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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그런 결론이 나오나. 김창이 한석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왕이 되겠다는 거냐?”
“내가? 아니. 나는 권력이라는 건 고이면 썩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겨. 그러니 내가 왕이 될 수는 없지. 애초에 난 왕 노릇할 깜냥도 안 되고.”
한 사람이 권력을 모두 가지게 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건 분명 옳은 말이다. 그럼 왕을 몰아내고 나선 누가 이 나라를 이끈단 말인가?
“그러면 설마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라도 하겠다는 거냐? 내 알기로 판타지 세상에선 민주주의가 절대로 가능할 수 없을 텐데. 오러 쓰는 기사랑 밭 가는 농부의 표가 같을 수 없을 테고 불꽃 날리는 마법사와 물고기 잡는 어부의 표가 같을 수 없을 테니까.”
이곳에선 개인의 가치가 동등하지 않으며 또한 아주 오랫동안 신분제가 이어져 왔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민주주의가 어쩌고 하더라도 격렬한 반발만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한석구 정도 되는 인물이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설마 중학생 때 읽었던 라노벨에 너무 감명을 받아서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려는 걸까? 아무리.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민주주의 같은 걸 할 생각 없어. 내가 남 무시하는 건 아닌데 여기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글도 모르는 까막눈이야.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빠. 그런 사람들한테 투표권을 주고 나랏일에 참여할 권리를 주자고? 그건 오히려 다수에 의한 폭력이고 폭거야.”
“그럼?”
“난 정치는 머리 깨인 놈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엘리트주의라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맞아.”
“아까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돼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권력은 한 사람에게 집중돼선 안 돼. 그럼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지. 잘난 사람이 정치하되 그 잘난 사람이 여러 명이면 돼. 그러니까 과두정을 하자는 거지.”
한석구가 뭘 말하려는 건지는 알겠다. 자기 혼자서 나라를 이끄는 게 아니라 원탁의 랭커들과 힘을 합쳐 국정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소리다.
김창은 그 말을 듣고서 가만히 웃었다.
“한석구.”
“왜? 너도 자리 하나 달라고 부른 건 아닐 테고.”
“그냥 네가 왕 해. 다른 애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갑작스러운 말에 한석구가 눈을 끔뻑였다. 잠시 뒤에 그가 말했다.
“난······.”
“정복자는 솔직히 왕 노릇에 관심 없을 테고, 산자이나 하오성은 그럴 깜냥이 안 돼. 걔넨 솔직히 귀찮은 역할 떠맡는 것보다는 자기네 영지에서 놀고먹는 걸 더 좋아할걸. 그리고······.”
“그리고?”
김창이 한석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서 말했다.
“이왕이면 일 잘하는 깡패가 왕 해야지. 넌 내가 아는 깡패 중에서 일을 제일 잘해.”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비꼼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한석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가운데 김창이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싸우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왕도 근처에 차원문 열어줘. 날 새기 전에 끝내고 올 테니까.”
그 말에 한석구가 정신을 차리고 으응 소리를 냈다. 그가 차원문을 열자 김창이 그 안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김창!”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만 돌려 뒤를 보니 한석구가 다시 외쳤다.
“너도 내가 아는 깡패 중에서 제일 좋은 놈이야, 인마!”
이거야말로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르겠다. 김창이 픽 웃더니 손을 흔들고서 차원문을 통과했다.
풍경이 변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원탁에서 드넓게 펼쳐진 평야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한 나라의 수도답게 거대한 크기를 가진 성벽은 대지 위에 우뚝 서서 침입자를 내려보고 있었다.
“얼른 끝내고 돌아갈까.”
마치 은행에 간단한 업무를 보러 온 것처럼 김창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벽을 향해 걸었다.
원래부터 거대했던 성벽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거대해졌다. 만약 이곳을 침략하러 온 침략군이었다면 그 위세에 눌려 주눅이 들었을 테지만 김창은 아니었다.
그는 성벽 위의 병사가 보일 때까지 충분히 걸어간 후에 성문을 쳐다봤다. 보통 때라면 행인들의 출입을 위해 열려 있을 성문이 굳게 닫힌 게 보였다.
전쟁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어쨌거나 전시인 건 맞았으므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성문을 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통행인도 없는 걸 보면 통행 자체를 통제 중인 듯했다. 김창은 칼을 들고서 천천히 성문을 향해 다가갔다.
“누구냐! 성문에서 물러나라!”
성벽 위의 병사들은 장님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김창의 접근을 발견했다. 혼자서 칼을 들고 뚜벅뚜벅 다가오는 걸 보고서 궁병들이 할 시위를 당기는 게 보였다.
김창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성문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칼을 들었다.
“멈······!”
병사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벼락이 떨어졌다. 우렁찬 우레와 함께 창백한 빛이 번쩍이더니 성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성벽이 흔들렸고 일부 병사들은 강렬한 충격에 다리의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마법사인가? 하지만 마법사가 칼을 들고 다닐 리는 없을 것이며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저런 건······.
