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도련님 부대
한동안 밖을 나가지 못했다. 식료품을 사러 시장에만 나가도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검은형제단의 브루노가 의도적으로 낸 소문은 나와 슬라이트에게 '정의의 철권 형제'라는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별명을 붙여주었다. 억울하다. 내가 왜 저런 놈과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슬라이트 놈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듯했다. 녀석은 이 소문의 최대 수혜자다. 그냥 단순한 망나니에서 정의로운 망나니로 승급했기 때문이다. 물론 녀석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유명해지니 좋아하는 듯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도 명성을 원했지만 이런 식의 명성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괘씸한 마음에 슬라이트 놈에게는 밥값이라도 하라는 뜻으로 이제는 폴켄이 되어버린 폴의 수업을 맡겼다. 슬라이트는 나보다 검술에 대한 재능이나 이론이 뛰어나고 다른 학문도 공작가의 좋은 교육을 받아 지식수준이 뛰어났다. 단지 본인이 배운 대로 실천하지를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슬라이트는 의외로 가르치는 것에는 재능이 있었다. 평소 행실과는 전혀 다르게 폴켄이 이해를 잘하지 못해도 타박하지 않고 차분히 모르는 점을 지도했다. 내가 가르칠 때보다 폴켄의 성장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지만 슬라이트는 확실히 좋은 스승이었다.
"부하로 받아주십시오!"
소문이 퍼지자 저런 소리를 하며 우리 집으로 찾아온 녀석들이 있었다. 정의의 협객을 꿈꾸는 귀족 도련님들이었다. 대부분 하급 귀족의 자식들로 정말 바보처럼 협객이 되고 싶다고 온 놈도 있었고 아니면 슬라이트와 연을 맺어 공작가의 덕을 보겠다고 찾아온 녀석들도 있었다.
실력은 전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1성 기사가 그나마 몇 명 있었고 나머지는 그냥 일반인이었다.
하지만 정말 심각할 정도로 하자가 있는 놈들과 너무 대놓고 슬라이트에게 들이대는 녀석들 몇을 제외하곤 받아들였다. 그렇게 남은 것이 11명이었다.
모두 기사 가문의 자제들이었고 정신적인 문제도 있지만 대부분 재능이 없어서 반쯤은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들이었다. 그럼에도 받아들였다.
나름 왕도에 사는 귀족의 자식들이다. 유용하게 사용할 데가 있을 것이다. 받아준다고 크게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밥값 정도랄까. 아니 오히려 돈이 벌렸다. 활동비로 사용해 달라면서 기부금을 낸 녀석들이 있었다. 나는 11명의 도련님 부대까지 폴켄의 훈련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도련님 부대의 훈련에 나도 교관으로서 참여했다. 뭔가 특이한걸 가르칠만한게 없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생각난 것이 바로 태권도였다.
딱히 태권도를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군대에서 배운 것에 불과한데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궁리 끝에 만들어진 것이 이종격투기와 태권도를 적당히 섞은 무술이 되었다.
이름도 정의의 철권 형제가 가르치는 것이니 철권도라고 지었다. 도련님 부대는 철권도를 처음 보고 열광했다. 태권도의 발차기는 일단 동작이 화려하니까. 사실 540도 돌려차기 같은 것은 오러 사용자에게는 그리 어려운 동작이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슬라이트도 철권도를 보더니 진지하게 반응했다.
"너 그거 어디서 배운 거냐?"
"내가 어제 대충 만든 건데?"
"엉성한 부분이 좀 있긴 하지만, 은근히 좋은 무술 같은데? 화려하면서도 실용성이 있어 그냥 대충 만들어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천재께서 극찬하셨다. 그야 그렇겠지, 이종격투기의 실용적인 부분과 태권도의 화려한 부분을 합쳤으니까. 엉성한 부분은 내가 손을 댄 부분일 것이다. 철권도를 다시 보여주는 나를 보는 슬라이트의 눈빛이 조금 변한 것 같은 것은 착각이겠지? 다음날 슬라이트는 조금 부자연스러웠던 철권도의 동작을 개량해서 가져왔다. 역시 천재는 천재였다. 어쨌든 그렇게 철권도는 도련님 부대의 정식 무술이 되었다.
