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
〈 Chapter 0. 모든 시작은 어렵다 〉
제안: 최적의 선택을 하세요. (0/1)
* Route 1 ― 〈 Chapter 1. 너 자신을 도우면, 신도 너를 돕는다 (1) 〉
* Route 2 ― 〈 사망 〉
‘이… 이거 설마….’
…….
퀘스트?
하지만 놀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것부터가 굉장한 충격이었기에, 무엇이 나와도 남의 몸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양호해 보였다.
오히려, 이 이상한 창의 등장으로 공포를 컨트롤할 여유가 생겼다.
‘루트가 두 가지야.’
‘다음 장’으로 넘어가거나… 죽거나.
마침 내가 할 수 있는 선택도 두 가지다.
독을 피하거나, 마시거나. 이 두 선택 중 하나는 내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고작 선택 하나가 생사를 가르게 생겼다. 긴장으로 숨이 턱 막히고 손끝이 저려 오기 시작했다.
‘…아냐.’
진정하자.
나는 굳은 손마디를 풀어 내며 놈이 든 병을 바라보았다.
독액이 푸른 자국을 남기며 병 안에서 반짝였다. 마셨다가는 저세상으로 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 검푸른 액체를 노려보다 짧게 말을 내뱉었다.
“…어제 마셨습니다.”
“글쎄. 물론 나는 네가 언제나 진실을 말할 거라 믿어. 하지만 무슨 일이든 여러 다리를 거치면서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지. 예를 들어 네게 차를 내온 자가 그 안에 약을 섞지 않았다던가….”
“…….”
“전부 다 진실이라 해도 상관없어. 나는 널 위해 증세를 확실히 정리해 주고 싶을 뿐이야. 혹시나 친구들 앞에서 실수라도 한다면… 너도 많이 슬플 테니까. 그렇지, 루카?”
악마도 이런 악마가 따로 없다.
저놈은 늘 이랬다. 소설에서도, 루카의 기억에서도 항상 착한 형을 연기했다.
저 온정 넘치는 말과 미소 뒤에 어떤 종류의 열등감과 우월감이 숨어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선택을 하든 목숨이 걸린 이상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분명 최적의 선택이라고 했지.’
나는 깊이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놈의 손에 들린 병을 빼앗아 독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혓바닥부터 위까지 독액이 스치고 지나간 모든 자리가 불타듯 화끈거렸다. 왼쪽 얼굴에 돌바닥의 한기가 스미고, 방금 목으로 넘겨낸 독액이 입에서 울컥 쏟아졌다. 내가 낸 것으로 추정되는 소음이 귓가에서 흐릿하게 뭉개졌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음, 정말로 어제 마셨었구나.”
의식 한 구석에 형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웃기겠지. 억지를 알면서도 가만히 따라야 하는 동생의 처지가 우스울 만하다. 이해한다. 그러니까….
‘지금 많이 처웃어 둬라.’
띠링―!
축하합니다!
‘제안: 최적의 선택을 하세요.’ 성공!
‘Chapter 0. 모든 시작은 어렵다’ 완료!
‘Route 1 ― 〈 Chapter 1. 너 자신을 도우면, 신도 너를 돕는다 (1) 〉’을 확정합니다.
‘…그래. 이래야지.’
아까, 저놈이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했지.
소설 속 루카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 죽으니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
물론, 소설 내용이 내게 그대로 이어질 거란 보장이 없으니 약간은 도박이었는데….
‘성공했네.’
붕 떠가는 의식과 달리 육체는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신체와 거리를 벌리는 와중에도, 내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갔다.
‘Route 1 — 〈 Chapter 1 〉’을 시작합니다.
「 Chapter 1. 너 자신을 도우면, 신도 너를 돕는다 (1) 」
통증은 중요치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웃는 사람은 내가 될 테니까. 이딴 세계에서 억울하게, 그것도 형 같은 인간에게 죽어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인공 대신 내가 형의 마지막을 거둬주는 수밖에.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창을 가린 커튼 사이로 새하얀 햇살이 비쳐 들었다.
독에 타들어 갔던 위벽과 식도에서는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치유 마법이 통했는지 몸도 가벼웠다.
‘음.’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보았다.
뼈마디가 불거진 창백한 손이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살았다.
그리고 여전히 남의 몸이다.
‘아까… 그건 뭐였지.’
정말 퀘스트 창인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무언가 눈앞에 나타났다.
〈 Chapter 1. 너 자신을 도우면, 신도 너를 돕는다 (1) 〉
제안: 인생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으세요. (0/3) (71시간 52분 09초)
* Route 1 ― 〈 Chapter 2. 너 자신을 도우면, 신도 너를 돕는다 (2) 〉
* Route 2 ― 〈 Chapter 2. 눈을 가린 닭도 때때로 곡식을 찾을 수 있다 〉
아까는 분명 챕터 0이었지.
