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드루와
찰리 데커는 참으로 특이한 거래인을 만났다. 처음에는 그냥 적당히 웃돈을 주고 집을 사면 끝날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어긋났다. 구매하려고 했던 집을 누군가 먼저 가로챘다. 정말 우연이 겹쳐 매물을 먼저 가로챈 거래인은 뒷배가 아주 든든한, 젊다 못해 어린 거래인이었다. 받은 사람이 여태까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에인프라흐 공작의 황금 명함을 가진 거래인이었으니까.
아버지에게 보고하자. 최대한 성의를 보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금 왕국에선 국왕보다 무서운 것이 에인프라흐 공작가다. 충분히 납득할만한 명령이었다.
그리고 매입가의 3배를 제시했다. 사실 아버지가 허락한 금액은 그것보다 훨씬 많았지만, 큰 금액을 먼저 제시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금액을 먼저 제시해서 조금씩 더 늘려주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거래인은 그 정도로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새로 이사 갈 집을 구해달라는 부탁에 상단에서 가지고 있던 몇 개의 매물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넓은 곳을 요구하기에 상단에서 가지고 있는 악성 매물 중에 가장 넓은 부지의 집을 소개해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좋다고 한다. 공동묘지와 도축장 그리고 소문이 좋지 않은 마법사가 운영하는 병원이 바로 맞닿아 있는 곳이다.
단순히 혐오시설이 가까이 있어서 팔리지 않고 쓰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다른 이유가 몇 가지 더 있지만 그것은 얘기해주지 않았다. 짐 덩어리를 떠넘긴 느낌도 들지만 상관없었다. 돌턴골드 상단의 힘으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지만 에인프라흐 공작의 황금 명함을 가지고 있는 거래인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새로운 거래를 제안받았다. 거래인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운철과 경철의 덩어리를 보여주었다. 운철로 만든 검은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저만한 경철 덩어리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일단 판단을 보류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돌턴골드 상단의 정보망을 동원하자 에인프라흐 공작과 크리스타 백작령 그리고 멤파이 자작령에 관한 정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멤파이 자작령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대형던전 하지만 정작 보물은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그리고 시작된 크리스타 백작과의 영지전으로 멤파이 자작령은 굉장한 수세에 몰려있다고 한다.
던전이 발굴될 당시 마침 멤파이 자작령에 있던 에인프라흐 공작 그리고 바로 크리스타 백작령에서 천재로 불리던 빅터 하네스의 조합은 한 가지 추리를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 던전의 보물을 에인프라흐 공작이 차지했고 크리스타 백작을 동원해 증거를 지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보물을 처분하는 대리인으로 빅터 하네스를 선택한 것이다. 누구도 15살짜리 소년이 대형던전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보물을 공작가에서 직접 처분하면 아무리 공작가라고 해도 던전의 보물을 치사한 방법으로 강탈했다는 사실에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렵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돌턴골드 상단을 선택한 것이다.
아버지와 직접 거래하는 것이 더 쉬웠을 텐데 어째서 자신이 선택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굴러 들어온 기회를 찰리 데커는 절대 놓치지 않기로 했다.
찰리 데커와 독점계약서를 체결한 후 평판이 좋은 건설업체를 소개받은 후 전문 설계사의 도움을 받아 내가 꿈꾸던 집을 설계했다. 외형적으로는 모던한 느낌의 전원주택이었다. 전생에 돈을 많이 벌어 말년에는 그런 집에서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기능적으로는 마음 놓고 지구에 오갈 수 있는 나만의 공간과 물품들을 쌓아놓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지구에 저장해놓는다면 무엇보다 안전하겠지만 앞으로 계획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지구에만 쌓아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하 2층 지상 2층의 저택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지하를 깊게 파는 바람에 공사비는 많이 들어가겠지만 그것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찰리 데커에게 1차로 맡긴 운철과 경철은 비밀리에 녹여서 주괴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 운철은 돌턴골드 상단에서 직접 물건을 만들어 팔기로 하고 경철은 작은 주괴로 나누어 경매에 내놓는다고 했다.
자신감 없어 보이던 찰리 데커가 자신 있게 수익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 말했으니 어느 정도는 믿어도 좋을 것이다. 수익배분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확실한 보안을 요구하는 만큼 나에게 조금 불리한 것이 아닐까 했지만 운철과 경철을 팔며 돌턴골드 상단에 새로운 거래처가 생기고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생각하면 별것 아니라면서 찰리 데커가 제법 양보했다.
시간이 흘러 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저택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찰리 데커로부터 첫 번째 수익금이 도착했다. 무려 금화 1560개의 거금이었다. 이미 두 번째 물량은 건네준 상태였으니 다음에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수익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기상연구소에서 내가 뽑아낼 수 있는 운철과 경철의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앞으로 지속해서 수익을 내자면 기상연구소를 벗어나 도시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줄어들며 변이체로 줄어들었고 인류가 멸망한 지 오래되었지만, 내 느낌상 도시에는 분명히 변이체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녀석들과 싸우기에는 약하다. 더 강해져야만 한다.
지금 번 돈과 나머지를 팔아 얻을 수 있는 수익만 계산해도 지방에 가면 제법 부자 소리를 들으며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기상연구소를 떠나 도시로 진출할 지는 쉽게 결정 내릴 수 없는 문제였지만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먼저 집에 보냈던 편지의 답장이 왔다. 편지는 어머니가 쓰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사소한 내용이 대단히 많았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없는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은 멤파이 영지와 영지전에서 아버지와 형이 제법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내 예상으로 잘하면 아버지가 승작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것까진 이루지 못했고 포상금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안 좋은 소식은 멤파이 자작이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크리스타 백작은 멤파이 자작령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고 도시 하나와 마을 두 개를 받는 선에서 영지전을 멈췄다고 한다.
