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25화 (25/206)

25. 초콜릿 나라의 공주님

"아파요. 도와주세요."

녀석이 갑자기 울먹이며 말한다. 녀석은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렇게 했을 때 인간을 가장 방심하게 하거나 인간이 쉽게 다가온다는 것을 학습해서 그대로 하는 것뿐이다.

변이체는 알려진 것으로만 수십 가지의 개체가 있다. 실제 판타지 소설에 나오던 도플갱어는 아니지만, 생존자들은 눈앞의 녀석을 도플갱어라고 불렀었다. 마음대로 형태를 바꿔서 인간이 모여있는 곳에 숨어들어와 학살을 저지르는 녀석이다.

도플갱어의 소문은 많이 들었었지만 직접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안산에 있던 중간 규모의 쉘터에 소속되어 있을 때였다. 대격변이 일어나고 5년이었나 6년이었나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그때쯤이었을 거다.

안산의 쉘터에는 희진이라는 소녀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대격변 이후의 시대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던 아이였다.

늘 밝았고 항상 남을 돕기 위해 애썼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대격변 이후에 긴 시간을 살아남은 생존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혼자만 대격변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아이였다. 그래서 희진이를 좋아하는 생존자들도 많았다.

외모도 정말 아름다웠다. 꾸미지도 못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던 그런 상황이었지만 가끔은 있지도 않은 후광이 보일 정도로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던 아이였다. 아마 대격변이 없었다면 분명히 걸그룹 센터나 연기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미모 덕분에 못된 짓도 자주 당할 뻔했지만 한 번도 그런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천사, 희진이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천사 같았던 아이였다.

그때만 해도 나도 아직 때가 덜 묻었던지라 그런 희진이를 보다 못해 내 보호 아래 두고 보살폈다. 누군가는 생존능력이 없는 희진이를 보살피는 나를 호구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나는 희진이를 보살피며 삭막한 세상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었다.

그리고 안산 쉘터에 도플갱어가 다른 생존자의 모습으로 침투해 들어왔던 날, 희진이는 죽었다. 도플갱어에게 붙잡혀 산 채로 뜯어먹히는 중에도 희진이는 웃었다.

도플갱어는 유일한 개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아는 녀석이라고 확신했던 이유? 녀석이 희진이의 모습을 따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저 모습을 유지하는 이유는 사람 사냥을 하는 것에 저 모습이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었겠지. 정말 예쁜 아이였으니까.

"아저씨 나는 괜찮아"

희진이가 산채로 뜯어먹히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녀석이 내뱉었다. 병신같았던 강한수는 그때 그 말을 듣고서 뒤돌아 도망쳤다. 머저리처럼 울면서 도망쳤었다.

"난 안 괜찮아!"

나는 빅터 하네스다.

아공간에 옮겨놨었던 용사의 신검 슈바르거트를 꺼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도 없는 붉은색의 검신 덕분에 밖에서는 꺼내 사용할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상관없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과연 상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기본적으로 진화한 변이체들은 대전차 미사일 정도는 맞아도 아무렇지 않았던 놈들이다. 들었던 소문으로는 미국과 중국에선 핵을 사용했음에도 죽이지 못했던 개체도 있다고 했다.

4성 기사의 검격이 대전차 미사일보다 강력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마 아니지 않을까?

4개의 별이 오러홀을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하고 그 힘을 전해 받은 다리가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도플갱어와의 거리가 좁혀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오차 하나 없이 평소에 연습했던 그대로의 검로로 신검이 도플갱어의 목을 노렸다.

챙!

하지만 검은 도플갱어의 목에 닿지 못했다. 희진이의 탈을 쓴 도플갱어의 팔이 연체동물처럼 휘어지며 마치 채찍같이 날아와 검을 쳐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챙! 챙! 챙!

3연속으로 내지른 검을 녀석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한쪽 팔만 휘둘러 쳐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뭐냐고? 녀석은 확실히 강하다.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른 한 가지도 확실하다. 이런 것은 변이체의 싸움 방식이 아니다.

변이체는 어떤 놈이든 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활용해 가장 짧은 시간에 먹이를 사냥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움직이지도 않고 한쪽 팔만 써서 방어만 한다고? 이것은 녀석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싸움 생각보다 해볼 만 할지도 모른다.