숫자가 넘어갔다.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게 뜨면 상태창…도 있다는 말인가.’
게임도 아닌데, 설마.
하지만 게임도 아니면서 ‘제안’이라는 이름으로 웬 퀘스트를 주고 있지 않은가.
그때, 공중에 새하얀 글자가 나타났다.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
칭호: 제국 제일의 멍청이
체력: -5
정신력: -10
마력: ?
기술: 0
인상: -10
행운: -10
특성: 여명777
“…오.”
떴다. 그런데….
‘뭔데 XX 다 마이너스야?’
아니다.
기술은 0이다. 하지만 그 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저 칭호는 또 뭐고.’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창을 훑어 나갔다.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
그래, 원래는 루카스지.
루카는 형이 부르는 애칭일 뿐 진짜 이름은 아니다.
소설에서도 주인공과 형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루카스라 불렸다.
인상은 아마 내 이미지를 말하는 걸 테고. 특성은….
‘특성이라.’
이거 누를 수 있나.
나는 시험 삼아 숙취해소제가 생각나는 이름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여명777
―최종 결말 ‘Chapter X. 사망’까지 777일 1시간 6분 37초
―변경 가능성: 0.2%
“…….”
나는 창을 날려 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뭘 본 건지 몰라도 딱히 직면하고픈 정보가 아닌 건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싶지 않아도 외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젠장….”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상태창을 읊조렸다. 여명777을 찾아 클릭하자 같은 창이 나타났다.
‘사망까지 777일.’
대강 2년 하고도 한 달이 좀 넘는 시간이다.
‘그리고, 변경 가능성이 0.2%.’
0이면 0이지 애매하게 0.2%인 이유는, 내가 챕터 0에서 ‘제안’을 성공시켰기 때문이지 않을까.
앞으로도 제안을 성공시키면 저 확률을 올릴 수 있겠지.
‘나쁘지 않네.’
이런 안내가 없다 해도 내 선택에 따라 생존 여부가 갈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눈에 보이기라도 하니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최선의 선택으로 최고의 결과를 얻어 내 보자고.
똑똑―
“작은 도련님.”
이제 방을 좀 둘러보려 마음먹었을 때, 하인 하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어나셨군요. 쓰러지신 지 하루 가까이 지나셨습니다. 상하신 부분은 어제 큰 도련님께서 마법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치료?
하여간 ‘형’의 착한 척은 아주 알아줄 만하다. 내가 비웃음을 참는 동안 하인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갑자기 많은 빛을 보셔서 눈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오늘까지는 직접 빛을 보지 않게 조심하시고, 위장도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으니 식사를 무리하게 하시면 안 됩니다. 짐은 전부 기숙사에 보내 두었으니 도련님께서는 내일 아침까지 편히 쉬시다 이동하십시오.”
하인이 빠르게 말을 줄줄이 뱉어 내고는 긴장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러났다.
“그럼, 잠시 쉬고 계시면 식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이봐.”
내 말에 하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입을 뻐끔대다 마침내 작은 물음을 끄집어냈다.
“…예?”
물론 놀란 것은 하인뿐이 아니었다.
‘이봐’라니? 덕분에 여기가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저 사람은 내가 예의 없이 불러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놀란 것뿐.
‘그럴 만하지.’
루카는 형 때문에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으니까. 매일 보는 하인들과도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하인이 고개를 삐걱대며 주위를 둘러보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네가 아니면 여기 누가 있지?”
계속해서 쏟아지는 예의 없는 발언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게 여기 정서인가.
기억을 되짚어 보니 루카도 가문의 일원인 만큼 굳이 사용인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물론 말투는 굉장히 소심하고 자신감 없었지만. 지금의 내 말투는 오히려 형의 것과 닮아 있었다. 말하는 사람이 루카가 아니고 나인 만큼, 내 성격이 반영된 듯했다.
‘어쨌든 잘됐네.’
형을 내가 있는 곳 아래로 끌어내리고, 내가 형이 있는 곳 이상으로 올라가려면 기존의 유약한 성격으로는 힘들다.
물론 계속 이 말투를 썼다가는 모두가 내 변화를 알아차릴 것이다. 이미 내뱉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슬슬 원래의 루카처럼 굴 필요가 있었다.
나는 하인 모르게 슬쩍 목에서 힘을 뺐다.
그러는 동안 하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쳤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십시오.”
“…크흠, 형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이곳에 오신 다음 날 바로 황궁으로 가셨습니다.”
“황궁?”
“예.”
황궁이라.
