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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26화 (26/206)

26. 넌 이미 죽어있다.

새로 얻은 능력은 신체 변형, 도플갱어의 대표적인 능력을 전승받았다. 능력을 새로 각성한 것은 알지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모른다. 내 초감각이나 재생력처럼 알아서 자동으로 작동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른손을 들어 노려보며 대격변 이전에 아주 읽었던 만화책의 오른손을 상상하며 변형되라는 생각을 해봤다.

우두두둑!

"아악! 아아악!"

된다. 되긴 되는데 엄청나게 아프다. 뼈를 강제로 꺾고 살을 억지로 잡아당겨서 찢는 느낌이다. 손바닥에 입도 생기고 길쭉하게 늘어난 손가락 두 개 끝에 눈도 생겼다. 눈동자가 스르륵하고 움직이면서 나를 쳐다보는데, 무척 기분이 나쁘다. 그래도 말은 못 해서 다행이네.

생각보다 쉽게 작동되긴 하는데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겨우 손 하나 바꾸는데 이 정도라면 도플갱어처럼 전신을 변형시키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당장 써먹을 일이 코앞에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강한 진통제라도 준비해 둬야겠다.

이를 악물고 손을 원래대로 복구시킨 뒤 다시 사탕을 한 주먹 꺼내 씹어먹었다. 역시 이것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지 허기를 동반한다. 초감각은 그런 부작용이 없었는데 재생력과 이것은 왜 그럴까? 남의 능력을 사용하는 대가일까?

통로가 열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꼬꼬들이 있던 방을 들렀다. 꼬이와 꼬삼이가 구석에 모여 아직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죽은 건 꼬일이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수컷이라고 암컷들을 지키다 죽었나 보다. 얼마 남진 않았지만 꼬일이의 잔해를 잘 모아 묻어주었다. 꼬일이의 시체를 만질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새로운 각성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도 나름의 조건이 있는 것 같았다.

꼬일이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꼬꼬별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왕이 되겠지 꼬일이만한 덩치의 닭이 또 있을 리는 없으니까.

양쪽 옆구리에 꼬이와 꼬삼이를 끼고 아노더스로 돌아왔다. 어쩌면 이제 마력란을 얻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이제 그리 큰 문제가 아니고 계속 그곳에 놔두기에는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어쩌면 생명체가 계속 그곳에 있었기에 변이체가 그것을 감지하고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폴과 제시가 있었을 때 오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종의 변이를 거친 생물체가 다시 아노더스로 돌아왔을 때 어떤 효과가 나올지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방에서 폴켄을 불렀다. 워낙 낡은 집이라 방음을 기대할 순 없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새로 짓는 저택에는 여러 가지 장치를 넣어서 짓고 있다.

"부르셨어요. 단장님? 헉!"

부름을 받고 방에 들어서던 폴켄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제 얘도 나를 단장이라고 부르네. 대체 언제부터 내가 단장이 된 것이지? 어쨌든 그러고 보니 내 꼴이 말이 아니다. 상처는 치료했으나 상처에서 흐른 피로 목욕하다시피 했으니 옷도 그만큼 피에 절어 있었다.

"아, 별거 아니다. 일단 얘들 데려가서 빈방 중에 적당한 곳에 넣어두고 돌봐줘"

"꼬일이는요?"

"죽었다. 마수가 왔었어. 마수는 내가 죽였다."

일단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순식간에 폴켄이 시무룩해지면서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나름 정이 붙였던 녀석이니 충격이 좀 있는 모양이다. 역시 아이는 아이다.

"눼"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한 폴켄이 꼬이와 꼬삼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저택을 짓고 있는 인부들을 잠깐 돌려서 닭장을 먼저 지어야겠다.

피가 잔뜩 엉겨 붙은 옷을 벗고 씻은 후 밖으로 나오자 슬라이트와 도련님 부대가 돌아왔다. 페미컨의 상태가 너무 멀쩡하다. 잡아 오라고 했더니 모셔 온 모양이다.

"시킨 대로 페미컨을 데려왔다."

"잡아 오라고 했잖아."

내 작은 타박에 슬라이트는 딴청을 피웠다. 내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오히려 잘 됐다. 생각하고 있던 계획이 새로운 능력을 얻으면서 모두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냐 오히려 잘했다. 사람들 통제 잘하고 있어라. 페미컨 조합장은 저와 이야기 좀 나누죠."

"아, 예"

페미컨이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나를 따라 들어왔다. 일단은 내 방으로 안내했다. 그나마 제대로 된 탁자와 의자가 있는 곳이 내 방밖에 없으니까.

"앉으시죠."

나름 친절하게 안내했는데 페미컨이 의자에 앉지 않고 자꾸 눈치를 보고 있었다. 페미컨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내가 벗어놓은 피에 절은 옷이 널려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아, 네"

의도하지 않게 시작부터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이제부터 시작일걸?

