 뭔가 비밀을 말하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바투 내밀자 김여래도 반사적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건 크나큰 실수였다. 김창이 몸을 기울이는 순간 그의 허리춤에서 칼이 뽑혀 나왔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는지 김여래는 칼이 뽑혔다는 걸 눈으로 보고 안 게 아니라 팔뚝을 베이고 나서 알았다.
오러가 맺힌 칼날은 신성력으로 강화된 김여래의 단단한 근육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렸다. 팔뚝의 살점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고 그 아래의 흰 뼈가 드러났다가 상처 위로 붉은 피가 한 움큼 맺혔다.
김여래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다음 공격이 날아왔다. 김창은 요도를 위로 던져 스스로 날게 하고 손에 쥐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강력하고 재빠른 공격이 김여래의 목을 향해 날아갔고 피가 확 튀는 동시에 살덩어리가 하늘을 날았다.
“큭!”
김여래가 신음을 흘리는 것은 아직 그의 머리가 몸에 붙어있는 덕분이었다. 김창이 목을 노리고 날렸던 공격은 김여래의 왼쪽 손목에 의해 막혔다.
물론 막았다고 해서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김여래의 손목은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듯 덜렁거렸고 상처에서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제대로 된 싸움을 하기도 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터라 김여래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 비겁한······!”
“왜 막는 거냐?”
김창의 질문에 김여래가 어이없다는 듯 바로 대꾸했다.
“왜 막아? 안 막으면 죽잖아.”
“그럼 까짓거 한 번 죽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빨리 너 죽이고 돌아가야 하오성 살릴 수 있는데 한 번만 그냥 죽어줘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김여래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작스레 돌진했다. 왼쪽과 달리 아직 멀쩡한 오른손에서 강렬한 빛이 반짝이더니 손날을 세워 휘두르자 칼날이 되어 날아왔다.
공격은 위협적이었지만 김창에게 도달하진 않았다. 하늘을 날던 칼이 재빠르게 날아와 빛의 칼날을 쳐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의 위력이 상당히 강했는지 빛의 칼날을 쳐낸 칼이 휘청거리는 게 보였다. 저건 사제가 쓰는 신성 마법 중 하나인데 그 위력은 별로 대단치 않던 걸로 기억했다.
그런데 기억과는 다르게 김여래의 공격은 아주 위협적이었다. 아무래도 치유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대신에 공격 마법에 모든 걸 투자한 덕분인 듯했다.
“죽어라!”
빛의 칼날을 날리며 빠르게 거리를 좁히던 김여래가 흡 소리와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그냥 주먹질이라고 하기엔 영 심상치 않아서 김창은 빠르게 칼을 들었다.
칼날로 주먹을 쳐내려는데 마치 망치와 부딪친 것처럼 강력한 충격이 손목에 전해졌다. 반신의 육체를 가졌음에도 손목이 약간 저린 걸 보면 저걸 제대로 맞았다간 뼈 몇 개 부러지는 걸론 안 끝날 듯했다.
맞기 전에 다 죽이면 힐도 필요 없다더니 그 말이 영 허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이런 위력을 낼 수 있다면 팀원이 다치기 전에 다 죽여버릴 수 있을 테니까.
딜러가 아닌 캐릭터를 딜러로 키우려고 했던 사람들이 죄 만렙도 찍기 전에 캐릭터를 삭제했는데 김여래는 꾸역꾸역 만렙을 달성하고 랭커가 됐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다.
“사제 가지고 헛짓거리할 시간에 다른 캐릭터 키웠으면 대성했겠는데.”
김창이 혼자 중얼거리더니 빠르게 칼을 휘둘러 김여래를 몰아냈다. 기세를 잡아 김창을 압도하려고 했던 김여래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고 다음에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김창은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아깐 시간이 없다고 한 주제에 이젠 왜 가만히 있지? 이게 혹시 자신을 꾀기 위한 함정은 아닐까 고민하던 김여래는 그게 자신의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너희 같은 놈들한테 쓰긴 아까운 기술이긴 한데, 시간 질질 끌면 하오성 이 새끼 진짜 죽을 수도 있어서 바로 끝내야겠다.”
벼락이 쳤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하늘에서 벼락이 치더니 김창의 몸이 창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김여래는 그걸 보고서 순간 신을 떠올렸다. 그 왜 북유럽의 오로라를 한 번 보면 고대의 사람들이 왜 신을 믿었는지 알 수 있을 거라던가?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오로라를 보고서 북유럽의 사람들이 신을 떠올렸던 것처럼 김여래 역시 벼락을 보고서 신을 떠올렸다.
“이건······.”
이길 수 없다. 머리가 알고 몸이 안다. 그럼에도 김여래는 도망칠 수 없었다. 도망쳐도 죽음, 싸워도 죽음이라면 차라리······.
“신성한 불꽃이여······.”
김여래가 나직이 주문을 외우자 그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잘렸던 살점이 다시 자라나 상처를 메웠고 떨어질 듯 덜렁거렸던 왼손이 다시 손목에 착 달라붙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등 뒤로 거대한 원이 생겨났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기하학적 기호가 원을 따라 회전했고 김여래는 두 손을 맞댔다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누가 보아도 저게 김여래가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있던 한 수임이 분명했다. 김창은 저게 무슨 기술인지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거 신성화 아닌가? 사제의 궁극기쯤 되는데 일시적으로 신성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대신에 지속 시간이 끝나면 반드시 사망하는 기술. 애초에 힐러인 사제가 딜할 일은 없는 데다가 쓰고 나면 죽는다는 패널티가 너무 커서 아무도 안 배우는 걸로 아는데.”
