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88화 (188/200)

188

* * *

김창은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어디선가 익숙한 마력이 느껴진다 했더니 용 위에서 꽥꽥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김용걸이 보였다.

저 미친놈. 바르토시스의 시체를 탐낼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저런 짓을 하려고 그랬나?

김창이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티샬레가 으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저건 또 뭔가요! 설마 적은 아니겠지요?”

갑자기 등 뒤에서 용 군단이 나타난다면 누구나 당황하게 될 것이다. 김창은 티샬레가 당황하지 않도록 얼른 진실을 설명해주었다.

“저건 김용걸이 데리고 온 거야. 용걸이 알지? 원탁의 흑마법사 놈.”

“알고는 있는데 설마 저런 일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저만한 숫자의 용을 되살리는 건 사령술의 대가인 리치조차 어려운 일일 텐데······.”

김용걸은 흑마법사고 사령술은 겸사겸사 익힌 것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저건 말도 안 되는 성과다.

대체 뭔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 상황에선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 쓸어버려!”

바르토시스를 제외한 나머지 용들은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와이번과 비슷할 정도로 덩치가 작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림자 괴물보다는 훨씬 컸기 때문에 그들이 하늘을 날다가 급강하하며 발톱을 휘두를 때마다 그림자 괴물 수십 마리가 몸이 찢겨 나갔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있던 그림자 괴물들도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용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용이라면 지상을 스치듯 날 때마다 들어오는 공격에 비명을 질렀을 테지만 지금 여기 있는 건 이미 한참 전에 죽은 용들이었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오직 김용걸의 명령에만 따라 그림자 괴물들을 학살했다.

“으하하하! 나는 드래곤 마스터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인지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던 김용걸이 아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김창은 처음에 자신을 발견하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김용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한 바퀴 원을 그렸는데 마치 구역을 지정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뭔가 느낌이 좀 이상한걸?”

김창은 티샬레의 요정 군대와 함께 달리면서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김용걸 저 미치광이가 뭔가 큰일을 하나 터트릴 것 같은 그런 기분······.

“드래곤 브레스!”

“크―아―아―아!”

불길한 생각은 항상 잘 들어맞는 법인데 이번 역시 그랬다. 바르토시스가 입을 쩍 벌리니 그 안에서 이글거리는 거대한 마력이 보였다.

김창이 욕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용의 아가리에서도 검은색 마력이 발사됐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꽃 숨결은 아니었으나 그것만큼 강력한 일격인 건 확실했다.

마치 SF 영화에 나오는 레이저 병기처럼 강력한 마력 광선이 일직선으로 움직이며 그림자 괴물들을 소멸시키는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저 공격이 요정 군대가 있는 쪽을 향하지 않았다면 김창도 순수하게 감탄했으리라.

“달―려!”

티샬레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지르자 요정 군대가 다급히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티샬레가 외치기 전부터 마력 광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재빨리 도망친 게 도움이 됐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이쪽까지 공격할 생각은 없던 것인지, 거침없이 질주하던 마력 광선이 요정 군대까지 소멸시키는 일은 없었다.

티샬레와 요정 군대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사이에 김창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흔들며 소리쳤다.

“야, 김용걸! 이 정신 나간 자식아! 우리까지 다 죽여버릴 셈이냐!”

미친놈처럼 껄껄 웃고 있던 김용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곧 김창을 발견한 그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김창! 이 개자식아! 왜 이리 늦게 왔어? 네가 없으니까 케이네스인가 뭔가 하는 놈이 자꾸 설치잖아!”

만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저건가? 사람이 다른 세상으로 쫓겨났다가 이제 돌아왔는데 걱정의 말은 해주지 못할망정 참으로 괘씸한 놈이다.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너 때문에 우리 다 죽을 뻔한 거 안 보여?”

“그래서 누가 죽었냐? 내가 병신도 아니고 아군까지 날려버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막말로 좀 죽으면 어때?”

죽으면 어때? 저게 돌았나? 김창은 물론이고 티샬레까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김용걸이 당당히 외쳤다.

“죽으면 되살려줄게! 나만 믿어!”

저걸 말이라고 하나. 티샬레가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보내자 김용걸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쨌건 너희는 케이네스를 죽이러 가는 거지? 가라! 내가 위에서 길을 뚫어줄 테니까!”

뭐가 어찌 됐든 김용걸의 실력과 그가 이끄는 용 군단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진격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티샬레가 요정 군대에게 진격을 명령했다.

“쓸어버려!”

하늘에서는 용 군단이, 지상에서는 요정 군대가 활약하며 그림자 괴물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들은 착실히 전진에 성공하여 이제는 제도 중심부에 바싹 다가섰다.

“크으으윽······.”

물론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런 피해가 없던 건 아니었다. 그림자 괴물은 강력한 적이었고 숫자 역시 많았다.

그들은 다수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하늘을 나는 용들을 우선적으로 공격해 하나둘씩 격추에 성공했다.

본래 김용걸이 이끌고 왔던 용 군단은 바르토시스를 제외하고 총 스무 마리.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서 그 절반인 열 마리가 완전한 죽음을 맞았다.

