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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알 성에서 연신 환호성이 울렸다. 원래 전투에서 이기면 승전을 축하하는 행사가 벌어지는 법이라지만 지금껏 그런 적은 없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지금껏 이겨도 이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스알 성의 실질적 주인인 엘리아나가 보기에 아직까지 이곳이 무너지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마왕군이 진심으로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왕군이 정말로 바스알 성을 무너트릴 작정이었다면 진작 그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건 이쪽을 가지고 놀기 위해서라는 걸 엘리아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는 것은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마왕군이 바스알 성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싸웠다.
그러면서 병사들의 사기는 점차 바닥을 치고 병력 역시 줄어들고 있는 와중이었다.
줄곧 바스알 성이 아슬아슬하게 감당할 수 있는 병력만을 끌고 왔던 흑기사 브리온이 어마어마한 양의 군세를 이끌고 왔을 때였다.
이미 바스알 성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병력 역시 절반 이하로 줄었을 때 그만한 병력을 이끌고 온 건 지금까지의 장난질에 질려버렸다는 증거였다.
브리온은 바스알 성을 함락시킬 작정으로 이곳에 찾아왔고 엘리아나 역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나 정작 죽음을 맞이한 건 그녀가 아니라 브리온이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가? 그건 용사인지 아닌지 모를 웬 남자 덕분이었다. 신검을 뽑지도 않고 맨손으로 브리온의 모가지를 뽑아버린 남자, 그 이름은 김창이었다.
“김창! 김창! 김창!”
“김창 만세!”
“모가지 수확자 김창 만세!”
마지막은 비꼬는 건가? 환호성을 들으며 김창이 얼굴을 구겼다. 반면 엘리아나는 생긋 웃는 얼굴로 병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바스알 성은 지금껏 굴욕적인 승리만을 거듭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사상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그들이 얻은 수확은 셀 수 없을 만큼 컸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는 이번 전투로 마왕군의 일각인 브리온의 병력이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으리라 장담했다.
엘리아나가 보기에 그건 과장이 조금 더해져 있어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당장 성벽 아래에 쓰러져 있는 시체만 해도 수천이고 패주(敗走)한 병력 중 대부분은 크나큰 상처를 입어 도망치더라도 오래 못 살 게 분명했다.
심지어 마왕군은 이번에 사천왕 중 하나인 브리온까지 잃지 않았나? 마왕군의 괴물 역시 무섭지만 흑기사 브리온이 그보다 더 무섭다는 걸 생각하면 이번 전투는 그야말로 바스알 성의 대승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용사님. 당신 덕분에 우리는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있게 되었군요.”
김창은 엘리아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감사할 것까지야. 별거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과할 정도의 겸손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김창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엘리아나가 보기에 김창에게 있어서 흑기사 브리온을 상대하는 건 정말 별거 아닌 일임이 분명했다.
당장 싸우는 모습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흑기사 브리온은 대륙의 이름난 기사를 수도 없이 도륙한 강적인데 그런 그를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죽일 만한 실력인데.
“···용사님, 정말 부끄럽게도 크나큰 도움을 받았음에도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게 없군요. 바스알은 지난 몇 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쇠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해 싸워오면서 빛나는 금은보화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돌멩이가 되었으니 그걸 드릴 수도 없겠군요. 전란의 시대에 가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목구멍 뒤로 넘길 식량과 일신을 지킬 칼날뿐이니 그것이라도 받아주신다면 대단히 기쁘겠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황금은 가치를 잃고 식량은 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김창도 그걸 알기에 금은보화 따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칼 한 자루 받지. 내가 지금 무기를 안 들고 와서.”
김창은 벼락과 불꽃을 다루고 맨손으로 브리온을 때려죽였는데 무기가 필요할까? 엘리아나는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용사의 요구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병사를 시켜 칼 한 자루를 가져오게 하고는 김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브리온이 전사하고 마왕군 역시 궤멸적인 피해를 보았으니 한동안은 공격이 없을 겁니다. 세롬이 곧 차원문을 열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거 오래 걸리나?”
“글쎄요. 제가 마법사가 아닌 탓에 얼마나 걸린다고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리 오래는 걸리지 않을 것 같네요. 차분히 기다려주시면 금방 끝날 테니······.”
“그럼 대마법사 양반한테 마왕성으로 가는 차원문 열라고 해.”
“······뭐라고 하셨죠?”
김창이 뭘 또 묻냐는 듯 대답했다.
“가서 마왕 목이나 좀 따게 차원문 열라고.”
엘리아나가 두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지금 마왕을 죽이러 가겠다는 소리인가요?”
“그래.”
엘리아나는 그게 대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방금 김창이 혼자서 마왕군을 학살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만한 강함을 가진 존재라면 정말로 마왕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그토록 강력한 벼락을 맞고서 멀쩡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안 돼요, 용사님. 당신을 마왕에게 보낼 수는 없어요.”