당연한 말이지만 형이 물리적으로 어디에 있는지가 성공 난이도를 가를 것이다.
형은 황실에 소속된 마법사로, 소설 속에서는 주로 외교 활동으로 해외에 파견되는 일이 많았다.
내가 죽기 2년 전인 걸 보면 루카와 7살 차이가 나는 형은 이십 대 중반이라는 말인데, 이쯤이면 슬슬 해외에 나갈 법도 하다.
“언제 영지로 돌아오시는지 아나?”
“아마… 이번에 맡으신 일이 끝나려면 최소한 일 년은 더 걸리실 겁니다. 제국으로 돌아오신 뒤로도 영지에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외로 나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소식이었다.
앞으로 일 년은 조금 더 넓게 움직일 수 있다.
“저, 도련님.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이제 가 봐도….”
잠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인을 응시한 채 상태창을 불러냈다.
안톤 클라우젠
호감도 –5
칭호: —
체력: +2
정신력: +2
마력: +0.5
기술: 0
인상: +3
행운: +1
특성: —
“…커헉…!”
“도, 도련님?”
이름 아래의 항목을 보고 사레에 들려 기침했다.
호감도라면… 높은 확률로 내 이미지에 관한 점수겠지.
굳이 내 바닥 찍은 이미지를 저렇게 적나라한 숫자로 봐야만 하는 걸까?
‘…그나마 이 사람은 내 하인이라고 -10 아니고 -5인 건가….’
나는 하인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들고 잔기침했다.
뭐, 점수가 어쨌건 지금은 타인의 정보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집중할 때다.
‘쓸 만하겠는데.’
내가 말없이 상태창을 보고 있자 하인이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
“그래. 이만 가 봐.”
“예, 잠시 기다리시면 식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인은 방을 나가서 금방 식사를 가지고 돌아왔다.
환자였기에 내 식사는 물이나 다름없는 아페리티프와 곡물을 갈아 만든 푸딩이 다였다.
나는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방을 둘러보았다.
‘해야 할 것을 찾으라고 했지.’
말 안 해도 찾을 생각이다.
나는 또다시 제안 창을 불러냈다.
〈 Chapter 1. 너 자신을 도우면, 신도 너를 돕는다 (1) 〉
제안: 인생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으세요. (0/3) (70시간 53분 01초)
* Route 1 ― 〈 Chapter 2. 너 자신을 도우면, 신도 너를 돕는다 (2) 〉
* Route 2 ― 〈 Chapter 2. 눈을 가린 닭도 때때로 곡식을 찾을 수 있다 〉
Route 2의 말뜻이 묘하게 열 받는다.
이번 제안에 실패해도 전개는 된다는 뜻이겠지만… 굳이 부정적인 루트로 빠질 필요는 없지.
일단 하나씩 시도해 보자고.
나는 협탁에 놓인 노트를 집어 들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소설 내용이 어땠는지 정리할 차례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기는 하나, 머리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펜을 들어 글자를 적었다.
‘우선 전체적인 줄거리부터.’
한 줄로 줄이자면, 현 황제의 방계로 태어난 망나니 주인공이 10년간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며 마침내 황제가 되는 이야기다.
황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기존 황제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던 루카의 형을 제거한다.
그 과정에서 루카의 사망이 조명되었고, 형의 실체가 모두에게 드러난다.
루카의 이야기는 이처럼 주인공이 처리한 수많은 사건 중 하나다.
나는 또다시 찾아온 식사도 무르고 불쑥불쑥 떠오르는 정보를 미친 듯이 적고는 숨을 골랐다.
대강의 인물 관계 역시 정리해 두었다.
‘이제 슬슬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정할 차례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실력을 키우고 물 밑에서 내 편을 다수 확보할 때까지, 대놓고 마법을 쓰는 등 형이 나를 죽이러 올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 이것 말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무리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해도, 내 손발을 대신할 동료 하나쯤은 만들어 두어야 한다.
‘지금 주인공이 루카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걸로 기억하는데.’
굉장히 좋은 인맥이 되겠지.
지금은 문제 학생에 불과하지만, 그는 10년 후 황제가 되는 인물이니까.
그렇다면… 소설 주인공과 친해져야 할까.
‘아니.’
나중이면 모를까, 지금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나는 주인공의 이름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그 옆의 다른 이름에 밑줄을 그었다.
띠링―!
당신의 안목에 박수!
‘제안: 인생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으세요’ 1/3 달성!
이후 단계에서 해당 목표 달성 시 생존 가능성이 3% 이상 상승합니다.
‘음.’
괜찮게 고른 모양이다.
나는 황제가 아니라, 주인공을 황제로 만든 킹메이커를 내 편으로 끌어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