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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94화 (1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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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가만히 생각했다. 요즘 들어 이상한 곳으로 쫓겨나는 일이 너무 잦지 않나?

사람이 무슨 쓰레기도 아니고 어째 만나는 놈마다 자신을 다른 곳에 휙 버리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을 벌써 세 번이나 당하면 우울함이 느껴지는 법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우울함에 빠져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김창은 지난 두 번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갔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추방이라고 하지만 딱히 엉엉 울고 있을 만한 일은 아니다.

늘 그랬듯이 자신을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을 만한 놈을 찾아서 칼을 들이밀면 된다.

“그래서 여긴 어디냐?”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건 온통 흰색뿐이다. 사람을 문이 없는 새하얀 방에 가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미쳐버린다고 하던데 자신은 멀쩡한 걸 보니 아무래도 근거 없는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얼마 전까진 사람이었어도 지금은 신이 되어서 정신력이 강해진 걸지도 모르는 일이고.

가만 생각해보면 신이란 작자들은 길고 긴 시간 동안 우주에 갇혀 있었지만 제정신을 유지했지 않은가?

물론 모르스는 미치려 해도 미칠 수가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댁은 또 누구쇼?”

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흰색뿐인 공간이라고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던 건 아니었다. 김창의 정면에는 누가 봐도 뭔가 있어 보이게 생긴 생물이 하나 있었다.

사실 그걸 생물이라고 불러도 될지 조심스럽긴 했다. 왜냐하면 그 생김새가 워낙 개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면에 보이는 건 거대한 태아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뒤에 덕지덕지 붙은 건 여러 기계 부품들이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태아의 얼굴만 해도 어지간한 거인만큼 커서 상당히 기괴한데 그 뒤에 붙은 기계 부품들은 이제 과연 생물이 맞긴 한 거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들었다.

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는데 기계 부품들은 저 혼자 바쁘게 들썩였다가 빛이 났다가 하길 반복했다.

여긴 혹시 SF 세계관인가? 어쩌면 사이버펑크와 판타지가 뒤섞인 세계일지도 모른다.

김창은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가 신이로군. 모르스가 말했던 진짜 신.”

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기계 장치만이 바쁘게 움직일 뿐이었다. 마치 김창을 보며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창은 저 태아가 생긴 건 몹시 엿 같이 생겼어도 그 몸에서 느껴지는 신성은 자신이 가진 것과 같다는 걸 느꼈다.

이 사실이 가리키는 진실은 하나뿐이었다. 이 이질적인 공간의 주인인 저 태아는 이 세상의 진짜 신이다.

그런데 여긴 중세 배경의 판타지 세계 속인데 왜 저놈 혼자만 생긴 게 저렇단 말인가? 차라리 여러 태아의 얼굴이 한데 뭉쳐 만들어진 살덩이 괴물 같은 생김새였다면 다크 판타지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납득 했을 텐데 등 뒤에 붙은 기계 장치들이 너무나 뜬금없다.

“뭐라고 대답이라도 좀 해봐.”

그러나 신은 아무런 말이 없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김창에 대한 계산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무릇 신이라고 하면 인간을 닮았거나 아니면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생김새여야 할 텐데 기계 장치를 주렁주렁 단 태아의 모습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경외감을 느끼기엔 불쾌한 생김새고 두려움을 느끼기엔 익숙한 생김새였다. 김창은 신이라는 놈이 왜 저런 생김새를 하고 있나 생각하다가 문득 답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라 그런 게 아닐까.

원래 게임이라는 건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위해 배경을 만들고 인물을 배치하는 건 곧 기계의 업무다.

그러니 어느 관점에서 기계라는 건 게임 속 존재들에게 있어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컴퓨터로 게임 몇 번만 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마우스로 클릭 몇 번만 하면 캐릭터가 생겨났다가 내 명령 한 번에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나길 반복한다.

그건 분명 신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럼 저건 일종의 컴퓨터인가? 태아의 머리를 전뇌화시켜 사이버 스페이스를 구축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김창은 인터넷에서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만약 우리가 통 속의 뇌라면? 어떤 미친 과학자가 전기 자극을 주고 있는 거라면?

“그럼 만약 이 세상이 저 태아의 꿈일 뿐이라면?”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없는 소리였다. 이게 만약 소설이나 만화였다면 작가가 총 맞아 죽기 딱 좋은 결말 아닌가?

꿈이라니? 이 모든 게 그저 꿈일 뿐이라니? 그럼 나는 그저 꿈속에서 날뛰는 멍청이일 뿐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지.”

김창은 이 세상이 그저 누군가의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애써 부정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였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 저 태아의 꿈속일 리가 없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어째서 그러한가?

“대체 어떤 놈의 애새끼가 미친 칼잡이가 칼 들고 자기 죽이러 오는 꿈을 꿔?”

세상에 게임 캐릭터가 직접 찾아와서 칼 들고 자기 찔러 죽이는 게임을 만드는 제작자가 있나?

그런 건 없다. 김창은 자신의 논리는 물론이고 근거가 빈약하다는 걸 알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건 지금 중요한 사실은 신을 만났다는 것이고 자신의 손에는 칼이 있다는 것이다.

죽여야 할 놈도 만났고 손에는 칼도 있다. 그럼 뭘 해야 하나?