그러나 김창은 마왕을 죽일 수 없다. 마왕을 이길 만한 힘과 실력이 있다고 해도 그가 마왕을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신검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신검이 없으면 마왕을 죽일 수 없어요. 마왕은 몇 번이고 부활하여 당신을 노릴 것이고 그럼 아무리 용사님이라도 결국에는 당하고 말겠지요. 용사님, 차라리 우리를 위해 바스알을 지켜주겠다고 한다면 그것참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만 홀로 마왕을 상대하러 가겠다는 건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에요.”
엘리아나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서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서로의 얼굴을 본 두 사람은 상대가 뭔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김창은 엘리아나가 자신을 절대 보내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엘리아나는 김창이 자신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이 의도치 않게 눈싸움을 하고 있을 때, 무기고에 보냈던 병사가 칼 한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그가 김창에게 칼을 건네고 뒤로 물러나자 엘리아나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건 보급용 칼이에요. 원래라면 이름난 명검을 드려도 모자랄 일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나빠 그럴 수 없음을 용서해주세요.”
김창이 칼자루에서 칼을 뽑았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뽑힌 칼은 분명 누구나 쓰는 보급용 칼인데도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마치 천하의 명검처럼 빛나고 있는 칼을 멍하니 보다가 말했다.
“···어쨌건 이만 돌아가서 쉬세요. 방을 내드리지요.”
“나도 아까 말한 것 같은데.”
김창이 칼자루에 칼을 꽂고 엘리아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흔치 않은 검은색 두 눈은 마치 빨려들어갈 듯 기이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본능적인 두려움이 솟아올라 엘리아나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인간이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나? 그녀가 알기로 지금껏 소환한 용사들은 전부 지구라는 세상에서 왔고 살면서 뭔가를 죽여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김창이라는 사람의 눈은 어떤가? 마치 공허처럼 새까만 검은색 두 눈은 사람 한둘 죽여본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사람 죽이는 게 직업인 것만 같은······.
“무상 서비스해주겠다고. 내 도움이 필요가 없는 거냐, 아니면 내 말을 안 믿는 거냐.”
“아니, 저희는 무상 서비스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원래 서비스라는 게 그래. 받기 싫다고 안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게 대체 뭔 소리인가? 받기 싫다는데 자꾸 주는 건 서비스가 아니라 그냥 강매 아닌가? 엘리아나가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김창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열어.”
엘리아나는 김창의 눈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보기에 김창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누가 뭐라고 한들 듣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세롬은 지금 바쁘니 다른 마법사를 불러올게요. 오시안 경!”
엘리아나의 부름에 마법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엘리아나가 말했다.
“마왕성으로 향하는 문을 여세요.”
“네? 공주님, 갑자기 그게 무슨······.”
“명령입니다. 마왕성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요.”
마법사 오시안은 이번 전투의 승리로 너무 기쁘다 못해 공주가 돌아버린 게 아닐까 의심했다.
다른 부탁이라면 다 들어줬을 테지만 갑자기 마왕성으로 가는 문을 열라니? 만약 열었다가 마왕성의 괴물들이 이쪽으로 들이닥치면 어쩔 셈인가?
오시안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김창이 나직이 말했다.
“문, 열어.”
그 목소리는 바스알의 적법한 주인인 공중의 명령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무심하다 못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오시안이 다급히 차원문을 생성했다.
“···일단 시키는 대로 열긴 하겠습니다만 이건 위험한 일입니다. 만약 저쪽에서 괴물이 넘어오기라도 하면요?”
“그럼 내 손에 전부 죽겠지.”
오시안은 아까 전 김창이 홀로 수많은 괴물을 쓸어버리는 걸 봤다. 그 정도 실력이 있다면 차원문을 통해 괴물 한둘쯤 넘어오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겠으나······.
“그래도 걱정이 되면 내가 떠나고 나서 바로 문을 닫아라.”
“그랬다간 용사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요.”
엘리아나의 말에 김창이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답했다.
“위험해져? 내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한 얼굴을 보고서 엘리아나가 허 소리를 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하기야 그럴 만한 실력이 있으니······.
“···그럼 엽니다.”
오시안이 차원문을 열자 저 너머로 마왕성이 보였다. 단지 차원문을 열었을 뿐인데 반대쪽에서 넘어오는 독기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엘리아나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콜록콜록 기침하자 오시안이 슬쩍 김창의 눈치를 봤다. 그는 뭘 보냐는 듯 눈썹을 까딱이더니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차원문을 통과했다.
뒤에서 엘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곧 사라졌다. 오시안이 차원문을 닫은 탓이었다.
“여기가 마왕성인가.”
김창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을 보고서 흠 소리를 냈다.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주변으로 괴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흠 소리를 내며 칼을 뽑은 김창이 말했다.
“마왕은 오직 신검으로만 죽일 수 있다고 했던가?”
부드럽게 칼집에서 뽑혀 나온 칼날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그럼 반신의 칼을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