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도시의 비밀
난 마검사다. 마법서를 얻은 후 마법을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고 그나마도 독학이라서 이런 전투 상황에 쓸 수 있는 마법을 익힌 것은 몇 개 되진 않지만 원래 전투에선 작은 변수 하나로 승부가 좌우되는 법이다.
방어 위주로 태세를 전환하며 조그맣게 캐스팅을 시작했다. 일부러 크게 캐스팅하는 마법사도 있다고 들었지만 이런 근접 전투 상황에서 캐스팅을 크게 해서 무슨 마법을 쓴다고 알려줄 이유는 없지 않나.
그러자 슬라이트는 눈치를 챘는지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마법사와 대련 경험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역시 금수저다. 아니 이 정도면 미스릴 수저쯤이라고 봐야 하나?
"야! 그건 반칙!"
싸움에 반칙이 어디 있냐.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직 캐스팅이 끝나지 않았다. 캐스팅이 끝나자마자 바로 마법을 쓰는 짓은 하지 않았다.
쓸 수 있는 마법이 몇 가지 되지도 않을뿐더러 강력한 마법도 아니다. 이것으로 흐름을 방해하려는 것이지 결정타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이는 칼보다 보이지 않는 칼이 무서운 법이다.
내가 캐스팅을 완료하고 각을 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녀석의 움직임이 소극적으로 변했다. 무슨 마법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녀석은 신경질적으로 말했지만 뭔가 다른 묘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공세를 밀어붙이자 녀석이 뒤로 연신 밀리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맞붙을 놓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뒤로 밀리는 연기를 하다가 마법을 사용했다.
"플래시!"
순간적으로 강한 빛을 터트리는 마법이다.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렇게 전투 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다.
스트라이더 997번 안에 든 마법서는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 물품들이라 그런 것인지 마법서들도 대부분 전투에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잃은 슬라이트가 뒤로 빠르게 물러나며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나는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따라붙으며 공격했다. 하지만 녀석은 이런 경험이 있는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노련하게 검을 쳐내며 시간을 끌었다.
나도 이번 한 번에 승부가 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음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계속된 싸움에 주도권을 쥔 것은 나였다. 검술 그 자체로는 슬라이트가 더 뛰어나고 경험도 많지만 나는 마법으로 변수를 만들어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승부 자체는 백중세에 가까웠으나 계속해서 끌려다니는 상황이 오자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큰 기술을 연달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녀석의 패착이었다.
"플래시!"
녀석이 시야를 보호하려고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뒤로 물러났다.
"인 줄 알았지? 그리스!"
뒤로 물러나던 슬라이트가 미끄러지며 자세가 무너졌다. 그리스 마법은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우 미끄럽게 만들어주기는 한다. 이렇게 방심하고 있을 때는 아주 유용한 마법이다.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되었다. 자세가 크게 무너진 녀석에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하자 녀석은 회복하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님 이겨라!"
"힘내세요!"
뒤에서 폴과 제시의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공사를 하다 말고 멈춰서 구경하던 인부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바로 홈그라운드의 이점인가?
하지만 슬라이트는 궁지에 몰려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궁지에 몰리자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거의 끝이다. 나에겐 마법 말고도 녀석에게 없는 한 가지 무기가 더 있었다.
곰에게 물려받은 재생력, 여태까지는 다칠만한 일도 없었고 일부러 상처를 내서 확인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그 효과를 확인하기가 힘들었지만, 대련하며 실시간으로 재생력의 효과를 체감하고 있었다.
검을 부딪칠 때마다 뻐근해지는 손목과 찢어질 듯한 손아귀가 재생되는 것이 느껴진다. 반면에 녀석은 이미 손아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단순히 육체 치료뿐만이 아니라 체력 재생의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
대련 시간이 30분을 넘어가며 슬라이트는 연신 거친 숨을 쉬고 있지만 내 호흡은 아직 고르다. 내가 평소에 육체 단련을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재생력의 효과는 확실한 편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술인 것 같다. 배가 무척 고프다. 평소에 소식을 하는 편인 나에게는 좋지 않은 부작용이다.
채앵!
