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폭력 멈춰
출발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타고 갈 마동차를 고르는 것부터 의견이 엇갈렸다.
"야, 이런 걸 부끄럽게 어떻게 타?"
녀석이 내 붕붕이를 가리키며 얼굴을 붉혔다. 감히 내 붕붕이를 모욕한 것인가? 나를 욕하는 것도 못 참지만 붕붕이를 욕하는 것도 참을 수 없지.
"감히 내 붕붕이를 모욕해? 닥치고 타라."
"이름도 촌스럽네. 싫어. 내 차 타고 가자."
녀석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녀석의 마동차, 마치 전생의 람보형이 좋아했을 것 같은 미끈한 유선형의 마동차였다. 거기에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소리도 비슷하다. 그런데 저걸 타고 다니는 게 시선을 더 끌지 않을까?
"그런데 너 거기 위치는 아냐?"
나야 주소를 알고 있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아무리 자기네 집에서 하는 비밀 사업이라고 해도 이 녀석이 거길 직접 가봤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서로의 접점을 숨겨야 하니 말이다.
"어... 모르는데?"
역시 그렇다. 허당 같은 놈.
"그럼 닥치고 타라."
슬라이트가 멍하니 있다가 군말 없이 붕붕이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검은형제단의 본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소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만 있는 빈민가에 혼자 오롯이 솟아 ----- 5층짜리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뒷세계 조직이 이렇게 대놓고 커다란 본부를 가지고 버젓이 활동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왕실과 공작가를 뒷배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맞긴 한 것 같았다.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들어가려고 하자 덩치 좋은 어깨 형님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너희들 용건이 뭐냐?"
"용무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신분증을 새로 만드는 걸 여기가 잘한다고 해서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돈은 있나? 그거 꽤 비싸다."
"네, 아마 충분할 겁니다."
이렇게 잘 이야기가 되어가는 참에 옆에서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튀어나왔다.
"야! 너희들 나를 몰라?"
슬라이트 녀석이 어느새 저쪽에서 다른 어깨 형님들과 시비가 붙었다.
"나 슬라이트 에인프라흐야!"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가슴을 내밀며 당당한 포즈를 취하자 어깨들이 어이가 없는지 비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말릴 사이도 없었다. 슬라이트가 번개처럼 주먹을 날렸다.
슬라이트의 주먹을 맞은 녀석이 공중에 3초 정도 머물렀다가 땅에 떨어졌다. 내 눈에는 그게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이 새끼 뭐야!"
"쳐라!"
입구 쪽에 나와 있던 어깨 형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무리 덩치 좋은 건달들이라 해봐야 일반인이고 슬라이트는 4성 기사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슬라이트가 날아다니자 건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때 위험한 느낌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바람을 가르며 주먹이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좋은 분위기로 나와 대화를 나누던 건달이었다.
"아니 나는 왜?"
"너 저놈하고 한 패거리잖아? 저 거지 같은 마동차 같이 타고 온 것 다 봤다."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이렇게 억울한 것은 전생에 대격변이 터지기 직전에 치킨을 주문해서 치킨도 못 먹고 돈만 결제된 것 이후로 처음이다.
그런데 방금 붕붕이를 모욕했지? 그건 못 참지.
내가 참전하자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일반인들 있는 곳에 4성 기사 둘이 뛰어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바깥의 상황이 안에 전해졌는지 5층 건물에서 건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적습이다!"
"우아아아아!"
"쳐 죽여!"
정말 건달들이 끝도 없이 몰려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도 큰 건물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이 많은 인간이 그 안에서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오는 것은 일반 건달뿐만이 아니었다. 2성이나 3성에 불과하지만 오러 사용자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오러 사용자가 택시 기사도 하는 곳이니 건달 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슬라이트 놈과 등을 맞대고 싸우던 우리는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야! 정신 차려!"
"이 자식아!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녀석이 정신 차리라고 했지만 나는 초감각을 활용해서 별로 맞지 않았다. 체력도 쌩쌩한 편이었고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슬라이트는 이미 한쪽 눈이 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문제다. 우리가 밀리고 있다고는 해도 둘 다 멀쩡한 데 비해 검은형제단은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건달들이 50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아직 100명도 넘는 건달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뭐해 죽여!"
"무조건 잡고 버텨!"
건달들에게서 느껴지는 적의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슬슬 도망을 칠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슬라이트 놈이 사고를 쳤다.
챙!
"야! 이 새끼들아, 다 덤벼!"
슬라이트 놈이 먼저 검을 뽑았다.
"야이 미친놈아! 당장 그거 집어넣어!"
사방에서 느껴지는 적의가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슬라이트가 검을 뽑기 무섭게 우리를 포위하고 있던 100명이 넘는 인원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기 시작했다.
이제 주먹으로 맞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다. 물론 검은형제단쪽이 훨씬 많이 죽겠지만 우리가 무사할 수 있을까? 나는 여차하면 지구로 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만이 들릴 뿐 백여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멈춰라!!!"
오러가 실린 고함이 울려 퍼졌다. 나조차도 귀가 먹먹할 정도였으니 경지가 낮은 건달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견디지 못한 건달들이 비틀거리면서 쓰러졌다. 전생을 통틀어 폭력 멈춰가 실현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검은형제단 본부 앞에 정말 덩치가 어마어마한 사내가 거신상처럼 우뚝 서서 장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강자다. 에인프라흐 공작 이후로 처음 보는 강자다. 나보다 강한 것은 확실하지만 경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최소 6성 기사다. 저 정도의 인물이 검은형제단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옆에 상대적으로 굉장히 왜소해 보이는 호리호리한 인물도 있었다. 오러가 아닌 마나가 느껴진다. 마법사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이다.