쉬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내 체력과 오러가 바닥나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녀석이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일지 싸움이다.

"끼아아아아아악!"

녀석이 갑자기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비명을 질렀다. 경계하는 마음이 생겨 공격이 한 템포 늦어진 틈에 녀석이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났다. 찰나의 순간에 상당한 거리가 생겨버렸다.

도망치는 건가? 아니 내가 아는 변이체는 그런 놈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도 처음 본다. 싸움 방식도 진화한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우둑! 우두둑!

그때 녀석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 희진이의 외형이 유인하기는 좋아도 싸우는데 적합한 형태는 아니다. 그런데 변신 매너? 그딴 거 당연히 없다.

아공간에서 스크롤 한장을 꺼내 바로 찢었다. 스트라이더 997번에 저장되어있던 전투용 스크롤 중에 하나 아이스 스피어다. 4 서클 마법으로 대인용으로는 강력한 마법 중에 하나다. 파괴력이 더 강한 스크롤도 있지만 이곳은 실내다. 익스플로전 같은 스크롤을 사용하면 같이 죽는다. 아니 나 혼자 죽을 확률이 더 높겠지.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창이 허공에 생성되자마자 변신을 하고 있는 녀석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 뒤에 숨어서 같이 뛰어들었다.

변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도플갱어의 몸통에서 기다란 가시 같은 것이 쏘아져 나와 아이스 스피어를 꿰뚫었다. 그러나 아이스 스피어를 선택한 것은 관통력 때문이 아니다.

검도 아무렇지도 않게 쳐내는데 그에 비해 느린 아이스 스피어를 막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이스 스피어는 파괴됐지만 폭발하듯이 확산된 냉기가 그대로 도플갱어를 덮쳤다.

순식간에 도플갱어가 얼어붙으며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변신이 되다만 상태의 녀석은 기괴한 살덩어리 같았다. 하지만 이것이 녀석의 본모습에 가깝다.

도플갱어는 애초에 슬라임과 비슷한 부정형의 괴물이다. 상황에 맞게 형태를 변화해서 움직일 뿐이다.

카카칵!

기괴한 소리를 내며 신검이 얼어붙은 도플갱어의 몸 한가운데 꽂혔다. 이것으로 끝일까? 아니다. 이렇게 죽이기 쉬웠다면 인류가 멸망할 일은 없었겠지.

나는 검에 꽂힌 녀석을 그대로 밀어붙이며 창밖으로 함께 몸을 던졌다.

퍼퍼퍼퍽!

"으윽!"

얼어붙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적응이 된 것인지 얼음을 뚫고 몇 개의 가시가 쏘아져 나왔다. 급히 몸을 비틀었지만, 가시 몇 개가 몸을 파고들었다.

그 와중에도 정확히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리고 쏘아진 가시였다. 그래서 오히려 피하기는 쉬웠다. 그래도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목 대신 어깨를 내줬고 심장을 노리던 가시는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치사하게 고간을 노린 가시는 허벅지에 시원한 구멍을 만들어줬다.

쿵!

땅에 부딪히며 도플갱어와 떨어졌다. 그 사이 몇 개의 가시가 한 번 더 내 목숨을 노렸지만, 검으로 쳐내며 더욱 거리를 벌렸다.

2층에서 뛰어내린 것이라 땅에 부딪힌 충격은 그리 크진 않았다. 어깨와 허벅지도 참을 만했으나 옆구리가 심상치 않았다. 뻥 뚫린 옆구리로 피가 수압 좋은 집의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졌다. 하지만 치료보다 먼저인 것이 있다.

찌이익!

내 손에 들려있던 또 한 장의 스크롤이 찢어졌다. 스트라이더 997번 안에도 유일하게 단 한장만이 들어있던 7 서클 공격 마법

"인페르노 스트라이크"

푸하아아악!

지옥의 업화가 도플갱어의 발밑에서 화산처럼 솟아올랐다. 대전차 미사일은 견뎠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약해진 지금이라면 절대 견디지 못한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끼에에에에엑! 끄에에에에에!"