마침내 슬라이트가 손에서 검을 놓치며 검이 하늘을 날아 저 멀리에 떨어졌다.
"으아아아! 제기랄!"
슬라이트는 원통하다는 듯이 땅을 발로 차며 화를 냈다. 참으로 화가 많은 녀석이다.
"내가 이겼지?"
"그래 내가 졌다."
내 확인에 슬라이트가 고개를 숙였다. 의외로 승부에는 순순히 승복하는 녀석이었다.
"우아아아! 기사님이 이겼다!"
폴이 팔짝팔짝 뛰며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이기긴 내가 이겼는데 왜 저 녀석이 소리를 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기사를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오늘 승부는 녀석에게 큰 공부가 됐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 4성 기사가 진지하게 오러와 진검을 사용하는 대을 직접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왕도에선 어떨지 모르겠는데 크리스타 백작령에선 그랬다.
"제시 먹을 것 좀 빨리 준비해줘."
"네~"
배가 고프다 못해 허기가 심장을 찌르는 것 같다. 빨리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슬라이트는 터덜터덜 걸어가서 자기 검을 회수한 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다.
"안 가냐?"
"너 못 이기면 집에 못 돌아간다고 했잖아."
"그럼 들어오든지."
녀석은 아주 당당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주 제집인 것 마냥 거실의 의자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폴에게 명령을 내렸다.
"거기 너! 찬물 좀 가져와라."
과연 공작가 망나니 막내아들다운 행동이었다. 폴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저기 찬물 없는데요?"
그래 우리 집에는 아직 냉장고가 없다. 돈이 없어서 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새집이 완성되면 한꺼번에 주문하려고 그런 것이다.
"뭐? 그런 집이 어디 있어?"
녀석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다 이 자식아. 서민들 기죽이는 거냐? 아니 그건 크리스타 백작가에도 없었다고.
"여기 너희 집 아니다. 멋대로 굴 거면 나가"
내가 싸늘하게 한마디 하자 녀석이 내 눈치를 봤다. 망나니 놈이 내가 한마디 했다고 눈치를 보는 것을 보면 뭔가 공작에게 한 소리 듣고 온 것 같긴 한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녀석이 다시 거만한 자세로 말했지만 그러기에는 행색이 좋지 않았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공터에서 땀을 흘리며 30분이 넘게 오러를 쓰며 대련을 했으니 슬라이트나 나나 먼지 구덩이에서 튀어나온 꼴이었다. 거기에 슬라이트는 한가지 흠이 더 있었다.
"야, 너 피나."
손아귀가 찢어져서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 그러네? 치료마법사는?"
"있겠냐?"
"그럼 포션은?"
"네 것 써라"
"없는데? 내가 그런걸 왜 가지고 다녀?"
아무래도 공작을 만나서 따져야 할 것 같다. 당신 아들이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으니 반품을 하겠다고 해야 할까? 나는 일단 아공간에서 비상용으로 넣어가지고 다니던 포션 중 제일 하급인 것을 하나 꺼내서 던져줬다. 녀석은 아까운 줄도 모르고 벌컥벌컥 마시더니 병을 아무렇게나 탁자 위로 던졌다. 이 망종을 어떻게 사람 흉내를 내게 만들지?
"여기 네 아랫사람은 없다. 모두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그리고 네가 어지럽힌 것은 네가 치워. 싫으면 나가"
나는 다시 한번 경고했다. 정 아니다 싶으면 정말로 내보낼 생각이다. 그다음은 공작이 알아서 하겠지.
"알았다. 너무 무섭게 그러지 마라."
녀석은 내 눈치를 살살 보면서 탁자 위에 포션병을 집어서 슬쩍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묘하다. 뭔가 망나니 같으면서도 쫄보 같은 놈이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타입인가?
"폴, 밀걸레 가져와서 저 녀석에게 줘라."
"네, 기사님"
폴이 쪼르르 달려가서 밀걸레를 가져다가 녀석에게 내밀었다.
"왜? 뭐 어쩌라고?"
"네가 흘린 피 닦아."