“끄악! 내 용 군단이!”

용 한 마리가 추락할 때마다 김용걸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선 그들의 희생이 필수적이었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황궁이다! 다들 힘을 내라!”

티샬레의 외침에 요정 군대가 함성으로 화답했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그림자 괴물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었고 상당히 많은 공적을 올렸다.

쉴 새 없이 그림자 괴물을 쏟아내던 차원문은 원탁의 랭커들이 공격하고 있으니 이쪽까지 추가 병력이 들어올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황궁까지 밀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거기서 김창이 케이네스를 죽이면 모든 게 끝이 난다.

끝이 멀지 않았다. 그 사실에 요정 군대는 힘을 낼 수 있었다.

“황궁이다! 황궁이야!”

누가 외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외침에 모두가 같은 곳을 보았다. 황궁의 문은 침입자를 거부하는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는데 어쩌면 저 안에서 농성이라도 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궁의 구조는 농성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고 애초에 버틴다고 이기는 싸움도 아닌데 케이네스도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림자 괴물들을 썰어버리며 달려 나간 티샬레가 황궁의 문을 활짝 열 때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버러지들아.”

황궁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티샬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기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케이네스가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다. 애초에 케이네스는 황궁에서 김창을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그가 여기 있는 건 상정 범위 내의 일이다.

문제는 그 너머다. 케이네스의 등 뒤로 늘어선 그림자 괴물들.

크다. 지금껏 봤던 그림자 괴물은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크다. 그리고 많다. 저만한 덩치를 가진 그림자 괴물이라면 분명 정예 중의 정예일 텐데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

요정 군대는 여기까지 오면서 병력은 물론이고 체력까지 상당히 소모했다. 이 상황에서 저만한 적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내 한 몸 불살라 빛 밝히는 거목처럼 살리라······.”

티샬레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중얼거리자 부관 요정이 말을 받았다.

“······그리하면 영원한 영광 있으리.”

요정 군대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었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네스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머저리 같은 놈들. 개죽음을 당하려고 애를 쓰는군.”

“···글쎄요. 개죽음을 당하는 게 누구인지는 한 번 해봐야 알 것 같은데.”

“안 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너희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케이네스의 단정에 티샬레도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케이네스가 반사적으로 김창을 쳐다봤다. 그는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가만히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오싹하게 느껴졌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림자 괴물로 변해버린 자신보다 훨씬 더 괴물 같은 느낌이었다.

케이네스는 입술을 깨물려다가 자신에게 이제 입술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그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오른손을 칼날로 변환시켰다.

“끝을 보자. 이 지긋지긋한 악연에 종지부를 찍어보자고.”

김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하는 건가? 케이네스가 그를 노려보자 잠시 뒤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라면 나보다 먼저 너한테 용건이 있는 선객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케이네스가 그게 뭔 소리냐는 듯 되물었지만 김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놈. 자기만 알아먹을 소리를 지껄이곤 또 입을 다물다니.

자연스럽게 짜증이 치밀었지만 케이네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로 했다. 그가 의식적으로 침착을 유지하려 하며 한 걸음 전진할 때였다.

“어어? 이거 왜 이래?”

당황한 듯한 멍청한 목소리. 그 소리에 반응해 케이네스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이쪽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강하하고 있는 용들이었다.

“케―이―네―스!”

그건 바르토시스의 목소리였다. 이게 왜 멋대로 말을 하지? 김용걸이 당황했으나 이유를 알려줄 사람은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케이네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용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곧 하늘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이미 한 번 죽었으면서 또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오냐, 와라! 다시 죽여줄 테니!”

여기까지 오면서 남은 새끼 용은 총 다섯 마리. 그들이 순서대로 케이네스를 향해 돌격했다.

저 육중한 몸을 무기로 삼아 위에서 깔아뭉개려는 걸까? 케이네스는 그리 생각했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케이네스! 이건 네가 죽인 새끼 용들의 복수다!”

새끼 용들의 몸이 빛나고 있다. 마치 저 안에 거대한 마력이라도 실은 것처럼. 이건 칼로 쳐낼 게 아니다. 오히려 도망쳐야······.

“이런······.”

콰아아앙!

케이네스가 도망치기 전에 새끼 용들의 몸이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희게 물들고 귀가 먹먹해졌다.

거대한 폭발이 만들어낸 먼지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나서 케이네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방패로 삼아 몸을 보호했는데 그 주변에 질척하게 변해버린 그림자 괴물의 시체가 한가득하였다.

“이 미친놈들, 왜 갑자기 자폭하고 지랄······.”

김용걸이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자신이 타고 있는 바르토시스의 몸도 빛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씨발!”

김용걸이 재빨리 아래로 뛰어내리자 바르토시스는 그대로 케이네스를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이건 나 바르토시스의 복수다!”

“너는 내가 안 죽였다, 이 멍청한 도마뱀 대가리야!”

케이네스가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그림자 괴물의 살점을 신경질적으로 떼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