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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김창이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작은 웃음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웃음이 커져 나중엔 어깨까지 흔들며 웃을 정도가 됐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웃음은 시작이 그랬듯 갑작스럽게 그쳤다. 한참을 시원하게 웃던 김창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인정하지, 만네르헤임.”
“뭘?”
짝짝. 김창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가 하늘을 나는 눈알 괴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나한테 깝죽거리고 살아남은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넌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내 신경을 긁어왔지. 그러고도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넌 확실히 대단한 놈이야.”
“그거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이건 비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만네르헤임, 넌 대단한 놈이다. 이만큼이나 날 엿 먹였으면서 꾸역꾸역 살아남아 또 깝죽거리는 그 모습은 적이지만 감탄스러울 지경이야.”
“뭘,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어.”
만네르헤임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겸손을 떨었지만 그건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김창은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것들을 죽이고 다녔다.
전장에서 만난 용병부터 시작해서 무려 천 년을 넘게 살아온 반신까지, 김창은 지상에서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전부 죽여본 셈이었다.
그런 그가 아직까지 죽이지 못한 것은 단 하나, 지옥의 대악마 만네르헤임뿐이다.
심지어 만네르헤임은 그냥 도망만 잘 치는 게 아니라 김창을 엿 먹이기까지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살아남아 뻔뻔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니 이젠 감탄을 넘어 존경심이 들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김창이 인정하는 적수는 반신 요안니스 하나뿐이었는데 이젠 하나가 더 늘어서 둘이 됐다.
어쩌면 이 녀석은 내가 신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게 아닐까? 김창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하나만 묻자, 만네르헤임. 또 날 엿 먹이려고 꾀를 부리는 거냐, 아니면 정말로 납치를 당한 거냐?”
“내가 널 지옥에 가두고 도망쳤던 것처럼 이번에도 널 속이려 드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되는 모양이지? 그건 확실히 내 잘못이었다. 고작 그런 것으로는 널 오래 붙들어 둘 수 없는데 말이야.”
“내가 묻는 것에 대답이나 해.”
“그러지. 내가 사실대로 말한다고 네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정말로 납치를 당했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래.”
만네르헤임은 대악마다. 지상에 올라오는 것만으로 세상의 위협이 되는 강대한 존재.
그런 그가 누군가에 의해 죽은 것도 아니고 납치를 당했다는 건 선뜻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납치를 당한 척하고 김창을 불러내 함정에 빠트리려는 거라면 믿을 수 있겠지만······.
“네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제쳐두고서, 네가 납치를 당했다고 하면 내가 구해줘야 하나?”
“구해줘야 할걸.”
“왜?”
“그거야 넌 신성이 필요할 테니까. 날 안 죽이면? 그럼 어디서 신성을 얻나? 설마 같은 원탁 사람들을 죄 죽여서 신성을 강탈할 것도 아니고.”
이 새낀 왜 이렇게 뻔뻔하지? 김창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 소리를 낸 뒤에 말했다.
“나보고 구해달라고 하는 걸 보니 납치범이 널 죽이려 하는 모양이지? 그런데 넌 내가 구해줘도 내 손에 죽는다. 이러나저러나 죽는데 뭔 생각으로 나한테 구해달라는 거냐?”
“네가 날 안 구해주면 난 여기서 확실하게 죽는다. 하지만 네가 날 구해주면? 그땐 또 뭔가 수가 생기지 않겠나?”
하여튼 바퀴벌레 같은 새끼. 그 와중에도 뻔뻔하게 내 뒤통수를 치고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다 못해 웃겨서 헛웃음이 나왔다.
김창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널 납치한 놈이 누구냐. 너 정도 되는 놈을 죽인 것도 아니고 산 채로 납치한 걸 보면 보통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날 구해주려고? 잘 생각했다. 지금 날 구하러 와야 다른 놈이 날 죽이기 전에 죽일 수 있을 터다. 이건 다시 없을 기회야.”
장사하냐?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자 만네르헤임이 말했다.
“인간 세상에선 인간이 악마보다 더 하다는 말이 있던데 그 말이 딱 맞아. 설마 대악마가 인간한테 납치를 당하리라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이러다간 지옥도 인간한테 빼앗기는 게 아닐까 무서울 지경이야.”
그 지옥도 벌써 인간 출신인 개눈깔이 먹었는데. 심지어 한석구는 개눈깔을 이용해서 지옥에 진출하려고 하고 있지 않던가?
만네르헤임의 말대로 인간이 악마보다 더 하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김창이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만네르헤임이 말을 이었다.
“난 지상에 올라온 이후에 곧장 왕과 접촉했다. 그를 움직여 원탁이 반으로 쪼개져 서로 반목하게 했지.”
역시나 왕을 꼬드겼던 건 만네르헤임이었던 모양이다. 김창이 가만히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까진 성공적이었다. 난 원탁이 자멸하길 기대했고 그때가 올 때까지 어딘가에 조용히 숨어 있으려 했다. 왜 그랬냐면 이 세상엔 날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가령 승천할 자라던가.”
확실히 승천할 자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대악마를 죽일 수 있다. 게다가 승천할 자는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신성이 필요한데 대악마를 죽이면 많은 양의 신성을 얻을 수 있으니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내 목적은 이랬다. 원탁이 자멸하고 승천할 자들끼리 서로 싸워 마지막 승자가 승천하여 지상을 떠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때가 되면 날 막을 자가 없으니 비로소 내 세상이 오는 것이지.”