슬라이트는 밀걸레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말없이 일어나 어설프게 밀걸레를 붙잡고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걸레질을 하는 모습이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 녀석이 왜 나에게 고분고분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너 여기 말고 갈 곳 없지?"
"..."
대답없이 밀걸레를 잡은 채로 멈춘 녀석을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 공작의 수작이겠지. 여기가 무슨 기숙학원인 줄 아는 건가? 그래도 공작 이름을 팔아 이득을 얻은 것이 적지 않으니 한동안은 데리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사이에 요리를 마친 제시가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아직 식사 때가 아닌지라 간단한 요리로만 준비했는데 위가 쪼그라들 것 같은 허기를 느끼고 있던 나로서는 정신없이 그것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슬라이트가 아주 혐오스러운 것을 봤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너 왜 그런 거 먹어?"
내 손에서 비검처럼 날아간 수저가 녀석의 이마를 강타했다.
제시가 내온 요리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민의 요리를 처음 본 슬라이트가 문제였을 뿐이다. 간단한 식사였지만 평소보다 몇 배는 되는 양을 먹고서야 허기가 좀 가시는 것을 느낀 나는 고열량의 먹을거리를 저장해놓을 필요를 느꼈다.
식사를 마친 후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아직 해가 떠 있으니 바로 검은형제단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는 나를 슬라이트가 따라 나왔다.
"왜 따라오냐?"
"어디 가는데?"
"검은형제단이라고 아냐?"
"알지."
서민의 생활은 모르더라도 그런 것은 아는 건가?
"거기 간다."
"그럼 나도 같이 가."
"너를 왜 데려가야 하는데?"
"도움이 될걸?"
공작가 막내아들을 데려가면 도움이 될까? 공작가의 권력을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의 행실을 보면 가서 패악질이나 부리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데?"
"그거 우리 집에서 운영 하는 거야."
"뭐?"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왕도 뒷세계를 지배하는 조직을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거라고? 왠지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은 것 같다.
"검은형제단을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거라고?"
"응, 뭐 왕실하고 같이 운영하는 것이긴 한데 우리 셋째 형이 관리하고 있으니 우리 집에서 하는 게 맞지."
세계의 어두운 부분을 알아버린 것 같다. 공작가 뿐만 아니라 왕실까지 엮여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거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거냐?"
"음,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안 될걸?"
"아는 사람은?"
"거의 다 죽었어."
이 새끼, 이런 식으로 나를 암살할 생각이었구나. 내가 죽기 전에 이 녀석을 먼저 죽여야겠다. 내가 검을 꺼내려고 하는 찰나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빠가 넌 괜찮다고 했어. 대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면 안 된데."
그 말이 너를 살렸다. 공작은 왜 나에게 그런 극비사항을 흘리는 것을 허용했을까? 나를 그 정도로 믿는 건가? 그럴 리는 없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거기 왜 가는데?"
"새 신분증을 만들려고."
여기까지 와서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기 안에 꼬마랑 아줌마? 아빠에게 대충 들었어. 그런데 용케 걸리지 않고 왕도 안으로 들였다고 아빠가 놀라워 했어."
그야 지구에 있다가 나왔으니 그렇지. 하지만 그것은 왕실과 공작가가 검은형제단을 운영한다는 것보다 더 비밀인 이야기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럼, 검은형제단에서 만드는 신분증은 진짜인가?"
"응, 진짜 신분증이야. 가짜 아니야."
왕실에서 운영하는 곳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니 위조신분증이 발각된 적이 없지. 진짜니까.
"왜 그런 짓을 하지?"
"복잡한 것은 잘 모르는데 대충 듣기로는 수상한 놈들을 확실히 관리하려면 이게 더 편하다고 하던데?"
확실히 그렇다. 이런 방법을 쓰면 단순히 범죄자뿐만이 아니라 몰래 숨어들어온 타국의 첩자들도 관리가 가능하다.
"그런데 검은형제단에 네가 직접 가도 되는 건가?"
공작가 막내아들이 뒷세계 조직 본부에 찾아간다? 좋은 소리가 나오진 않을 것이다.
"망나니가 뭘 하든 누가 신경 쓰겠어?"
녀석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이 녀석 소문처럼 마냥 망나니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