도플갱어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진다. 녀석이 발광하며 이리저리 움직여보지만 한번 붙은 지옥의 업화는 상대의 생명을 모두 태울 때까지 꺼지지 않는다.

초감각이 경고하는 위험수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일까? 시야가 조금 흐려졌다. 녀석의 비명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땅에 드러누웠다. 차가운 땅의 느낌이 좋다.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불현듯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안산 쉘터에 도플갱어가 침투하기 한참 전이다. 바깥 탐색에서 운 좋게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 한봉지를 얻은 날이었다. 유통기한이야 이미 한참 지난 것이지만 쉘터로 돌아와 희진이와 초콜릿을 나누어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초콜릿은 달았다. 혀가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아저씨 옛날에는 이런 게 많았지요?"

"너도 어렸을 때 많이 먹지 않았어?"

"아뇨, 엄마가 이빨 썩는다고 못 먹게 했어요."

"그건 아쉽네."

"너무 맛있다. 다음 생에는 초콜릿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어"

"다음 생이 있으면 말이지."

"있을걸요? 아저씨는 다음 생에 어디서 태어나고 싶어요?"

"글쎄... 어디서 태어나든지 저 빌어먹을 놈들 때려잡을 수 있는 힘만 있으면 좋겠네."

눈이 번쩍 떠졌다. 나는 저 빌어먹을 변이체 놈들을 때려잡을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아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방랑형 변이체를 상대로도 스크롤이 없었다면 오늘 나는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해질 가능성은 있는가? 그건 있다. 나는 아직 15살이고 제대로 수련한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에인프라흐 공작 같은 괴물이 되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7성 아니 6성 기사만 되더라도 오늘 만난 녀석 정도는 승산이 있다.

아공간에서 최상급 포션을 꺼내 반쯤은 상처에 대충 들이붓고 나머지는 마셨다. 아이스 스피어의 냉기를 같이 받으면서 얻은 동상과 구멍이 숭숭 뚫린 몸뚱이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재생력과 시너지 효과가 난 덕분인지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검을 지팡이 삼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놀랍게도 도플갱어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주변의 땅을 다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웠던 지옥의 업화도 이제 거의 다 꺼져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시커먼 숯덩이가 되었고 여전히 몸의 여러 군데에 붙은 불길이 몸을 태우고 있었지만, 녀석은 뜨거운 대지를 피해 처절할 정도로 바득바득 기어서 벗어나고 있었다. 지독할 정도의 생명력이다. 아니 저놈들은 생명체라고 할 수도 없으니 생명력은 아닌가?

천천히 기어가는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녀석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초감각이 알려주는 위험 반응도 이제 없다. 단지 지독한 적대감만이 나를 향할 뿐이다.

푹!

무심하게 내질러진 검이 녀석을 찔렀다. 비명조차 내지를 힘이 없는 녀석을 계속해서 찔렀다.

푹! 푹! 푹! 푹! 푹! 푹!

그렇게 수십 번을 찔렀을 때 조금씩이라도 움찔거리던 녀석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마침내 녀석이 죽었다.

그제야 몸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아직 아물고 있는 상처에서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더럽게 아프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렇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드러누워 혹시 몰라 준비해뒀던 사탕을 꺼내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재생력을 사용한 대가로 엄청난 허기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사탕을 씹어 삼키면서 초콜렛 색으로 숯덩이가 된 도플갱어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희진이는 초콜릿 나라에서 다시 태어났을까? 나 같은 놈도 이렇게 환생했으니 분명 그럴 것이다. 초콜릿 나라 공주가 되었겠지.

몸 상태가 어느 정도 돌아온 후 도플갱어의 시체를 아공간에 담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지금은 아니어도 실력 있는 마법사에게 변이체에 대한 연구를 맡긴다면 녀석들의 정체나 혹은 약점에 대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별로 직접 손을 대고 싶진 않았지만, 숯덩이가 된 도플갱어에 손을 닿는 순간 또 한 번의 각성이 있었다. 익숙한 감각이다. 지난번 곰의 시체를 만졌을 때와 같았다. 한 번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두 번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 이것은 제법 유용할지도 모른다. 아니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도축업자 사건에 대한 계획을 전부 바꾸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