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 1. 첫 번째 편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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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꿈이다.
해질녘의 정경이 핏물에 젖어 거무죽죽했다. 부리로 부패한 땅을 헤집는 까마귀, 늘어진 시체. 소리마저 임종을 맞이한 이곳은 지옥의 말라붙은 단면도였다.
그 사이에서, 사내가 울고 있었다.
시체더미에서 흘러나온 구정물이 그의 손을 더럽혔다. 그럼에도 그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소리가 없어 질퍽이는 촉감만이 울려 퍼지는, 흑백의 세상.
어느덧 황혼이 저물고, 회색이던 세계의 빛깔이 명도를 덜어냈다. 그제야 사내는 일어났다. 체감으로는 몇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그는 그새 몇 년이나 늙어버린 듯 보였다.
그는 하염없이 거뭇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그가 비틀거리며 내게로.
내려앉은 어둠에 가려져 그 얼굴을 식별할 수는 없었다. 다만 눈동자 사이에서 잔불처럼 타는 감정의 편린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원독, 증오, 그리고 후회.
사내가 우뚝하니 선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세계에서 처음으로 소리가 탄생했다.
“……델피렘.”
툭, 하고 내던져진 소리. 그러나 오랜 침묵에 길들여진 내 귓전에는 벼락 같이 내리꽂히는 목소리였다.
그 메마른 읊조림에 화들짝 놀란 내 시선이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가.
“델피렘이, 오고 있다.”
씹어뱉듯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헐떡이며 잠에서 깨어난 건 이 무렵의 일이었다.
심장이 선상에 갓 오른 활어처럼 펄떡거리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가파른 숨에서 단내가 느껴졌고,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은 베갯잇까지. 악몽에서 깨면 늘 이렇듯 불쾌한 감각이었다.
후우, 하고 기나긴 숨을 내뱉으며 마른세수를 하니 그제야 호흡이 가라앉았다. 생생한 꿈이었다. 그래서 더 불쾌했는지도.
그리고 ‘델피렘’, 그래. 델피렘이라.
나는 생선 가시를 발라내듯 악몽의 내용을 더듬거리다가, 이내 픽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주신교의 창세신화에서나 나오는 이름이었다. 인류 최초의 배신자, 모든 죄의 근원. 그리고 만마의 종주.
레비스트로스 교수님의 신화학 강의를 너무 인상 깊게 들었나?
나는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꿈의 여운을 털어냈다. 그리고 눅눅한 시트를 피해 상반신을 일으켰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방은 어두컴컴하고 고요했다.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귀족들이 머무르는 기숙사, 벌써 3년째 살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만약 가문의 위세가 좀 더 대단했다면 넓고 고급스러운 방을 쓸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값비싼 아카데미의 학비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더 비싼 기숙사에 머무를 여유는 없었다.
얼마간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난밤에 과음을 한 탓이었다.
묵직한 바위가 뇌를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 불쾌한 갈증이 치솟아 나는 더듬거리며 머리맡 근처의 탁상을 살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빛과 열이 돌아왔다. 기숙사에 설치된 마력등은 그다지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어렴풋한 시야를 확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언제나 탁상 위에 두고 자는 수통을 들어 물을 들이키려던 나는, 잠깐 멈칫했다.
묘한 위화감이었다. 달라진 것이 없는데, 무엇인가가 달라진 기분.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곧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달력이 넘어가 있었다. 아직 비파의 달은 사흘이 더 남아있었을 텐데, 벌써 활의 달이라니. 지난밤에는 어지간히도 취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어젯밤의 희미한 기억을 반추하려던 찰나, 내 움직임이 두 번째로 멎었다. 고개를 내저으려던 내 시야 한구석에 낯선 물건 하나가 덜컥 걸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편지였다. 고급스러운 종이에 정갈한 글씨체, 누가 보더라도 교양과 학식을 갖춘 귀족의 편지였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야 했다.
내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었던가? 또,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편지를 받은 기억은 없는데.
내 손이 자연스레 편지를 들었다. 첫줄에 적힌 ‘이안 페르쿠스’라는 글자가 이 글의 수취인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곧 내 눈동자가 정갈한 글씨를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To. 사랑하는, 나의 이안 페르쿠스에게
글쎄요, 봄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얼마 전 아란코트의 시가지에서 들은 말이에요. 맵시 있는 옷을 챙겨 입은 노신사분이셨는데, 품위 있는 말씨와 절제된 예의범절이 인상 깊은 분이셨죠.
돌이켜 보면, 명망 높은 귀족 가문에서 일하던 분이 아니셨을까요?
지난 겨울에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하셨지만, 포근한 미소만큼은 봄날의 햇살만큼이나 따스한 분이셨습니다. 겨울이 끝난 덕이겠죠.
그럴 때마다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을 떠올려요. 세상을 지켜내고, 영웅이 되었다는 것.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에나 나오는 허망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그 책의 한 페이지에 우리의 이름이 새겨졌다는 사실이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아니, 당신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의 덕분일지도.
아란코트에서의 생활도 나름 익숙해졌어요. 끝없이 모래만이 이어지는 대사막을 건널 때만 하더라도 어떻게 될까 걱정했는데, 결국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더군요.
햇살도 따뜻하고, 바다는 청명한 빛으로 빛나고. 옛말에 ‘요정의 눈으로 보면 숨겨진 보물이 보인다’라고 했던가요? 그 말대로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일 또한 어느덧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네요.
