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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이 칼을 들고 한 발자국 움직이자 괴물들도 그에 반응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늑대를 닮은 괴물은 그 크기가 황소보다도 커서 발톱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을 듯했다.
덥수룩한 털 아래에 감추어진 가죽 역시 상당히 두꺼워서 아무리 활을 쏴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괴물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김창에게 덤벼들었던 건 자신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얼마큼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들과 싸울 땐 갑옷 입은 병사조차 한입에 씹어 삼켰는데 그저 칼 한 자루 든 인간 따위야······.
“갈 길 멀다. 비켜.”
사선으로 빛이 반짝이는 듯하더니 괴물의 몸이 반으로 갈라져 아래로 뚝 떨어졌다. 가죽과 근육이 얼마나 질기고 두꺼운지, 그리고 그 아래에 숨은 뼈가 얼마나 크고 단단한지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단두대의 칼날이 몸 위로 바로 떨어져도 저만큼 깔끔하게 잘리지 않을 텐데 어찌 인간이?
괴물은 자신이 대체 뭐에 당했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로 곧장 숨이 끊어졌다. 그 뒤로 다른 괴물들 역시 덤볐으나 모두 같은 꼴로 죽었다.
이쯤 되니 아무리 지성이 없는 괴물이라 해도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작고 가벼운 뇌로 열렬히 생각해보건대 이대로 덤벼봤자 그저 개죽음일 뿐이었다. 저 정체 모를 인간 놈은 칼 한 자루를 들고서 종이 자르듯 모가지를 썰어대는데 할 줄 아는 거라곤 깨물거나 할퀴는 것 외에는 없는 괴물이 대체 뭔 수로 상대하나?
목숨 바쳐 싸워봤자 마왕이 그 숭고한 희생을 알아주기나 한다던가? 아마 마왕은 잡졸의 목숨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끼이잉······.”
김창이 괴물 수십 마리를 죽였을 때,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괴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덤비자니 목숨이 아깝고, 도망치자니 꼴사나운 일 같은데다 김창이 그걸 허락할 것 같지도 않다.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대치 상태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김창이 허공에 칼을 털며 말했다.
“말했지, 갈 길 바쁘다고. 빨리 덤벼.”
김창의 말에도 괴물들은 발이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덤빌 거냐?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김창이 칼로 괴물 무리를 겨누자 그제야 한 놈이 움직였다. 그건 원래부터 덩치가 큰 괴물 중에서도 특히나 덩치가 컸는데 그놈이 움직이자 다른 괴물들이 조용히 물러나는 걸 보면 무리의 대장쯤 되는 듯했다.
한 번의 싸움으로 끝을 내자는 건가? 괴물치고 재밌는 생각을 하는군. 김창이 가볍게 웃으며 칼을 겨눌 때였다.
“항복하겠다.”
개가 말을 해? 그것도 아주 또렷한 발음으로? 김창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괴물을 쳐다봤다.
“뭐야, 말도 할 줄 아냐?”
“모든 괴물이 이성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이 무리의 대장으로서 인간과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름 모를 칼잡이여, 다시 말하지. 우리는 항복하겠다.”
하기야 괴물이라고 해서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건 선입견이지. 집에서 키우던 개가 갑자기 말을 하면 좀 무서울 테지만 사람 잡아먹고 다니는 괴물 놈이 말을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김창이
이번에도 괴물이 주둥이를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너의 강함을 인정하겠다. 나는 부디 네가 강자의 자비를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리를 살려주겠나?”
김창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껏 많은 괴물을 죽였지만 아직 그보다 더 많은 괴물이 남아 있었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위험한 건 아니지만 전부 죽이고 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게 분명했다.
김창의 목적은 마왕을 죽이는 것이지, 마왕군을 궤멸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이쯤에서 적당히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도 상관없을 터였다.
“아니.”
빛이 번쩍이더니 괴물의 목이 잘렸다. 일반적인 생물이라면 그대로 죽었을 테지만 괴물은 무리의 대장답게 목이 잘린 채로 말했다.
