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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76화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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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결하라니? 그럼 나 혼자서 신검의 칼날에 머리를 들이밀고 목 잘려 죽으라는 말인가?

충격적인 걸 넘어서 끔찍하기까지 한 발언에 마왕은 물론이고 엘리아나까지 당황하고 말았다.

마왕은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는데 엘리아나가 다급히 물었다.

“용사님, 전장에서 굴욕적인 죽음 대신 자결의 기회를 주는 건 왕왕 있는 일이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당황스럽네요.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마왕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게 옳은 일인지는 제쳐두고서, 그 방법이라는 게 대체······.”

“방법이 뭐 어때서?”

“보통 자결이라는 건 자신의 칼로 제 심장을 찌르는 것이지, 땅에 박혀 있는 칼에 머리를 들이미는 게 아닌데요······.”

누구보다 마왕을 증오해야 할 엘리아나 그리 말하는 걸 보면 자신의 방식이 기괴하긴 했던 모양이다.

김창은 어른으로서 타당한 지적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남들 보기엔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른 방법이 몇 개 있긴 한데.”

“그게 뭔가요?”

“내가 이 녀석을 들어 올려서 그대로 신검 위에 내리꽂는다.”

“······.”

엘리아나는 가만히 김창이 마왕을 신검 위에 내던지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확실히 칼자루부터 시작해서 바닥까지 내리꽂으면 마왕이 죽기야 하겠지만······.

“다른 방법은 없나요?”

“있지. 내가 마왕을 들고 휘둘러서 칼날에 목이 잘리게 한다. 아니면 신검을 바닥째로 들어 올려 마왕의 머리를 후려친다거나······.”

“미안해요. 물어본 내가 나빴어요.”

왜 사과하는 거지? 김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줄곧 멍하니 있던 마왕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바스알의 공주여. 내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제안? 감히 내게 제안을 하겠다는 건가요? 내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했으면서 이젠 죽을 때가 되니 목숨을 구걸하려 드는 꼴이 참 우습군요.”

원래라면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쪽은 엘리아나였을 것이다. 마왕은 왜 진작 이 대륙을 멸망시키지 않고 쓸데없는 놀이나 하고 있었는지 몹시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후회는 이 끔찍한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마왕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은 후에 말했다.

“네가 날 증오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네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다. 날 죽일 방법에 대한 것이니까.”

엘리아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당신을 죽일 방법? 그거라면 이미 있어요. 난 용사님이 말한 방법이 너무 과격해서 꺼려졌을 뿐이지, 당신을 동정해서 그 방법을 거부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난 내 백성들을 학살한 당신을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고요.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거라면 조용히 있어주면 고맙겠군요.”

엘리아나의 싸늘한 목소리만 봐도 마왕에 대한 그녀의 살의가 상당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럼 몇 번 방법으로 할 테냐? 지금까지 말한 것 외에도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그건 네가 안 궁금해 할 것 같군.”

엘리아나가 정말 안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흠,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할걸. 왜냐하면 날 죽이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엘리아나가 눈을 부릅뜨는데 마왕이 코웃음과 함께 말했다.

“뭘 그리 노려보나? 난 정말 날 죽일 방법에 대해 말하는 거야.”

마왕의 당당한 태도를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혹시나 허세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제정신이라면 김창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엘리아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해봐요.”

“날 죽이려면 용사와 신검이 필요하다. 용사가 신검을 들고 날 찔러야만 모든 싸움이 끝이 난다는 소리지.”

그거야 다 아는 일이 아닌가? 엘리아나가 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눈썹을 까딱거리자 마왕이 하하 웃으며 답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나? 난 단순히 신검에 찔려야만 죽는 게 아니야. 용사가 신검으로 날 찔러야 죽는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

“이해가 느리군. 신검이 날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신검을 든 용사가 날 죽일 수 있는 거지. 그럼 저기 있는 남자는 용사가 맞나? 정말로?”