처음에는 달에 한 번씩은 꼭 편지를 부치라는 당부에 조금 의아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요. 그야, 이안이잖아요? 언제나 말없이 미소만 짓던 당신, 그래도 사랑하는 연인을 멀리 떠나보내려니 외로움이라도 타나 싶어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설렘은 언제나 그랬듯이 저만의 몫인 듯하군요. 편지는 이틀에 한 번 부치는데, 답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니 말입니다.
물론 제도에서의 일이 바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아량이 없는 여자는 아니랍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으니까요. 아픔과 슬픔, 그리고 괴로움까지.
이처럼 한창 바쁘고 힘들 시기에 연인을 지탱해 주지 못하는 건, 약혼녀로서 불민한 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반성하고 있어요.
그러나 제국의 3대 무역항 중 한 곳이자, 대륙의 서안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란코트를 수호하는 일 또한 제국의 귀족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의무입니다.
이안, 당신도 알고 있겠죠. 아직 지난 겨울의 여파가 모두 가시지 않았음을.
그럼에도 늘 시간을 짜내어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거랍니다. 제 애타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밤은 특히 이안이 보고 싶네요. 어느새 활의 달이 찾아오고, 하늘에는 그날 밤처럼 별들이 총총히 박혀 군무를 추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연이 깊어진 것도 활의 달에 열렸던 수렵제 때였죠. 늘 열등감에 시달리던 제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설레는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해의 수렵제는 유독 사건사고가 많았네요. 연금학부의 엠마가 재료를 채집하러 갔다가 의문의 마수에게 습격당해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된 것이 시작이었죠. 그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검술학부의 실습 시간에 마수들이 무리를 지어 기습했을 때도 그랬어요. 만약 그때 재빨리 대처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럼에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다니.
그때 우리는 숲이 수렵제의 무대가 될 곳이니, 마수들의 증식을 일부러 방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죠. 학생다운 안일한 판단이었습니다. 정작 당시 교무부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들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해의 수렵제를 강행한 것은 델레모어 총장님의 실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 마음 한켠에는 총장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의 관계가 더욱 깊어질 계기가 마련되었으니까요.
덧붙여 처음으로 수렵제 우승도 해보고 말이죠. 그 괴물을 마주쳤을 때는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당신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네요.
그러고 보면 아직도 의문이에요. 어떻게 그 괴물의 약점이 뿔이란 걸 알고 있었던 거죠?
물어볼 때마다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게 있어’라고 할 뿐이니, 7년이 지난 지금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괴물을 쓰러트린 이후에도 갑작스러운 습격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괴물의 수급을 차지한 건 우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오히려 그날의 습격에 감사하기도 해요.
처음으로 이길 수 있었으니까. 비록 당신을 비롯한 친구들의 덕을 보았다고 해도, 그날의 기억은 제 삶의 전환점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당신에게 더욱 깊은 관심이 생겼으니, 여러 의미에서 그날의 사건은 제 인생에서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당신과 연인이 되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까요.
벌써 달이 기울고 있네요. 편지는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당신과의 소중한 추억을 돌이킬 수 있어 즐거운 밤이었어요.
메마른 겨울이 가고, 애절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겨울의 마지막 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인데, 아직도 당신을 생각하는 제 마음은 봄볕에도 녹아내리지 않네요.
오늘밤에도 당신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안.
아니, 이안 오라버니.
꿈에서라도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할게요.
추신 1: 최근 제도에 성국의 암코양이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 암코양이가 들이대더라도 오라버니께서 저와의 신의를 저버리지는 않으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참고로 저는 아란코트에 부임한 이후 남성과 단 둘이서는 식사도 하지 않는답니다. 그럼.
From. 오늘 밤도 당신을 생각하며, 세피아로부터.
제국력 571년, 활의 달 다섯 번째 날에.
편지를 몇 분에 걸쳐 읽은 나는 잠시 침묵했다.
기나긴 편지였다. 어휘나 예법에 어긋나는 표현이 없었고, 필체도 정갈한 것이 꽤 정성을 들여 쓴 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성이 가득 담긴 편지를 받은 내가 보일 반응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무슨 헛소리야?”
어이가 없다는 듯,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편지를 구깃구깃 말아 쥐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는 이야기뿐이었다.
수렵제? 활의 달에 열리는 아카데미의 가장 큰 행사이긴 했다. 그러나 이는 월말에 열리는 행사로, 아직은 계획만이 발표되었을 뿐이다. 그날의 일을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세피아’라는 이름도 이상했다. ‘세피아 꽃’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내 주변에 그러한 이름이나 별명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편지에서 가장 거슬리는 건 마지막 줄에 적힌 날짜.
내 눈길이 다시금 탁상 위의 달력을 향했다. 활 모양이 반투명하게 그려진 배경 위로, 올해를 상징하는 숫자가 적혀져 있었다.
제국력 564년.
그렇다면 이 편지는 7년 뒤의 미래로부터 날아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마저 구기려다, 문득 눈에 걸리는 지점이 있어 흠칫 몸을 굳혔다.
편지의 읽지 않은 뒷부분이었다. 그곳에는 누가 보더라도 이질적인 필체로 문구 하나가 휘갈겨져 있었다.
‘미래를 지키지 못하면, 세계는 멸망한다.’
그 문구에서는 꾹꾹 눌러 담은 후회와 원한이 묻어나오고 있어서, 나는 잠시 멍하니 글씨를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얼핏 악몽 속의 장면이 스친다.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던, 그 사람.
그러나 잠시는 어디까지나 잠시였다. 나는 곧 정신을 되찾고 편지를 마저 구겼다. 그리고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쓰레기통으로 투척.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한때 편지였던 종이공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수통에 남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 편지를 받은 순간부터, 내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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