“케켁······. 항복하겠다는데 왜······.”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했던가?”
김창이 칼을 내리찍어 괴물의 머리를 박살 냈다.
“너무 짖지 마라. 난 내 갈 길 가려니까.”
항복하겠다고 해서 꼭 살려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죽일 필요도 없지 않나?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을 대체 왜······.
괴물은 죽으면서도 김창의 머릿속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너흰 어쩔 거냐?”
김창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쳐다보자 감히 덤벼들 괴물은 없었다. 방금 무리의 대장까지 죽은 상황인데 대체 뭔 생각으로 덤비겠는가?
수십 마리의 괴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김창은 도망치는 그들을 쫓아 벼락을 날려 숯 검정이로 만들어버렸다.
기어코 괴물 전부를 죽여버린 김창이 다시 마왕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크헤헥! 인간이다, 인간!”
길을 가다 보니 또 괴물들이 나타나서 전투가 시작됐다. 과정이나 결과는 아까의 싸움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의 괴물은 목숨을 구걸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것뿐.
김창은 길을 가다가 적을 만나면 싸우고 또 가다가 싸우고를 반복했다. 그런 식으로 수천 마리의 괴물을 홀로 쓸어버렸을 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왕성의 입구가 보였다. 본래라면 문지기가 성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테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들리는 싸움 소리에 놀라 도망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김창은 여기까지 오면서 몸에 묻은 핏물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그가 칼을 들어 성문을 겨눌 때였다.
“인간 놈이 겁도 없이 날뛰는군.”
성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비쩍 마른 남자 하나가 나왔다. 처음엔 기이할 정도로 마른 체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성문의 그림자 속을 벗어나고 나니 그게 아니라 뼈만 남은 리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후후, 네가 브리온을 이겼다는 놈이냐? 과연 그에 걸맞은 무용이군.”
그 뒤로 나온 건 거대한 덩치의 악마였다.
“영 비실비실하게 생겼는데? 정말 브리온을 죽인 게 맞아? 눈매는 또 왜 저리 더러운데?”
마지막으로 나온 건 경박한 인상의 흑요정.
그들은 지금까지 김창이 싸워온 괴물과는 격이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마왕군 내부 사정이야 모르지만 아마 저들이 간부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흰 뭐냐?”
“우리가 누구냐고? 건방진 놈이로고. 자기소개는 너부터 해야지.”
리치가 말하자 김창이 가만히 대답했다.
“김창.”
“이름을 짓다 말았나? 그게 뭐야?”
어째서 만나는 놈마다 이름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며 턱짓을 했다.
헛소리는 그쯤하고 자기소개나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걸 본 리치가 흥 소리를 내더니 답했다.
“우리는 마왕군 사천왕이다. 내 이름은 갈리온이고, 이쪽은 톨마와 산나다.”
리치의 이름은 갈리온, 악마와 흑요정의 이름은 각각 톨마와 산나인 듯했다. 물론 김창으로선 이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므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사천왕? 사천왕이면 넷일 텐데 한 명은 어디 갔어?”
김창의 질문에 갈리온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하기야 뭐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늦든 빠르든 내 손에 전부 다 죽을 테니까 말이야.”
자신감 넘치는 말에 톨마가 발끈했다.
“네가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 그러나 너 혼자서 마왕군을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나!”
김창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봤다. 거기엔 지금까지 그가 죽인 괴물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못할 건 또 뭐냐.”
“하기야······.”
똑같은 걸 보고 있던 톨마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듯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너희가 사천왕이라고? 내가 마왕군에 대해서 잘은 몰라도 너희가 마왕을 제외하고 제일 강한 놈들이라는 건 알겠다. 그럼 너희가 그 브리온이라는 놈보다 강하겠군? 왜냐하면 사천왕이니까.”
브리온의 이름이 나오자 사천왕이 몸을 떨었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서 의아함을 느낀 김창이 물었다.
