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81화 (181/200)

181

* * *

눈을 떴을 땐 아는 천장이었다.

“전에는 모르는 천장이었는데 그래도 이번엔 아는 천장이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혹시나 또 생전 가본 적 없는 다른 세상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번엔 적어도 아는 세상이긴 하니까.

“심지어 아는 사람까지 있어.”

“난 사람이 아닌데.”

멋쩍게 대답하는 남자를 보면서 김창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늘 하던 버릇대로 칼을 뽑으려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눈을 부릅뜨며 남자를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안 훔쳤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거 엄청난 명검도 아니고 그냥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칼인 거 뻔히 보이는데 훔칠 이유가 없잖아.”

“그럼 왜 그랬는데?”

“여기 끌려온 네가 갑자기 칼부림이라도 할까 봐······.”

그건 확실히 타당한 이유다. 김창 자신도 인정할 만큼.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날 또 왜 불러낸 거냐, 모르스.”

모르스, 죽음의 신. 한때 필멸자였으나 스스로 신성을 거머쥐고 천상에 오른 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이곳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 김창. 케이네스라고 했던가? 그 친구가 갑작스레 널 다른 세상으로 쫓아 보냈을 땐 솔직히 깜짝 놀랐어.”

“깜짝 놀랐으면 좀 도와주지 그랬냐. 내가 연고도 없는 곳에 떨어져서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글쎄. 내가 자세한 건 몰라도 네가 별로 고생했을 것 같진 않은데.”

왜 이리 까불지? 김창이 모르스를 노려보자 그가 말했다.

“이런······. 그 세상에서 또 신성을 얻은 모양이군. 심지어 이 신성은······. 우리 세상의 것과 달라. 하기야 다른 세상에도 신은 있을 테니 신성의 결이 다르다고 해도 놀라울 건 없지만······.”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서 날 또 왜 불러낸 거냐? 혹시나 날 또 다른 세상으로 추방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여튼 세상엔 비겁한 놈들이 너무 많아. 질 것 같으면 싸움을 걸지 말던가, 이길 자신이 없으니 사람을 쫓아내는 걸로 대충 문제를 해결하려 한단 말이야.”

김창은 이미 지옥으로 한 번, 그리고 다른 세상으로 한 번 추방된 적이 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다들 이리도 기를 쓰고 쫓아내려 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다지 재밌는 일은 아니다.

김창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걸 보던 모르스가 말했다.

“왜 그랬는지야 널 보면 단번에 이해가 갈 것 같은데······. 흠, 어쨌건 난 널 다른 세상으로 추방하지 않아. 애초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저번에도 말한 것 같은데 넌 내 뒤를 이어서 죽음의 신이 되어야 해. 너만큼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널 왜 쫓아내겠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신이라는 건 그리 괜찮은 직업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우주 속에 덩그러니 남겨져 하염없이 지상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니까.

때문에 죽음의 신 모르스는 이 지겨운 의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어떤 식으로? 김창을 자신의 후임으로 세우는 방법으로.

그러니 그는 김창을 다른 세상으로 쫓아낼 이유가 없다.

“내가 다른 세상의 천상에 가보니 거긴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상의 모습 그 자체던데. 멋있는 궁전도 있고 말이야.”

“···이직 가능한가? 난 경력직인데.”

되겠냐? 김창이 툭 쏘아붙이고는 웃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너도 곧 이 개 같은 곳에서 해방될 테니.”

“뭔 소리야?”

“내가 전에 말했잖아. 그 진짜 신이라는 양반을 죽이겠다고. 그럼 뭐가 되긴 되겠지.”

“······.”

확실히 그럼 신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긴 할 터다. 문제는 진짜 신을 죽이는 순간 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모르스는 김창을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애초에 말린다고 해서 말릴 수나 있나?

“그런데 아직 날 불러낸 용건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설마 너무 심심해서 나랑 수다나 떨려고 그런 건 아닐 테고.”

김창의 목소리에 모르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래, 당연히 아니지. 내가 널 부른 건 부탁할 일이 있어서야.”

“부탁할 일?”

모르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케이네스가 뭘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나?”

“그거야 알다마다. 승천하겠답시고 전쟁 일으켰잖아.”

“그래, 전쟁을 일으켰지. 그것도 아주 거대한 전쟁을. 그게 문제야.”

김창이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게 왜 문제지? 죽음의 신 입장에선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 나가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의사 입장에서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줄줄이 죽어 나가면 기뻐해야 하나? 내가 그걸 왜 기뻐해야 해?”

“넌 의사가 아니라 죽음의 신이잖아.”

“신이라는 걸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쨌건 케이네스가 벌이고 있는 짓거리는 나로서 전혀 기쁘지 않은 일이야. 왜인 줄 아나?”

“왜?”

모르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녀석의 목적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말살하는 것이니까. 놈은 벌레 하나, 그리고 잡초 하나까지 남겨두지 않고 전부 죽여 없애려는 생각이야.”

“음, 그거 대단하군. 나조차도 그리 많은 생명을 죽이려 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럼 나보다는 오히려 그 녀석이 죽음의 신 자리에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

“···이봐, 김창. 나는 지금 농담이나 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야. 케이네스가 하는 짓거리를 보고서 모든 신이 기겁하고 있다. 천상의 신들이, 개중에는 이미 미쳐버린 놈들도 있지만, 그래도 신의 대부분이 어찌어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뭔지 아나?”

“몰라.”