매일 훈련 받느라 고생하며 돈까지 가져다 바치는 도련님 부대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큰맘 먹고 점심 식사에 꼬꼬들의 알을 베풀기로 했다.
찰리 데커와 대화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것인데 왕도에서 마력을 품은 알은 아주 구하지 못할 수준의 물건이 아니었다.
일명 고악새라고 불리는 마수가 있다. 키는 대략 2미터 정도에 타조와 비슷한 체형을 가진 마수인데 다만 타조와 다른 점이라면 날개 대신 아주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팔이 달려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타조보다 훨씬 빠르고 발톱과 부리는 무언가를 찢어 죽이는 것에 특화되어있다.
어쨌든 소형 마수 중에 최상급의 전투력을 가진 이 마수의 알이 바로 마력을 품고 있는 마력란이었다. 워낙 흉포한 마수인 탓에 알을 품고 있을 때 접근하기가 쉽지 않지만, 인간의 탐욕이란 무엇인지 돈이 되니 고악새를 유인한 후 알만 훔쳐 나오는 전문 사냥꾼이 제법 있다고 한다.
물론 고악새 자체가 흔한 마수도 아니고 목숨을 걸고 알을 훔쳐야 하는 만큼 고악새의 마력란은 사치품으로 취급된다고 했다. 물론 고악새라는 마수를 나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왕도에서 생각보다 쉽게 고악새의 알이 유통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고악새 알이라고 말하고 꼬꼬들의 알을 내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꼬꼬들의 달걀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나 혼자 섭취하는 것으로는 생산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쌓인 달걀이 상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썩혀서 버리느니 인심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비밀이었다.
"오늘 점심은 특식으로 고악새의 알이야. 이게 뭔지는 다들 알지?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니 맛있게 먹도록 해."
"우오오오!!"
고악새의 알이라고 하고 꼬꼬들의 알을 베풀자 도련님 부대는 매우 감격하며 노른자 부스러기 하나도 흘리지 않고 마력란을 먹어 치웠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마력란을 먹고 나서 심법을 운용하던 도련님 부대 중 세 명이 오러를 각성한 것이다. 그동안 각자 가문의 심법을 수련했지만 오러홀을 열지 못한 이들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으헝헝헝!"
"으흐흑!"
단순히 때가 되었는데 마력란이 조금 도움을 준 것인지 아니면 안 될 사람인데 마력란이 뭔가 작용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러를 깨우친 세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오러의 재능도 확인받았으나 그동안 오러홀도 깨우지 못했으니 가문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눈칫밥을 먹었던 이들이다. 그래서 더욱 엇나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드디어 오러홀을 깨웠으니 그동안의 설움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도련님 부대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심정을 이해했기에 같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으로 세 사람을 축하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이곳에 온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세 사람은 집에 돌아갈 때까지 쉬지 않고 감사 인사를 했다. 이렇게 도련님 부대 11명 중에 오러 사용자는 기존의 세 명을 포함해 여섯 명이 되었다.
다음 날부터 훈련에 임하는 도련님 부대의 자세가 더욱 진지해졌다. 나로서는 과연 이 도련님들이 실전에 들어갈 날이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전력 상승과는 별도로 오러를 깨달은 도련님들의 집에서 많은 선물을 보내왔다는 점은 나를 흡족하게 했다.
그런데 그 전투에 써먹을 날이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철권님들 제발 도와주십시오! 이러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어헝헝!"
평범하고 평화롭게 지나가던 어느 날, 제법 살집이 있는 중년인과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집 앞에 우르르 몰려와서 엎드려 울부짖었다.
"누구신데 여기에 와서 그러십니까?"
그래도 집주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내가 먼저 나서서 중년인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저는 도축업자 대표인 페미컨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우리 조합원들이고요."
페미컨 그거 더럽게 맛없는 건데. 대격변 초기에 어떤 놈이 비상식을 만들 줄 안다며 설레발을 치더니 페미컨을 만들어서 생존자들에게 먹였는데 그 후 며칠 못 가서 변이체에게 죽지 않았다면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맛이 없었다.