만네르헤임은 끈질긴 기다림을 통해 자신이 날뛸 수 있는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노림수는 완벽했으나 생각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아까 내가 말했었지? 인간이 악마보다 더 하다고. 난 그 말을 여실히 통감하는 중이다.”
“널 납치한 게 인간이냐?”
“그래. 그것도 내가 아는 인간이지.”
설마 승천할 자가 만네르헤임을 납치한 것일까? 김창이 알기로 이제 남은 승천할 자는 자신을 제외하고 셋뿐인데 범인이 누구든 만네르헤임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승천할 자라면 대악마를 죽이면 죽였지, 굳이 납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신성을 얻으려면 대악마를 죽여야 한다. 아무리 압도적으로 이겼든 죽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승천할 자가 대악마를 애완동물로 키우려는 게 아닌 이상 굳이 살려둘 이유가 있나?
김창이 혼자 생각하는 사이에 만네르헤임이 말했다.
“그리고 너도 아는 인간이야.”
“내가 안다고? 그럼 승천할 자는 아닌 모양이지.”
김창은 나머지 승천할 자 세 명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니 그들은 범인이 아닌 셈이다.
“승천할 자한테 붙잡혔으면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그런데 고작 인간 따위에게 붙잡혔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야.”
“그래서 그게 누군데.”
만네르헤임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왕.”
“누구?”
“왕 말이다, 왕. 이 나라의 왕. 너도 만나본 적 있잖아.”
왕이라면 그때 만났던 그 왕? 아니, 그 양반이 대체 뭔 재주가 있어서 대악마를 붙잡았단 말인가?
대악마 정도의 강함이면 나라 하나 정도는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지 않나? 그런데 만네르헤임이 왕한테 붙잡혔다고?
“또 나 엿 먹이려고 머리 굴리는 거냐?”
“넌 지옥에 가두고 와도 기어이 지상으로 기어 올라오는 놈인데 내가 머리 좀 굴린 걸로 널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나.”
“그럼 왕이 정말로 널 납치했다고?”
“참으로 부끄러운 말이지만, 난 그때 몹시 방심했다. 난 내가 왕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왕은 날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날 납치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마법사들을 시켜 날 무력화할 방법을 찾아냈다.”
“넌 방심하고 있다가 거기에 당한 거고?”
“그래.”
“그것참 어이없는 소리군. 그런데 왕이 널 납치해서 뭘 하는데? 널 죽이고 새롭게 승천할 자가 되려는 거면 몰라도 굳이 납치만 한 걸 보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누구나 그럴듯한 생각이 있는 법이지. 물론 그 그럴듯한 생각이라는 건 널 만나면 다 어그러지는 법이지만 어쨌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왕한테도 그럴듯한 생각이라는 게 있었던 게야. 왕은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원탁끼리 싸웠는데 어느 한쪽이 살아남는다면? 그럼 그땐 살아남은 놈들을 뭔 수로 상대하나?”
“설마 너보고 남은 놈들을 처리하라고 시키진 않았을 것 같은데.”
“물론 아니지. 그런 일을 시킨다고 내가 할 리도 없고.”
“그럼?”
만네르헤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왕에겐 군대가 필요했다. 지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며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군대가.”
“뭐 그거야 어떤 왕이든 다 필요로 하는 거지.”
“요정왕의 군대는 강력하지. 요정 자체가 인간보다 월등히 강하니 말이야. 게다가 그들은 정신적으로 인간보다 성숙해 있어서 웬만해선 배신도 하지 않아. 그러니 요정으로 그만한 군대를 만드는 건 쉽지만 인간으로 그러는 건 어려운 일이야.”
“그래서? 설마 요정을 납치해와서 군대를 만든 건 아닐 거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요정이 인간의 왕에게 충성할 리도 없으니까 말이다. 왕이 원했던 건 인간 병사를 요정 못지않게 강한 존재로 만드는 것뿐이었어. 겸사겸사 세뇌를 통해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게도 만들고.”
그래서 그게 대악마를 납치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김창이 눈썹을 까딱거리자 만네르헤임이 말했다.
“인간이 악마와 계약하는 이유가 뭔지 아나? 자기 영혼을 바치는 대신에 악마에게 힘을 받아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강한 악마와 계약하면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럼 만약 대악마와 계약하면? 칼 잡아 본 적도 없는 인간이 요정 전사만큼 강해지는 것도 무리인 일은 아니지.”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 김창은 대략적인 상황에 대한 윤곽이 잡혔다. 그러니까 지금 만네르헤임의 말대로라면······.
“잠깐만, 너 설마 왕한테 붙잡힌 이유가······.”
만네르헤임이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왕은 날 납치해서 강제로 병사들과 계약을 맺게 만들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병사들의 힘은 내가 나누어준 힘. 병사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난 점점 더 약해지는 법이야. 이대로라면 모든 힘을 다 빨리고 죽게 될지도 몰라. 아아, 그런 죽음만은 피하고 싶은데. 지금의 나는 대악마가 아니라 그냥 하루 종일 병사 만드는 기계일 뿐이야······.”
인간이 악마보다 더 하다는 말이 정말 맞군.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이면 만네르헤임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김창은 만네르헤임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끼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넌 왕의 군대한테 힘을 빨리는 중이라는 거냐?”
“그래. 그것도 아주 많이.”
“그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군.”
김창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도덕이 있지, 감히 남이 먼저 점 찍은 물건에 손을 대? 왕, 이 새낀 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