“경고하는데.”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크게 외치는 것도 아니고 평소의 성량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성벽 위의 병사들은 그 목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괜한 짓거리하지 말고 거기 있어라. 죽기 싫으면 거기 있으라고.”
모든 병사의 시선이 김창에게 모였다가 다시 성문 수비대장에게 모였다. 그에겐 성문을 지키고 왕도를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나 지금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수비대장은 얼이 나간 것처럼 가만히 있었고 김창은 성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누구냐!”
“침입자다!”
“모두 동쪽 성문으로 모여!”
조용히 침입한 것도 아니고 성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왔으니 습격이 있었다는 걸 모두가 알았으리라.
김창은 왕도 안으로 들어가자 대로를 꽉 채운 병사들을 보고서 칼자루를 세게 쥐었다.
게임으로 치면 경험치도 안 주는 저 잡몹들을 전부 죽이고 가야 하나? 그냥 벼락 몇 번 떨어트리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지 않을까.
김창이 고민하는 사이에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어쩔 수 없이 칼을 휘둘러 그들을 죽였다.
그건 싸움이 아니었다. 모닥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병사들이 칼날에 달려들어 제멋대로 목이며 팔이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백 명쯤 죽였을 때였다. 갑자기 병사들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일반 병사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흑색 군단을 이끌고 나타난 남자는 이쪽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건 자신 없는데. 김창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를 마주 봤다.
“기어코······.”
“왜, 만네르헤임은 내가 지옥에 처박혀 있을 거라고 했는데 기어코 지상으로 올라온 걸 보고 질려버렸나?”
흑색 군단의 주인, 또한 이 나라의 주인은 남자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 정말 질리는군. 그냥 지옥에 얌전히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던 게냐? 꼭 이렇게 날 괴롭혀야겠느냐고.”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언제 널 괴롭혔어? 원탁 뒤통수친 거 너 아니야?”
“너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였다. 당장은 써먹기 좋은 무기지만 언젠가는 이 나라를 위협할 칼날이 될 게 분명했지. 그래서 나는 왕으로서, 이 나라의 국운을 위해 너희를 제거해야만 했다. 나는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게 죄가 될 수 있나?”
“글쎄. 나는 몰라도 한석구는 죄가 된다고 생각할걸. 그리고 나라를 위하는 척 좀 그만하지 그러냐. 그토록 나라를 생각하는 왕이 대악마와 계약하나?”
그 말에 왕이 얼굴을 움찔거렸다.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 나도 너 죽이는 거 필요해서 하는 일이니까 너무 원망하진 말고. 그래서, 거기 있는 새까만 놈들이 이번에 만든 군대냐? 확실히 강해 보이긴 하네.”
“나는 네가 강하다는 걸 알고 있다. 이들 역시 강하지만 여기서 소모할 수는 없지. 네 상대는 따로 있다. 데려와라.”
왕이 고갯짓하자 기사 한 명이 뒤쪽에서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
그는 손목과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고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죄인의 모습이었기에 김창이 미간을 좁혔다.
“너와의 싸움에서 내 소중한 병사들을 잃을 수는 없지. 그러니 널 상대할 자는 내 병사들이 아니다. 바로 이 남자다. 안대를 벗기고 족쇄를 풀어줘라.”
황금색 머리카락에 갈색 피부, 잘생겼지만 살짝 경박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김창은 왠지 모르게 저 남자가 낯익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저런 놈이 있었던 것 같은데.
“크으윽······.”
남자의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빛나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제정신인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는 걸 보면 세뇌라도 당한 걸까?
‘아마 만네르헤임의 힘을 이용해 세뇌한 모양이군.’
“그건 또 어디서 주워온 장난감이냐? 애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나?”
김창이 장난 치듯 가볍게 묻자 왕이 대답했다.
“도박장에서. 그리고 제법 쓸만하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디서 주워?”
“도박장. 너도 이 녀석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않나? 자기 영지 걸고 도박하다가 잡혀 온 놈인데.”
씹,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황금성이었나? 김창은 저 멍청한 놈이 자기 상대로 나왔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만네르헤임의 세뇌까지 당했다는 걸 보고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 황금성. 가라. 가서 네 적을 무찔러.”
“크르륵······.”
황금성이 전신의 마력을 일으키며 김창을 향해 다가왔다. 아무래도 정말 싸울 생각인 듯해서 김창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걸 죽여야 할까? 죽이면 신성을 많이 주기야 하겠지만 배신자도 아닌데 꼭 죽여야 하나?
그럼 한석구가 싫어할 것 같은데······.
김창은 고민하면서 일단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야, 황금성.”
“크륵······.”
“뒈지게 처맞고 정신 차릴래, 아니면 그냥 뒈질래.”
“크르륵!”
대화가 안 통하네. 김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으며 칼날에서 벼락을 일으킬 때였다.
뚜벅뚜벅 걸어오던 황금성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깐 가만히 서서 벼락이 휘감긴 칼날과 김창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참을 그러고 선 황금성이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왕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아무리 역배충이라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