엘리아나가 고개를 돌려 김창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뭐.”

김창이 눈을 부라리자 엘리아나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용사님은 용사님이 맞아요.”

“정말? 하지만 내가 알기로 신검을 뽑은 자만이 진짜 용사라고 하던데? 그럼 저 남자는 신검을 뽑았나? 이런, 뽑지 못한 것 같군.”

이 새끼 왜 이리 깝죽거리지? 따귀를 한 대 더 날려줘야 하나? 김창이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때 엘리아나가 아아 소리를 냈다.

“그, 그럼······.”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나? 너흰 날 죽일 수 없어. 설령 내가 신검의 칼날에 머리를 들이밀고 자살하더라도 난 결국 다시 부활할 거다. 진짜 용사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야!”

“진짜냐? 그럼 어차피 안 죽는데 이것저것 시험해봐도 되나?”

김창이 말하자 마왕이 얼굴을 찡그렸다.

“···되겠나? 공주, 이제 내 제안을 들을 생각이 생겼나 보군.”

공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왕이 김창의 얼굴을 슬쩍 보다가 말했다.

“큼, 뭐가 어찌 됐든 내가 이번 싸움에서 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너희는 날 죽일 방법이 없고 난 너희를 이길 방법이 없지. 그러니 이러자. 날 봉인해라. 그리고 언젠가 신검을 뽑을 용사가 나타나면 그때 날 죽여.”

저 새끼 저거 또 수작 부리는군. 김창이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말하려 했지만 엘리아나는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가능하겠군요.”

언젠가는 봉인이 약해져 마왕이 부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전까지 용사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마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지금의 안위는 보장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대륙은 길고 긴 전쟁으로 엉망이 되었고 사람들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마왕을 죽이진 못해도 그를 봉인할 수만 있다면 당장은 대륙에 걷힌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또 어둠이 몰려올지 모른다고 하면 그때까지 마왕에 대적할 방법을 찾아내면 될 일 아닌가······.

“이봐, 저 개소리를 들어줄 거냐?”

신성을 얻을 수 없게 된 김창이 불만스럽게 묻자 엘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린 마왕의 말대로 그를 죽일 방법이 없는걸요.”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자 엘리아나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불만스러우신 거 알아요. 하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는걸요? 용사님, 저도 마왕을 죽이지 못하고 봉인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스러워요. 신검이 뭐길래? 용사가 뭐길래? 그것들이 대체 뭐길래 마왕을 이겼는데도 그 숨통을 끊어버릴 수 없다는 걸까요? 용사님, 저는 지금 누구보다 분하고 화가 나요. 그저 참고 있을 뿐이에요.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내 백성을 위해 참고 있다고요.”

엘리아나의 절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김창은 또 한 번 혀를 찼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김창은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몸을 돌렸고 엘리아나가 우울하게 웃었다.

“정말······ 이깟 신검이 뭐라고······.”

비통한 얼굴을 한 엘리아나가 신검의 칼자루를 잡았다. 당연히 그걸 뽑을 생각은 없었고 그저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발산하기 위해 힘껏 쥐었을 뿐이었다.

툭.

“···어?”

엘리아나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곧 바닥으로 넘어졌다. 왜 갑자기 넘어졌는가 하면 뽑혀선 안 될 것이 뽑힌 탓에 균형이 무너진 탓이다.

“신검의 선택을 받은 자여. 네 이름을 말해라.”

근엄한 목소리가 지하 광장 안에 울렸다. 그건 단지 근엄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일말의 신성함까지 느껴졌는데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건함을 느끼게 했다.

마왕은 물론이고 신검을 뽑은 엘리아나까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신검 아퀴스. 적법한 자격을 가진 자의 부름을 받아 내 신명을 다하려 한다. 내 다시 묻노니,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근엄한 목소리는 환청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이 광장 안에 울리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울린 쪽으로 향했다.