남은 땅으로 멤파이 영지가 유지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멤파이 자작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폴과 제시가 아직 마음 편히 활동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남는 시간에 폴에게 기초 검술을 가르쳐줬더니 녀석의 습득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도 저 나이에 저만큼은 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렇기에 빨리 안전을 확보하고 폴을 기초 학교라도 보내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고심 끝에 찰리 데커를 찾아가 상담했다.
"그러니까. 신분 세탁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저희 돌턴골드 상단도 항상 합법적인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가끔은 밀거래나 암상인도 이용하는지라 그쪽은 좀 알고 있습니다."
"안전한가요?"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멤파이 자작을 피하자고 신분 위조를 하다가 발각되면 늑대를 피하자고 호랑이굴로 뛰어드는 격이다.
"검은형제단쪽에 굉장한 실력의 위조전문가가 영입됐다고 하더군요. 여태까지 한 번도 적발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검은형제단이요?"
"뒷 세계 조직 중에 암흑은 알고 계시지요?"
암흑은 역사가 깊은 조직이다. 무려 400년 전에 대륙의 암살, 정보, 도둑 길드를 통합했던 조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암흑의 창립자가 마왕의 강림을 막았던 전설의 다섯 용사 중의 하나인 그림자 왕 조엘 에이크만이다. 유일하게 역사책에 남아있는 뒷세계 조직의 수장이다.
물론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륙 전체에 영향력이 있는 조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네, 역사책에 나오는 곳이니까요."
"지금 왕도에서 가장 큰 뒷 세계 조직이라면 암흑과 검은형제단입니다. 최근 10여년 전부터는 검은형제단이 압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대단한데요?"
"아무래도 서로 맡은 영역이 다르니까요. 암흑은 암살과 정보 쪽이 주요 사업이고 검은형제단은 창관이나 도박장 같은 돈이 되는 사업 쪽이 주력입니다. 라이브러쉬 왕국에 한정해서는 정보도 검은형제단이 낫다고 하더군요."
"그럼 검은형제단쪽에 의뢰를 넣을 수 있겠습니까?"
찰리 데커가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크흠, 미리 말씀드리진 못했는데 그 구입하신 부지 앞쪽에 빈민가가 있지 않습니까?"
찰리 데커가 빈민가라고는 했지만 시골 영지의 거지 굴 같은 그런 빈민가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의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일 뿐이다.
"네, 있지요."
"그곳에 검은형제단의 본부가 있습니다."
혐오시설이 하나 더 있었던 거군? 미리 알았다면 금화 100개는 더 깎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제가 직접 한번 가보도록 하지요."
왕국 최고 뒷세계 조직의 수준을 한번 직접 보고 싶었다. 어차피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거래를 위해서 가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웃사촌이 아닌가?
찰리 데커에게 검은형제단의 본부 위치를 받아내고 나의 애마인 노란 붕붕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주차하고 차에서 내릴 때 도로 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부아아앙!
미끈하게 생긴 마동차 한대가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었다. 보통 마동차는 소음이 그리 크지 않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에 한창 보급되기 시작했던 전기차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저런 큰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만큼 고출력이거나 아니면 일부러 소리가 나게 제작했다는 것이다.
그 시끄러운 마동차는 급커브를 돌아 곧바로 우리 집 마당을 가로질러 먼지를 가득 일으키며 집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마치 작은 에인프라흐 공작처럼 생긴 녀석이 차에서 내렸다.
누가 봐도 에인프라흐 공작의 아들임을 얼굴로 표현하는 녀석이 누군지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히려 여태까지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공작이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던 공작의 막내아들이었다.
"야! 네가 빅터 하네스냐?"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시비조로 소리를 질렀다. 녀석은 왕도에서 굉장한 유명인이었다. 이른바 공작가 망나니 막내아들이다. 재벌 상단의 서자와 공작가 망나니 막내아들이라니 무슨 판타지 소설 주인공 같은 놈들이 내 주변에 몰려드는 기분이다.
"그래, 네가 슬라이트 에인프라흐?"
"그래 내가 슬라이트다.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며?"
그것은 금시초문인데 어디서 그런 소문이 난거지? 뭐 당연하게도 공작이 그렇게 말을 한 것이겠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아빠가 너 이기고 오기 전까진 집에 돌아오지 말래."
녀석이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었다. 어차피 우리 집 마당이야 공사가 진행 중인 곳 빼고는 여전히 허허벌판의 황무지니까, 여기서 대련해도 상관은 없다만, 집에 돌아오지 말라는 것은 무슨 얘기인가? 그럼 빨리 쫓아버리려면 져줘야 하나?
그러나 그와 별개로 태어나 처음으로 비슷한 수준의 무인과 대련한다고 하니 제법 흥분이 됐다. 이런 것을 호승심이라고 하던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 뽑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도발했다.
"들어와"
녀석이 히죽 웃더니 생각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쾅!
오러가 실린 검이 충돌하며 굉음이 울렸다. 4성 이상의 기사들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다. 직접 경험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오러홀에서 4개의 별이 오러홀을 태워버릴 것처럼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충격파에 얼굴이 따끔거리고 손목이 시큰거린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폴과 제시가 밖으로 뛰어나왔고 공사장의 인부들이 웅성거리며 일손을 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공터에 굉음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녀석의 실력은 훌륭했다. 나는 처음부터 마구잡이 검술을 썼다. 하네스 가문의 검술 따위로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검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밀리기 시작했다. 검술의 깊이, 오러를 사용하는 대인전의 경험, 타고난 천재성에서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 검술일 때의 얘기다. 나는 살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했던 생존자였으며 살인자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녀석에겐 없는 결정적인 무기가 한 가지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