"도축업자라면 여기 바로 이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여기 젠투 이 친구가 바로 저기 도축장을 운영하는 친구입니다."
페미컨이 뒤에 따라와서 엎드렸던 근육질의 아저씨를 일으켜 세우며 소개했다.
"이사 온 지 꽤 됐는데도 이렇게 인사를 드리네요. 상황이 이래서 좀 당황스럽긴 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나는 젠투에게 먼저 사과했고 젠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넘겼다. 사실 이웃들에게 인사를 진즉에 하려고 했었으나 여러 가지 일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내 사회성 결여가 발목을 잡았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철권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철권님들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페미컨의 시선은 어느새 몰려와서 내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슬라이트와 도련님 부대 중에 정확히 슬라이트를 향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힘을 좀 빌리고 싶다는 건가?"
"그러니 어떤 일 때문에 이렇게 오셨는지 알아야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채업자 놈들 때문에 저희 사업장이 다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돈을 빌리셨나요?"
"사실상 강제로 돈을 빌리게 했지요. 그리고 어마어마한 이자를 뜯어내다 못해 이제는 사업장을 넘기라고 합니다. 억울합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특히 페미컨에게는 한번 크게 속은 적이 있기 때문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라고 해도 쉽게 믿을 수가 없다.
"사채업자들과 마찰이라면 여기가 아니라 경비대나 치안국을 찾아가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으헝헝! 그게 문제입니다. 모두 다 한통속입니다. 우리 편은 하나도 없어요."
페미컨 아저씨는 투실투실한 볼살이 흔들릴 정도로 흥분하며 다시 우는 시늉을 했다.
"어째서 한통속이라고 생각하시죠?"
"신고를 아무리 해도 나와서 조사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항의하러 간 우리 조합원을 잡아서 구속했어요!"
"혹시 치안국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시나요?"
불법 조직과 경찰의 유착은 전생의 뉴스에서도 많이 봤던 일이다. 그런데 사채업자가 도축업 조합 전체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하는데 치안국과 경비대가 모두 모른 척 한다? 단순히 뇌물 몇푼 먹는 것으로 그러진 않을 것이다. 보통 사채업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사채업자 놈들 뒤에 뒷배가 있습니다. 그 귀족이 우리 도축업체들을 통째로 먹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페미컨 아저씨와 도축업자들이 피를 토하듯이 도움을 호소했지만 내 머리는 차갑게 돌아갔다. 억울하긴 하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어떻게 보면 흔한 이야기다. 아니 지구에서도 그런 일은 있었으니 사람이 모이고 이권이 있는 곳에서는 흔한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아직 사실인지도 알 수 없다. 페미컨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을 생각하면 아직 말을 하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슬라이트를 찾아온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공작가의 힘을 끌어다 쓰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찰리 데커에게 듣기로 도축업자들이 움직이는 돈이 꽤 만만치 않았다. 찰리 데커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거대한 도시에 고기를 공급하는 이들이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할지라도 저런 식으로 삼키기에는 덩어리가 너무 크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상당한 고위 귀족이 엮여 있을 것이다. 아무리 슬라이트가 공작가의 다섯째 아들이라고 해도 그 정도 힘을 가진 고위 귀족을 슬라이트의 이름값만으로 몰아낼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공작이나 장남이 직접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에인프라흐 공작이나 슬라이트의 큰형이 직접 움직여 줄까? 그들도 귀족이고 철저히 가문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다. 다른 고위 귀족과 맞서는 일은 반갑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느낌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차 싶었다. 슬라이트와 도련님 부대의 눈이 돌아가 있었다.
"가즈아!!"
"우오오오오오!"
슬라이트가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채업자를 때려죽일 기세로 외치자 뒤따라서 도련님 부대들이 뒤따라서 하찮은 포효를 내질렀다.
"제발 가만있어 미친놈아!"
이미 흥분해서 튀어 나가고 있는 슬라이트의 뒤통수에 나의 철권이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