“잘 알고 있군요. 확실히 신성화는 강력한 기술이지만 패널티가 어마어마해서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넌 배웠군?”
“힐 안 배우니까 스킬 포인트가 많이 남아서 배웠죠. 게임에선 몇 번 써보긴 했는데 여기서 써보는 건 처음입니다.”
당연히 처음이겠지. 쓰면 죽는데.
김창이 픽 웃으며 말했다.
“시간 없긴 한데, 그래도 목숨 걸고 부리는 재롱 봐줄 시간 정돈 있지. 재롱 한 번 떨어봐.”
김여래는 김창이 벼락의 화신으로 변한 순간부터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신성화를 통해 목숨을 담보로 막대한 신성력을 얻었지만 그래도 도무지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그는 김창의 도발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강자가 약자를 조롱하는 건 당연한 권리가 아닌가?
약자는 그저 발버둥 칠 뿐이다. 자신의 발악이 강자의 몸에 자그마한 상처라도 남기길 바라면서.
“그럼 갑니다!”
김여래가 뛰었다. 아니, 그건 뛰었다기보다는 날았다고 봐야 할 정도로 위협적인 돌격이었다.
온몸에 터질 듯 넘실거리는 신성력을 두른 김여래의 주먹은 빛으로 휘감겨 철퇴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크게 휘두른 빛의 철퇴가 김창의 몸을 강하게 짓눌렀다.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연달아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신성화를 통해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이 향상된 김여래의 공격은 사람의 눈으로 감히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주변 병사들의 눈에는 그저 강렬한 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시간은 얼마나 남았냐.”
지금의 김여래는 혼자서 대악마도 죽일 수 있다. 그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상대는 대악마조차 손쉽게 썰어버릴 수 있는 반신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신성력을 가졌다고 해도, 진짜배기 신성을 가진 반신을 상대론 그 어떤 행위도 아이들 재롱에 불과하다.
신의 힘을 빌려온 존재와 진짜 신의 힘을 휘두르는 존재.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힘을 가진 것 같아도 그 격차는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당신이 죽을 시간 말인가요?”
김여래가 헉헉 소리를 내면서도 씩 웃었다. 김창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변신이 풀리는 시간.”
“그건 왜······.”
“변신 상태일 때 죽여야 신성을 더 많이 줄 테니까. 꼴 보아하니 금방 풀리겠군. 재롱 잘 봤다. 이제 끝내자.”
김창이 칼을 움직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을 뿐인데 김여래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목 위로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김창은 공격도 하지 않고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기만 했는데도 압박감에 몸이 떨렸는데 이젠 저쪽에서 공격을 한다면?
“난······.”
김여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칼날이 날아온다. 아니, 죽음이 날아온다.
“난 죽기 싫······!”
벼락은 말보다 빠르다. 김여래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가 떨어지고 목소리는 흩어졌다. 은색으로 반짝이던 신성력이 사라지고 김여래의 몸은 바닥으로 쓰러져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다. 김여래 역시 그랬다.
“야, 하오성. 살아 있냐.”
대답은 없었다. 김창은 설마 얘도 죽었나 하고 맥박을 확인하는데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보니 오래 끌고 있을 수는 없었다. 김창은 기절한 하오성의 몸을 어깨 위에 들쳐 맸고 그대로 전장을 나와 원탁으로 돌아가려 했다.
한창 싸우고 있던 병사들은 김여래가 죽은 걸 보고 당황해서 싸움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창이 그들을 향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뭘 쳐다봐. 다 끝났으니까 다들 집으로 돌아가.”
저 무시무시한 괴물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말에 모두가 안도했다. 병사들은 김창이 지나갈 수 있도록 바로 길을 비켰고 김창이 그 사이로 유유히 지나갔다.
“하오성, 조금만 버텨라. 이제 원탁으로 돌아가니까······.”
김창이 차원문을 통과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날갯짓 소리가 나더니 뭔가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이건······.”
박쥐 날개가 달린 눈알. 어디서 많이 본 생물이었는데 거기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 김창? 물론 너한텐 며칠만이겠지만 나한테는 1년만인지라 아주 반갑군.”
저런 괴상한 하수인을 부리는 존재는 이 세상에 딱 하나뿐이다. 김창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만네르헤임, 나 피해서 도망쳤으면 잘 숨어나 있을 것이지 뭔 자신감으로 말을 거는 거냐?”
“지옥에서 있었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나? 거기 가만 있었으면 네가 날 죽이려 들었을 텐데.”
“여기로 도망쳤다고 못 죽일 것 같나? 곧 죽이러 갈 테니까 목 씻고 기다려.”
“날 죽이러 오겠다니 너무 고맙군. 내가 너한테 전령을 보낸 건 사실 그것 때문이거든.”
“널 죽여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려는 거냐?”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닌데, 부탁이 있긴 해.”
이 새끼는 뭔 염치로 저런 소리를 하지? 김창이 어이없어 하며 물었다.
“뭔 부탁?”
“이런 말은 좀 부끄러운데, 큼.”
만네르헤임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나 납치당했다. 구해줘.”
아니, 지상으로 도망쳤으면 잘 숨어 있기나 하지 이게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