김창과 마왕의 시선을 받은 엘리아나가 눈을 끔뻑였다. 상황을 얼른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당황스러워했다.

“이게 무슨······?”

김창은 신검을 들고 있는 엘리아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토록 용사를 찾아 헤매었는데 실은 네가 그 용사였다라? 이것 참 우스운 이야기로군.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어쨌건 이제 마왕을 죽일 수 있게 됐군.”

“이, 이건 말도 안 돼······. 신검이, 신검이 뽑히다니. 설마 용사가 공주였다고?”

바닥에서 뽑힌 신검을 보고서 마왕이 몸을 덜덜 떨었다. 겨우 살아날 방법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신검이 뽑힌다고?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마왕이 발작하듯 소리치며 도망치려 할 때였다. 빛나는 벼락이 그의 몸을 달궜고 곧 매캐한 냄새와 함께 마왕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 나는 여기서 죽을 수는······.”

마왕은 벼락에 맞고서도 바닥을 기어서 도망치려 했다. 김창이 바닥을 기고 있는 손을 밟아 뼈를 으스러트리자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결국 내가 죽이지 못했으니 신성을 얻을 수 없게 됐군. 아쉽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나.”

김창이 마왕의 다리도 마저 부러트리곤 말했다.

“와서 죽여. 혹시 사람 죽여본 적 없나? 걱정하지 마라.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워.”

일국의 공주가 사람 죽이는 걸 배워서 뭘 어쩌라고? 엘리아나가 어이없어하면서도 마왕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설마 내가 용사였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던가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용사가 바로 나였다니? 딱 한 번, 그저 딱 한 번만 신검을 뽑아보기만 했어도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쉽고 후회스러워요.”

“내가 사천왕인가 하는 놈 죽이고 들은 말인데 후회만 해서는 전진할 수 없다더군. 그 친구가 배신은 잘했어도 사람은 착했는데, 하여튼 참 아쉬운 일이야.”

“그 말이 맞죠. 후회만 해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용사님, 저는 힘차게 나아가겠어요. 그리고 그걸 위해 내 손에 피를 묻힐 각오도 끝냈습니다.”

엘리아나가 신검을 들고 마왕을 겨누었다. 처음 칼을 잡아보는 것인지 자세는 엉성했지만 그래도 다 죽어가는 마왕을 죽이기엔 충분할 터였다.

“그런데 참 얄궂은 운명이긴 하군. 그토록 많은 용사가 왔었는데 진짜 용사는 바로 너였다니. 대체 용사의 자격이라는 게 뭐길래 반신인 나조차 신검을 뽑지 못했던 거지?”

김창은 신검 따위에 별 관심이 없다. 오러는 물론이고 벼락의 힘으로 칼날을 강화할 수 있는 그에게 있어서 신검이든 그냥 칼이든 별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용사의 자격이라는 게 궁금하긴 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쨌건 자신은 무려 반신이 아닌가?

신검은 대체 왜 반신이 아니라 싸우지도 못하는 공주를 용사로서 선택했는가?

“그건 나를 창조한 것이 달과 처녀의 신이기 때문이다.”

대답을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자 김창이 응? 소리를 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날 창조한 게 달과 처녀의 신이라고 했다. 때문에 오직 순결한 처녀만이 날 뽑을 수 있다. 지금껏 수많은 자가 날 뽑으려 했으나 뽑히지 않았던 건 그들이 순결한 처녀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어쩐지 일부러 안 뽑히려고 용쓰는 듯한 느낌이 들던 게 바로 그것 때문이었나? 뭔 별 웃기지도 않는······.

김창이 말했다.

“혹시 마왕 죽이고 그 칼 좀 잠깐 빌려줄 수 있나?”

“네? 신검은 갑자기 왜······.”

김창이 무감정한 얼굴로 답했다.

“그 씹새 허리 반 접어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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