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80화 (180/200)

180

김창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잘 알고 있다. 이젠 세상에 둘만 남은 승천할 자 중에서 신좌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 존재가 바로 자신이다.

인간보다 몇 배는 강하다는 요정 기수조차 그의 상대가 안 되고 대륙 전역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원탁의 강자 역시 그를 이길 수 없다.

심지어 승천할 자인 케이네스조차 김창을 이길 자신이 없어 다른 세상으로 추방해버렸으니 이제 이 땅에 그의 상대가 될 만한 자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존재가 전장에 나타난다면 그 순간부터 싸움은 끝이 난 셈이다. 대체 그 누가 반신을 상대할 것인가? 케이네스가 직접 나서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가자.”

김창이 뚜벅뚜벅 걸어 지휘 막사를 나가자 만네르헤임이 그 뒤를 따랐다. 바깥에서 참모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브랜트가 당당하게 막사를 나서는 김창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지휘관이 저 남자에게 굽실거리고 있는 듯한······.

“출진이다. 십 분 내로 장비 점검 마칠 수 있도록!”

만네르헤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참모들이 당황했다. 출진한다고? 아직 작전 회의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토록 갑자기?

브랜트 역시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감히 목소리를 내진 않았다. 대신 고참 참모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했다.

“갑자기 출진하다니요? 아직 작전 회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설마 이대로 병사들을 버려가며 억지로 전선을 뚫으려는 것이라면 전 반대입니다.”

“작전 회의라면 끝났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주지. 이제부턴 작전 회의는 없을 거다.”

그건 또 뭔? 참모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당황스러워 하는 가운데 아까 그 참모가 다시 말했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합니다. 지휘관, 저는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설마 이 전쟁에 흥미가 떨어져서 멋대로 행동하는 거라면······.”

“흠, 난 지금까지 열과 성을 다해 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생각하는데. 내 태도가 그리 보였다면 정말 애석한 일이군.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다고 했나? 내 설명을 들으면 자네도 바로 이해할 거야.”

만네르헤임이 슬며시 김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친구에 대해서 알고 있나?”

“손 내려.”

“······이 남자의 이름은 김창이다. 원탁 제일의 무력이지.”

만네르헤임이 설명하자 참모의 눈이 커졌다.

“김창이라면 돈만 주면 뭐든 죽인다는 도살자 아닙니까? 소문으로는 돈 주면 신도 죽인다고 하던······. 그런데 그 남자는 케이네스 때문에 다른 세상으로 추방된 줄 아는데요?”

대체 누가 저런 악의적인 소문을 냈나? 돈만 주면 뭐든 죽이는 건 맞지만 도살자는 아닌데. 김창이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왔다.”

“다른 세상에서?”

“그래.”

“이럴 수가······. 기어코 다른 세상까지 정복하고 돌아온 모양이야.”

얜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 참모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이 남자가 있다면 작전 따윈 필요 없겠군요.”

“그래, 그러니 가서 병사들에게 출진 소식이나 알리게.”

“알겠습니다. 자, 그럼 다들 움직여! 출진이다!”

참모들이 흩어지자 남은 건 브랜트 하나였다. 김창을 그저 정신 나간 탈영병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그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마치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던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

“죄송할 것 없다. 난 남들 열심히 싸우고 있을 때 다른 세상에 있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탈영병이 맞지. 넌 독전관으로서 네 역할을 다했을 뿐이야. 그러니 그만 떨고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브랜트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한 뒤에 호다닥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던 김창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대체 누가 나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낸 거지?”

“글쎄, 악의적인지 아닌지는 자기 행보를 한 번만 돌아보면 알 수 있을 텐데······.”

김창이 노려보자 만네르헤임이 입을 다물었다.

“요즘 많이 까부는군.”

“크흠, 이젠 출진해야 할 것 같은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만네르헤임이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고 곧 군단을 이끌고 출진했다. 김창은 행렬의 선두에 서서 전장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 멀리 새까만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마치 벌레떼가 우글거리는 듯 보였다.

병사들은 다시금 마주한 괴물 무리를 보고서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지금껏 몇 번이고 저 거대한 무리를 뚫지 못했고 그때마다 전우를 잃어가며 후퇴해야 했다.

그럼 이번에도 그럴 것인가? 이번 공격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짓거리가 될 것인가?

아니었다.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꽈르릉!

만네르헤임이 전투 개시를 알리기도 전에 괴물 무리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그 위력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살 타는 냄새가 날아올 정도였다.

병사들은 순간적으로 저 벼락을 신벌이라고 생각했다. 사악한 존재를 벌하기 위해 천상의 신이 떨어트린 징벌.

그러나 그럴 리는 없었다. 신은 지금껏 어떠한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았고 악을 몰아내 주지도 않았다.

저 벼락은 오직 한 남자의 힘일 뿐이다. 지상에선 더는 적수가 없어 이제는 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남자.

그는 지금 지상의 반신으로서 그 강력한 힘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키에에엑!”

갑작스럽게 떨어진 벼락 때문에 잠깐 움찔했던 괴물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괴성을 지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단단히 쥐고서 달려오는 적을 향해 내밀었다. 곧 충돌이 일어날 터다.

화르륵!

갑작스럽게 거대한 불길이 일어나 벽을 만들었다. 멋도 모르고 병사들을 향해 달려오던 괴물들은 불길 속으로 제 몸을 던지는 꼴이 되고 말았다.