“왜, 아닌가? 너희가 사천왕이면 당연히 브리온보다 강할 거 아니야.”
“아니, 그, 브리온이 사천왕 중 한 명인데······.”
흑기사 브리온을 무기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때려죽인 김창 입장에서 그건 몹시 납득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그러니까 그 약해빠진 놈이 사천왕이라고?
“그럼 걔가 사천왕 중에서 제일 약한 놈인가? 그건 맞지?”
“크흠, 제일 강하다.”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리는 갈리온을 보며 김창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브리온 그놈이 그냥 네임드 몬스터 정도인 줄 알았는데 실은 중간 보스였다 이거지?
그리고 이놈들은 그 약해빠진 놈보다도 더 약한 놈들이고?
“장난하나? 뭐 이딴 놈들한테 대륙이 멸망하니 어쩌고 하고 있는 거야? 이 정도 수준이면 그냥 정복자 한 명만 갖다 놔도 다 때려눕힐 정도인데.”
게임이라는 건 너무 어려우면 화가 나는 법이지만 너무 쉬워도 화가 나는 법이다. 큰맘 먹고 산 게임이 너무 쉬워서 십 분이면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클리어할 수 있다고 하면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럴 거면 차라리 그 돈으로 영화라도 보지, 게임을 왜 하나? 김창은 어이가 없다 못해 슬슬 화가 나려 하고 있었다.
“원래 만화나 애니를 보면 사천왕은 마왕을 만나기 전에 중간 보스로 나오는 법이지. 아래층에는 약한 괴물을 배치하고 위로 갈수록 더 강한 괴물이 나오는 게 정석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사천왕이라는 놈들이 입구에서부터 용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처음 보는군.”
김창의 칼자루를 세게 움켜쥐며 벼락의 힘을 일깨웠다.
“왜 그러고 있는지야 알만해. 브리온이라는 놈이 사천왕 중에서 제일 강한데, 그놈이 쪽도 못 쓰고 죽었으니 혼자서 상대하다간 죄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겠지. 하여튼 씹새들, 그런 쪽으로 머리는 잘 굴러가는데 정말 목숨이 소중했으면 너희만 올 게 아니라 마왕도 불러서 같이 왔어야지.”
김창은 지금 너희 셋만으로는 날 막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발적인 언사였으나 사천왕은 이를 갈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군. 물론 브리온이 우리 사천왕 중 제일 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우리 셋을 합친 것보다 강하지는 않겠지. 김창, 너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우린 네가 마왕님께 가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
“한 명이다.”
단순히 칼날에 벼락의 힘을 입히는 걸 넘어 완전한 벼락의 화신으로 변한 김창이 손가락 하나를 흔들며 말했다.
“너희 인생이 불쌍해서 내 변덕 한 번 부리지. 딱 한 명만 살려주겠다.”
사천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벼락의 화신으로 변한 김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에 압도됐다.
하늘에서 마왕을 막으라고 신이 직접 제 화신을 내려보낸 게 아니고서야 저만한 신성을 가질 수가 있나? 그것도 일개 인간 따위가?
그들은 브리온이 어째서 김창에게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휘관 괴물에게 듣기로 브리온은 무기를 들지 않은 김창에게 죽었다고 하던데 그럼 무기를 들고 있는 김창은 얼마나 강할 것인가?
“왜, 내 말을 못 믿겠나? 믿든 안 믿든 너희 자유다. 난 그저 너희가 목숨을 구할 방법을 설명해주는 것뿐이고. 알겠나? 한 명이다. 지금부터 서로 죽이든 뭘 하든 해서 한 명만 남아라. 그게 싫으면? 그럼 내 손에 죄 죽던지.”
김창의 모욕적인 발언에 톨마가 벌컥 화를 냈다.
“우리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군! 우리는 사천왕으로서 같은 주인을 섬기며 끈끈한 유대로 이어져 있다! 제 목숨을 건지자고 서로를 공격할 리가······.”
“죽어라, 톨마! 이 냄새나는 악마 자식!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