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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77화 (17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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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과격한 발언에 엘리아나가 깜짝 놀랐다.

“그래선 안 돼요!”

“그래, 안 되겠지.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김창은 여전히 신검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그 말은 신비성이 없었다. 엘리아는 얼른 마왕을 죽이고 김창을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마왕부터 죽이도록 하지요. 잠깐 물러서 주세요.”

마왕은 아까 김창이 손이며 발을 전부 분질러놨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무기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공주라고 해도 움직이지 못하는 적을 찔러 죽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엘리아나가 신검을 거꾸로 쥐고 머리 위로 들었다가 힘껏 내리찍었다. 칼끝이 마왕의 몸을 관통하고 심장을 찔러 그 끈질긴 생명을 끝장냈다.

날카로운 창칼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고 강력한 마법으로 그을음 하나 만들 수 없었던 단단한 마왕의 육체가 신검을 상대로는 물에 젖은 진흙처럼 무른 것을 보니 우울함이 몰아쳤다.

신검, 그깟 신검이 대체 뭐라고? 이토록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왜 지금까지······.

“이걸로 다 끝났군요.”

엘리아나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말했지만 김창은 대꾸하지 않았다. 가만히 죽은 마왕을 쳐다보고 있는 그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용사님?”

엘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김창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에 깃든 새로운 신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신성을 얻을 만한 일이라고는 마왕을 죽이는 것뿐인데.’

신성이라는 것은 남들이 해내지 못할 위업을 달성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마왕을 죽이는 건 과연 신성을 얻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마왕을 끝장낸 건 엘리아나가 한 것인데 왜 자신이 신성을 얻었는가?

“그건 이 땅에 승천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선 오직 태초부터 신이었던 자들만이 존재할 뿐이며 승천하여 새로운 신이 탄생하는 일 따위는 없다. 그러니 신성은 오롯이 네 것이 될 뿐이다.”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대답한 것은 엘리아나의 손에 들린 신검이었다. 김창이 미간을 좁히며 신검을 노려봤다.

“너······?”

“반신 김창, 내 신이 널 찾으신다. 천상에 오르라.”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김창은 당황하지 않았다. 천상에 오르는 일이라면 이미 해본 적 있는 일이니까.

김창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내면의 신성을 일깨우며 승천의 모습을 상상하자 몸에서 환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신검은 이 땅엔 승천할 자가 없다고 했지만 어쩌면 이대로 승천하여 새로운 신이 돼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좀 곤란한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느새 천상에 도달했음이 느껴졌다.

“···음?”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기로운 꽃향기, 화려한 깃털을 자랑하며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새들, 한가로이 돌아다니는 여러 짐승, 그리고 그들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천사들.

마지막으로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궁전.

“이게 천상이라고?”

말 그대로 구름 위의 궁전. 김창은 사람들이 천상이라고 하면 으레 상상하는 모습이 그대로 구현된 것을 보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이걸 보니 우주 속에 갇혀 있던 원래 세상의 신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천상인데 이토록 환경이 다를 수가 있나?

“멀고 먼 별의 바닷속에는 여러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지. 네 세상엔 승천할 자가 있지만 이곳엔 없는 것처럼. 천상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지도 못한 천상의 모습에 놀라고 있는 김창을 마중 나온 것은 후광이 번쩍이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인지 아랫도리만 입고 상반신은 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김창이 그걸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웃통은 왜 까고 있는 거냐.”

“왜, 마음에 안 드나? 인간의 모습을 한 번 흉내 낸 것인데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모습으로 바꾸도록 하지.”

“세상에 웃통 까고 다니는 인간이 어디 있어? 옷 입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의가 생겨났다. 김창은 덕분에 보기 한결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네가 신검이냐?”

“그래. 가자. 내 신께서 널 기다리신다.”

김창은 신검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하늘을 날던 새나 구름 위를 거닐던 짐승, 그리고 천사들까지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본래 같았으면 뭘 보냐고 퉁명스럽게 말했을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에 와서 그럴 순 없었으므로 얌전히 신검의 뒤를 따라갔다.

“이곳이다.”

김창이 있던 세상의 신들은 아무것도 없는 우주 속에서 궁상이나 떨고 있는데, 이쪽 세상의 신들은 거대한 궁전 안에 마련된 자신만의 거처가 있는 모양이었다.

달과 처녀의 신이 머무는 곳답게 신검이 안내한 곳은 은은한 청색과 새하얀 달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지만 이곳의 주인이 실은 순결한 처녀 외엔 뽑을 수 없는 신검을 창조한 미친놈이라는 걸 생각하니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나아가라, 다른 세상의 반신. 내 신께서 저기 있으시다.”

신검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길을 따라갔더니 과연 그곳엔 새하얀 달빛을 반짝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만 봐도 이 자가 달과 처녀의 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멀고 먼 별의 바다를 건너온 반신이로구나.”

구슬이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김창은 달과 처녀의 신을 보고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던 아르테미스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여성이 달과 순결을 관장하다니, 이 세상을 만든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참 창의력이 없군.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달과 처녀의 신이 말했다.