“지상이 있기 때문이야. 우린 지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아직 필멸자였던 시절을 떠올리고 추억하지. 그리고 그 기억을 곱씹으며 이성을 억지로 붙잡아. 그런데 지상이 사라지면? 우린 아무것도 없는 이 광활한 공간 속의 미아로서 영겁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더 끔찍한 건 뭔지 아나? 승천하여 이곳으로 올라온 케이네스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거지!”

확실히 그건 끔찍한 일이다. 천상의 신들에게 그나마 낙이 있다면 지상을 관찰하는 것일 텐데 그것조차 없어진다면?

방에 갇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TV를 보는 것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TV를 뺏어간 것과 같은 일이다.

김창은 쯧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 그 친구 그냥 승천시켜주지 그랬냐. 천상으로 불러서 네 자리 물려줬으면 될 일 아니냐고.”

“······이봐, 난 그냥 일개 신일 뿐이야. 내 마음대로 승천을 시켜줄 권한 따위는 없어. 그리고 케이네스가 승천하지 못한 건 정말로 신성이 모자라서 그런 것뿐이고. 제기랄, 생각해보면 그것도 다 네 탓이군.”

“내가 또 뭘?”

“네가 대악마라도 하나 남겨뒀으면 저딴 짓거리는 안 했을 것 아니야?”

“그게 왜 내 탓이냐? 그런 식으로 따지면 그 새끼도 내가 죽일 용을 하나도 안 남겨놨으니까 똑같은 거 아니야?”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이 녀석은 죄도 없이 죽어 나간 새끼 용들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인가?

모르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놈은 승천하면 죽음의 신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겠는데······.”

“뭘 또 중얼거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김창, 내 간곡히 부탁하지. 케이네스를 죽여줘. 그 미치광이 놈이 헛짓거리를 그만하게 막아달라고. 네 친구들, 그러니까 원탁의 사람들만으로는 그를 막기에 역부족이야.”

그 말에 김창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럴 리가. 걔네가 나보다 좆밥인 건 맞는데 그래도 뭣도 없는 개뼈다귀는 아니야. 원탁의 랭커들 몰려가서 다구리 치면 케이네스 정도는 잡을걸.”

한석구가 승천할 자인 하이나보다 약하긴 하지만 그건 하이나가 강한 것일 뿐 한석구가 약한 게 아니다.

게다가 원탁에는 한석구보다 더 강한 김용걸이 있으며 강력한 성기사인 정복자까지 있다.

승천할 자가 여럿이라면 위험하겠지만 겨우 한 명뿐이라면 원탁의 랭커들이 숫자에서 압도할 수 있으리라.

“물론 너희 이방인들이 강한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케이네스는 옛날과 달라. 그가 이형의 괴물들을 다루고 있다는 건 너도 알겠지?”

김창은 만네르헤임이 상대하고 있던 괴물 무리를 떠올렸다. 이 세상에도 괴물은 많지만 그건 확실히 이쪽에선 본 적 없는 생김새의 괴물이었다.

“그래.”

“그리고 다른 세상으로 추방된 적이 있으니 잘 알겠지만, 이곳엔 여러 세상이 있다는 것도 잘 알 테고?”

“알지.”

“그럼 이해가 빠르겠군. 네가 쫓겨났던 세상의 신들은 이런 일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지만 세상엔 다른 차원을 침략하길 원하는 신들도 있어. 케이네스는 그런 세상의 신들과 협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군대를 빌려오고 힘을 받아 침략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고 있지. 그러니 너와 제국에서 싸웠던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는 거야.”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마지막으로 남은 승천할 자가 요안니스보다 약해서 몹시 아쉬웠던 참인데 그보다 더 강해졌다니?

“참 기특한 녀석이야. 사람이 뭘 하면 기뻐할지 잘 알고 있어.”

“이 정신 나간 놈······. 보통은 적이 강해졌다고 하면 긴장해야 정상 아닌가? 뭘 기뻐하고 있어?”

“시끄럽고, 할 말은 그게 끝이냐? 다음부터는 나 직접 부르지 말고 신탁을 내리든지 아니면 사람 보내서 말 전해라. 어디 건방지게 사람 마음대로 부르고 있어? 나 바빠, 이 녀석아.”

죽음의 신한테 이게 과연 할 소리인가? 모르스가 죽음의 신이라는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그리 성세가 강한 신은 아니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인데 이런 태도가 맞는 건가?

나름 반신이라고 대우를 해줬더니 이건 너무 건방지지 않나. 나 역시 한때 승천할 자였던 몸이니 이 건방진 후배에게 매운맛을 좀 보여줘야······.

“왜, 드잡이질이라도 한 번 하려고? 그거 나쁘지 않지. 덤벼, 죽기 전까지 때려주지.”

모르스가 김창의 살벌한 눈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아주 죽여버리는 것도 아니고 죽기 전까지 때리겠다는 게 몹시 악질이다.

그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내가 너와 싸워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그러겠나? 어쨌건 케이네스에 대해선 잘 부탁하지.”

“입 다물고 문이나 열어.”

“······.”

모르스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그는 문을 통과하는 김창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야.”

“···어?”

갑작스럽게 뒤를 돌아보는 김창 때문에 모르스가 재빨리 주먹을 등 뒤로 숨겼다. 그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그러지?”

“케이네스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잘 해결해줄 테니까.”

“아, 그것참 고마운 소리로군.”

“내가 인마, 사람 하루 이틀 죽여본 게 아니야. 나만 믿어.”

뭘 또 저런 걸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나? 모르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