“끼엑!”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고통을 모르는 건 아니다. 특히나 불에 타는 고통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한 법.

불꽃의 벽을 억지로 통과한 괴물들은 털이 다 타버리고 가죽 아래까지 전부 익어버려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끔찍하다면 끔찍하고 화끈하다면 화끈한 그 장면을 보고서 병사들의 고개는 저절로 김창을 향해 돌아갔다.

반신으로서 벼락을 부리고 또한 용의 심장을 취한 자로서 불꽃을 부리는 존재.

어쩌면 혼자서 이 전쟁을 끝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자가 바로 김창이다.

“다들 뭘 멍하니 있나!”

김창이 가진 압도적인 힘에 경외감을 느끼고 있던 병사들이 만네르헤임의 목소리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다들 싸워라! 무기를 들고 싸워! 우리의 적을 무찌르고 이 세상을 지키는 거다!”

만네르헤임의 외침은 마법의 힘 덕분에 바로 곁에서 외치는 듯 선명하게 들렸다.

“싸워라! 그리고 이겨라!”

전투의 함성은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는 효과가 있다. 지금 지휘관이 한때 이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려 하던 대악마였다는 게 조금 우습긴 하지만 뭐 어떤가?

대악마도 이 세상이 멸망하길 바라진 않을 텐데. 지금은 모두가 케이네스라는 거대한 악과 맞서 싸워야 할 때였다.

“키아악!”

괴물들은 불꽃의 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방금 수많은 괴물들이 겁도 없이 돌격했다가 타죽는 걸 봤음에도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타죽은 괴물을 발판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르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은 결국 불꽃의 벽을 뚫고 넘어왔고 병사들과 마주했다.

“돌―격!”

이제는 싸워야 한다. 아무리 김창이 강하다 하더라도 저 많은 숫자를 전부 해치우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리고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

괴물들 사이에서 그림자를 닮은 존재가 나타났다. 그는 끔찍하게 생긴 다른 괴물들과 다르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림자답게 이목구비 따위는 없었다.

입이 없는 탓에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는 김창을 보고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덤벼.”

하지만 그가 말을 할 수 있든 없든 김창으로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인데 말을 하는 게 뭐가 중요한가?

그가 칼을 겨누자 그림자 인간도 오른손을 들었다. 뿌드득 소리가 나더니 오른손이 칼날로 변하는 게 보였다.

“새끼, 겁도 없이 나한테 칼로 덤벼?”

김창이 픽 웃자 그림자 인간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덩치가 그다지 크지 않은데도 그 몸에서 나오는 힘은 폭발적이었다.

그림자 인간이 오른팔을 휘두르는 걸 칼로 막아내니 칼날이 징 울릴 정도의 위력이 느껴졌다.

과연 이 정도 힘이라면 병사들이 당해내지 못할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속도도 몹시 빨라서 칼 몇 번 맞대고 나면 목숨이 날아갈 듯했다.

김창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림자 인간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강력한 힘, 빠른 속도, 거기에 싸우면서 성장하는 학습 능력까지.

“만네르헤임 이 씹새, 이 정도는 그냥 자기 선에서 처리하지.”

하지만 그래봤자 지성도 없는 괴물 따위.

김창은 그림자 인간의 칼을 몇 번 받아내다가 갑작스레 공세로 전환했다. 지금껏 쉴 새 없이 공격을 날리고 있던 그림자 인간이 당황해서 몸을 움찔하는 게 보였다.

“별것도 아닌 놈이구만.”

김창의 칼날에서 잿빛이 반짝였다. 칼날에 오러의 힘이 더해지자 날카로움은 배가 됐고 그림자 인간의 오른팔에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저 몸이 단단하다고 해도 오러를 받아낼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창은 흠 소리를 내며 그림자 인간을 가지고 놀다가 칼을 힘껏 휘둘렀다.

“······!”

그림자 인간이 공격을 받아내다가 자세가 흐트러졌다. 김창은 크게 열린 가슴팍을 발로 걷어차서 그림자 인간을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리곤 칼을 역수로 쥐고서 그림자 인간의 몸을 발로 단단히 눌렀다.

“너 같은 놈도 심장이 있을까? 굳이 인간 모습을 한 걸 보면 있겠지?”

대답은 없었다. 그림자 인간은 뭔가 말하려는 듯 얼굴을 들썩였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푹! 김창이 내지른 칼이 그림자 인간의 몸을 부드럽게 관통했다. 뭍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몸을 퍼덕거리던 그림자 인간이 곧 잠잠해졌다.

“역시나 신성은 안 주는군.”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다지 아쉽진 않았다. 김창은 그림자 인간의 몸에 박힌 칼을 뽑고서 전장을 둘러봤다.

무리의 대장이 죽었는데도 괴물들은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성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대장의 복수를 하려고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까 벼락과 불꽃으로 상당히 숫자를 줄였는데도 적들의 수는 많이 남아 있었다. 김창이 얼른 가서 한 손 보태려고 할 때였다.

“음?”

갑작스럽게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몸이 두둥실 뜨는 듯한 느낌과 함께 느껴지는 이유 모를 고양감.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환한 빛. 마치 어디론가 또 끌려가는 듯한······.

“아니, 방금 돌아왔는데 또 뭐야?”

갑작스레 승천이라도 하는 건가? 만네르헤임의 소원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나? 김창이 당황하며 하늘을 쳐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