“원래 애 같은 건 함부로 죽이고 그러면 안 되는데, 넌 덩치가 나보다 크니까 그냥 어른으로 치자. 이건 썰면 몇 근이냐? 제법 되겠는데.”

신이 무슨 돼지고기도 아니고 면전에 대고 할 말은 아니다. 김창 나름대로 도발이라면 도발이었는데 신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대체 뭘 그리 계산하고 있는지 여전히 기계 장치들만 삑삑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여전히 김창을 응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체 이럴 거면 나를 왜 이곳으로 불렀나? 그냥 신들에게 해코지하는 걸 막으려고? 그래서 그냥 여기에 평생 가두어 둘 생각인가?

“그런 거라면 따끔한 맛 좀 보여야겠는데.”

김창이 칼을 들고 뚜벅뚜벅 걸었다. 신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기계 장치들이 삐익 소리를 냈다.

그게 마치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 보여서 김창이 작게 웃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경고음을 무시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자 기계 장치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배로 빨라졌다.

저러다 연산 장치가 아예 뻗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참 삑삑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기계 장치들이 일시에 멈췄다. 그와 동시에 김창도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줄곧 닫혀 있던 태아의 눈이 열리는 걸 봤다. 원래 저 나이 때는 눈도 못 뜨는 게 맞는 걸 테지만 아무래도 신이라 그런지 눈을 뜰 수는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이제 좀 대화가 되려나 하고 기대하고 있던 김창은 태아가 눈을 뜬 걸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아직 신체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것인지 안구가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있었으니까.

원래라면 안구가 없으면 눈꺼풀이 내려앉아야 할 테지만 태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꼿꼿이 눈꺼풀을 들고 있었다.

마치 심연처럼 검게 빛나는 두 구멍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역했다. 김창이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은 뒤에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 아니면 그냥 덤비던가. 그런데 그 몸으로 덤빌 수는 있나? 혹시 등 뒤에 미사일 같은 거라도 숨기고 있는 거냐? 그럼 좀 곤란한데.”

곤란하다고 말했으면서 별로 곤란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도 미사일 정도의 위력을 낼 만한 존재들이 몇 있었는데 자신은 그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김창이 어차피 이번에도 아무 대답도 안 하겠지 하고 제 할 말을 하려 할 때였다.

“김창.”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목소리 합성 프로그램으로 만든 소리는 아닌데 어째서인지 기계가 말하고 있다는 게 단번에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김창이 눈을 부릅뜨는데 태아가 연이어 목소리를 내뱉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

김창은 가만히 있다가 불쑥 물었다.

“네가 우리를 여기로 불러낸 거냐? 집에서 게임 잘 하고 있던 우리를 굳이 왜?”

“연산 중······.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함. 재연산. 실패.”

이거 뭐 순 고물 아니야? 물어봤는데 대답을 못 하네.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네가 우리를 불렀든 아니면 딴 놈이 불렀든 어쨌건 우리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이군. 만약 그랬다면 날 외부에서 온 자라고 부르지 않았을 테니까.”

“내부 기록을 참조하여 답변 작성 중. 긍정.”

김창의 생각이 옳다면 원탁은 태아가 꾸고 있던 꿈속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로 지구라는 세상에 살았고 빌어먹을 망겜을 즐기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 알았으면 됐다. 더 들어야 할 대답이 있긴 한데 그거야 태아의 상태가 별로 안 좋으니 나중으로 미뤄야 할 터였다.

“가만 보니 애가 상태가 영 안 좋은 것 같군. 너 같은 놈들에겐 특효약이 있지.”

김창이 칼자루를 꽉 쥐고서 씩 웃었다. 그걸 본 태아가 삐빅 하는 경고음을 뱉어냈다.

“적대 의사 확인.”

“너 고쳐주려고 이러는 거야. 원래 TV든 뭐든 때리면 고쳐진다. 그러니까 너도 좀 맞자.”

김창이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경고음도 커졌다. 기계 장치가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면 몹시 다급한 상황인 듯한데 정작 태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무기질적이었다.

“대응 프로그램을 검색. 검색 중······. 적절한 프로그램을 찾지 못함. 신규 작성 항목으로 이동. 작성 중······.”

뭔지는 몰라도 이쪽에 대항할 방법을 만들어내는 중인 듯했다. 어차피 이게 마지막 싸움이 될 텐데 그 정도야 여유롭게 기다려줄 수 있다.

김창이 얼른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거리자 기계 장치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그 상태로 1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태아가 목소리를 내뱉었다.

“작성 완료. 프로그램을 출력. 출력 중······.”

그 상태로 또 1분. 대체 뭘 하려고 이토록 시간을 질질 끈단 말인가? 김창도 이제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였다.

“출력 완료. 새로 작성한 프로그램을 저장. 저장 완료.”

마치 3D 프린터가 피규어를 뽑아내듯 하늘에서 뭔가 쏟아지더니 어떤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뭔가 시작되는 것 같아서 김창도 다시 기다림에 들어갔는데 만들어지는 걸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왠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저건 익숙한 정도를 넘어서 이십 년도 넘게 매일 마주 보고 살았던 얼굴인데······.

“새 항목의 이름을 명명. 저장 완료.”

김창은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는 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씹새, 참 잘 생겼네.

“대응 프로그램 작동 개시. 프로그램 김창, 적대 존재 섬멸 개시.”

아니, 남의 얼굴을 막 베껴도 되나? 김창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자신을 보고 이를 부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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