“나는 달과 처녀의 신인 디아나다. 먼저 이 세상을 지켜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겠다. 네 활약은 천상의 신들이 보기에도 과연 인상적이었노라.”

내 알기로 아르테미스와 동일시되는 로마 신화의 여신일 텐데. 이 세상을 만든 사람은 정말 창의력이 없군.

김창이 또 그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 잘난 신 양반들은 다 어디 가고 너 혼자만 나한테 고맙다고 말하는 거냐.”

디아나는 여신으로서 이토록 건방진 인간을 본 적이 없었을 터다. 그녀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각자 자기 거처에 숨어 우리의 대화를 훔쳐보고 있겠지.”

“신이란 양반들이 왜 그러고 있는 거냐? 다들 낯을 많이 가리나?”

“너 때문이다, 반신. 너는 반쪽짜리 신이지만 내면의 신성은 진짜 신을 상회할 만큼 엄청나지.”

그러니까 내가 무서워서 다 숨었다는 말인가? 내가 뭘 어쨌다고? 김창이 불만스럽게 입을 우물거리자 디아나가 다시 말했다.

“······별의 바닷속에는 여러 세상이 있고 또 그 숫자만큼의 신이 있다. 그리고 각 세상의 신들은 서로 다른 역량을 가졌지. 미리 말하마, 반신.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위대한 신이 아니야.”

“그래, 그런 것 같더군. 너희가 정말 잘났으면 그 마왕이라는 놈이 깝치고 다니지 못하게 진작 처리했을 거 아니냐.”

“······우리가 마왕을 처리하지 못한 건 신으로서의 제약 때문에 지상에 충분히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상에서라면 마왕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지만 지상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소리지.”

“도와줄 거면 확실히 도와주던가, 별 이상한 제약이 걸린 신검 하나 덜렁 던져두고 나 몰라라 했던 놈이 말이 많군.”

“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지상에 충분히 개입할 수 없다. 신력이 담긴 무구를 지상에 내려주려면 특정한 제약이 필요했노라.”

“아, 그러쇼.”

김창이 별 관심 없다는 듯 대충 대답하자 디아나가 잠깐 침묵했다.

“···어쨌건 수고했다.”

“그래서 그 말 하려고 날 여기까지 부른 거냐?”

“아니, 할 말이라면 더 남았다.”

“뭔데.”

“집에 가라, 반신.”

뜬금없는 소리에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뭐?”

“집에 가라고. 네가 있던 세상으로 가든지 아니면 용사들을 불러내던 그 세상으로 가든지, 어디든 얼른 가버리란 말이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이건 너무 박한 대접 아닌가?”

“반신, 나는 네가 원래 있던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알고 있다. 정말 도살자가 따로 없을 정도로 쉬지 않고 뭔가를 죽이고 다녔더군. 그래서 왜 그랬나 하고 봤더니, 세상에? 신성을 모으겠답시고 대악마고 용이고 죄 죽이고 다녔더구나.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미 승천을 위한 충분한 신성을 모았음에도 아직 살육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

디아나가 정말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김창 역시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게임에서 엔딩 볼 조건 다 갖춰졌다고 바로 엔딩 보러 가야 하나? 즐길 컨텐츠가 남아 있으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래야 할 거 아니야, 쯧.”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천상의 신들이 왜 다 숨은 줄 아느냐? 네가 신성에 미쳐 우릴 다 썰어 죽일까 봐 겁이 나서 그런 것이다.”

이게 사람을 무슨 개백정으로 아네? 김창이 화가 나서 구시렁댔다.

“그냥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런 식으로만 말했어도 아무 말 안 하고 갔을 텐데 뭔 말이 그리 많아? 이거 괘씸해서 그냥은 못 가겠네. 안 되겠다, 대표로 누구 하나 상 치르자. 한 명만 죽으면 된다.”

김창이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시자 디아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제발 돌아가 주세요.”

“안 그래도 갈 거다. 가서 손 봐줄 놈들이 좀 많아.”

디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알기로 이 무시무시한 반신은 저쪽 세상에서 충분히 많은 적을 죽인 줄로 아는데 아직도 죽일 놈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불쌍한······.

“문 열어.”

“넵.”

디아나가 얼른 차원문을 열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김창이 원래 있던 세상이 맞는 듯했다.

이번엔 또 이상한 세상으로 쫓겨나는 일은 없겠군. 김창이 차원문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 너머를 쳐다보며 말했다.

“엘리아나랑 세롬한테 나 집에 간다고 좀 전해줘라. 특히 세롬 그 양반은 오해해서 미안하다고도 좀 전해주고. 아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차원문 열어달라고 할 필요도 없었을······.”

뻥!

갑작스럽게 엉덩이에서 통증이 느껴지더니 김창의 몸이 기우뚱했다. 균형을 다시 잡기도 전에 차원문이 몸을 빨아들였고 등 뒤에서 디아나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곳을 떠나라, 반신!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김창은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괜히 깝죽거리는 디아나를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다른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신 사냥을 하고 다니는 것도 재밌겠는데.”

그 왜 요즘은 오픈 월드 게임이 대세라던가? 확실히 컨텐츠가 다 떨어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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