"거기 도련님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따라와"
거신상 같은 사내가 굵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우리를 불렀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건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슬라이트와 나는 그 길을 걸어서 사내를 따라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형제단 본부의 내부는 상당히 미로처럼 되어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러면 평소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불편한 것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수십 개의 모퉁이를 돌아 5층의 커다란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에는 거대한 사내와 호리호리한 마법사 그리고 나와 슬라이트만이 남았다.
"공자님 오시려면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호리호리한 마법사가 여태까지 싸늘하게 굳어있던 인상을 풀고 온화하게 웃으면서 슬라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대한 사내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저 마법사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강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온화하게 웃고 있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당장 죽이고 싶은 것 같은 강렬한 적의가 느껴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저 덩치 큰 사내는 아마도 공작가의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마법사는 왕실 쪽 사람인가? 나는 여태까지 공작가와 왕실의 사이가 좋은 줄 알고 있었다.
당장 황태자비가 에인프라흐 공작의 딸이다. 즉 다음 황제가 공작의 사위라는 것이고 내 옆에서 실실거리고 있는 생각 없는 망나니 놈의 매형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괜히 귀찮은 사실을 알아버린 느낌이다.
"나를 못 알아볼 줄은 몰랐지."
망나니 놈이 당당하게 대답한다. 알아보면 더 문제 아니냐? 공작가가 검은형제단을 운영하는 거 극비라면서?
"무식한 깡패놈들이야 원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다음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혼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법사가 슬라이트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질문을 했다.
"그건"
"그건 여기 두목님? 맞죠? 두목님하고만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슬라이트의 말을 자르고 덩치 큰 사내를 지목했다. 두목이라는 말에 덩치와 마법사의 표정이 조금 변했지만, 위장이고 뭐고 깡패 두목인 건 맞지 않나?
"그렇다는군. 에일로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덩치는 잠시 생각하더니 마법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법사의 이름이 에일로이였군. 순간 마법사에게서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적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변화 없이 온화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편하시다면 자리를 비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에일로이가 방을 나가자 망나니가 덩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브루노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망나니를 바라보는 산적 두목처럼 생긴 덩치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걸렸다. 역시 덩치는 공작가의 사람이 맞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이웃이 된 분이시군."
브루노라 불린 두목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봐도 정말 덩치가 큰 사람이다. 대충 봐도 키가 2미터는 훌쩍 넘고 2미터 30센티 정도 될까? 거기에 온몸이 터질듯한 근육이 갑옷처럼 몸을 감싸고 있었다. 저런 육체에 6성 기사라니 전장에 풀어놓으면 그야말로 인간병기가 따로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놀라지 않았다. 왕도에서는 '암흑'보다 정보 수준이 높은 조직이라고 하니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에일로이를 내보낸 이유를 물어도 될까?"
"이곳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같은 편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대답에 브루노는 눈을 크게 뜨며 매우 놀랐다는 표정을 했다. 안 그래도 산적 두목처럼 생긴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짓자 더 무서워 보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냥 보니까 한눈에 알 수 있더군요."
내가 초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통찰력을 타고난 건가? 대단하군. 그리고 도련님과 함께 온 것을 보니 승부에서 자네가 이긴 모양인데 그것도 대단하군. 아무리 마검사라고 해도 도련님 또래에서 설마 도련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그래서 에일로이라는 마법사의 정체는 뭡니까?"
"5서클 마법사네 왕실에서 파견된 사람이지 정확히는 내무대신 나단 오페르 후작의 사람일세."
정치 파벌 싸움인 건가? 에인프라흐 공작가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에인프라흐 공작가 외에도 몇 개의 가문이 만만치 않은 성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내무대신을 맡고 있는 나단 오페르 후작이다. 귀찮은 사실을 또 알아버렸다. 아니 얽혔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작은 부탁을 하러 왔습니다."
"자네가 거두고 있는 두 사람의 신분증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보다 자네가 그 두 사람을 어떻게 왕도 안으로 데리고 왔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더군. 방법을 알려줄 수 있겠나? 왕도의 보안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네."
"그것은 제 밑천이라서 알려드릴 수 없겠군요. 하지만 장담하건대 저 외에는 불가능한 방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브루노는 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인데 참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생긴 것과 다르게 머리도 좋은 사람이다. 정보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 자네의 일을 처리해야지."
브루노는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방에서 나가더니 잠시 후에 신분증 두 개를 가지고 왔다. 평민의 신분증이야 나무로 파는 것이니 제작이 어려울 리는 없었다.
"이름이 바뀌었군요?"
"기왕 바꾸는 것 이름까지 바꾸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나? 그래도 최대한 비슷한 이름으로 했네."
폴의 새로운 이름은 폴켄, 제시의 새로운 이름은 제이시였다. 그래도 상당히 신경을 써준 모양이다.
"그보다 오늘 소동을 우리가 좀 이용해도 되겠는가? 대신 신분증 비용은 받지 않겠네."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신분증 재발급 비용을 무료로 해준다니 알겠다고 했다. 분위기를 보니 거절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느낌이기도 했고 기왕이면 이득을 취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며칠 후 왕도에는 한 가지 소문이 퍼졌다. 공작가의 5공자와 친구가 100명이 넘는 깡패들을 응징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