페미컨은 굳은 얼굴로 그 뚱뚱한 몸을 의자에 살짝 걸치도록 앉았다. 그렇게 준비하면 여차했을 때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제가 조합장을 왜 불렀는지 알고 있겠죠?"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도 어떻게 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다. 본인은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 징세청장 쪽에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징세청장 뒤의 내무대신과 공작가 사이의 정치싸움에 끼어버린 순간 이미 운명이 정해진 것이다.

"징세청장과 제법 가까운 사이이신 모양이더군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몇 번 찾아간 적은 있지만 사정을 봐달라고 찾아간 것이지 결코 청장님과 친한 사이가 아닙니다."

"가장 큰 업체를 가지고 계시는데 사채업자들은 유독 조합장님에게만 너그러웠고요."

페미컨이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컨과의 대화는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슬라이트를 도발하셨죠?"

"아닙니다."

"그거 아십니까? 징세청장이 어떤 말로 안심시켰는지 몰라도 슬라이트를 함정에 빠뜨려 공작가를 끼워 넣으려고 한 순간부터 이미 조합장님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공자"

"그럼 밖에 나가서 슬라이트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려줘 볼까요? 과연 슬라이트가 조합장님을 죽일까요? 아니면 슬라이트의 형님들이 조합장님을 죽일까요?"

페미컨은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페미컨은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에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슬라이트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을 테니까요."

"그, 그럼?"

"이미 공작가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페미컨이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무릎 걸음으로 다가와 내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방법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조합장님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요. 조합장님은 두 거인의 싸움 사이에 끼어든 쥐새끼입니다. 어떻게 발버둥 쳐도 밟혀 죽는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아요. 내무대신 쪽이 이긴다 해도 입막음으로 죽일 것이고 공작가에서 이긴다면 당연히 죽일 겁니다. 물론 가족들도 무사하진 못하겠죠."

"그,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힘없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요. 조합장님의 도축장에 들어온 돼지나 소도 다 그렇게 죽잖습니까?"

페미컨이 절망한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페미컨은 나름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페미컨의 미래가 바꾸진 않는다.

"조합장님은 무조건 죽습니다. 다만 한가지 가족들을 지킬 방법은 있습니다."

한참을 고심하던 페미컨이 뭔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방법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페미컨에게 방법을 알려주고 방을 나섰다. 복도 끝에서 슬라이트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슬라이트가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것은 초감각을 통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페미컨과 나눈 이야기는 페미컨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페미컨과 이런 대화를 나눈 이유는 슬라이트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왕도에서 소문난 망나니이자 참는 법이 없는 슬라이트라면 이야기를 엿듣는 순간 문을 박차고 들어와 페미컨을 두들겨 팼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확신을 얻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에 붙어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슬라이트를 불렀다.

"너도 나랑 대화 좀 하자."

"싫은데?"

"해야 될걸? 쫓겨나기 싫으면"

나는 아주 효과적인 유용하며 정정당당한 협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슬라이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누구도 듣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을 선택해야 된다는 것이 슬프다. 빨리 저택이 완성되야 할 텐데.

넓은 마당의 한쪽 구석으로 슬라이트를 데려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라이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뭐?"

내 시선을 견디다 못한 슬라이트가 특유의 망나니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반항적으로 말했다.

"너 왜 망나니 연기를 하는 거냐?"

"연기라니?"

슬라이트가 모른 척했지만 소용없다. 넌 이미 확신범이거든.

"일부러 망나니인 척 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알아야 내가 도와주든지 하지."

슬라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저것도 공작과 똑 닮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바보가 아닌 이상 며칠 지켜보니 대충 알겠던데 물론 확신을 가진 건 조금 전이야."

슬라이트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망설이고 있었다.

"나한테 말한다고 해도 바뀔 것이 있나? 내가 알아챌 정도의 일을 공작님이나 네 형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넌 밑져야 본전인 거야. 네 편을 하나 더 만들거나 아니면 지금과 같거나."

슬라이트가 이러는 이유는 분명 공작가 내부의 문제일 것이다. 고위 귀족가 내부의 알력은 왕실의 정치싸움 못지않다고 들었다.

"나에게 기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리고 나는 가문을 이어받고 싶지도 않아."

어렵게 말을 꺼낸 슬라이트의 문제는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가주가 될까 봐 걱정한다고? 그게 무슨 바보 같은 말이야?"

"하지만 형들이 모두 다음 가주는 내가 돼야 한다고 말하는걸"

"이미 너희 큰 형이 소가주 아니었나?"

"그렇지. 그런데 그 큰형이 그 자리는 잠시 맡아둘 뿐이라고 말한다고."

뭐지? 고위 귀족가는 서로 차기 가주가 되겠다고 살벌하고 피튀기는 경쟁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재능 넘치는 막내를 못살게 굴어야 하고 말이야. 이 집은 그 반대인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해결책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아?"

슬라이트의 물음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다.

"네 형들이 너를 다음 가주로 생각하는 이유는 뭐야?"

"검술이지 뭐야. 다른 건 형들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지."

공작의 다섯 아들 중 아무도 7성 기사가 되지 못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공작가의 다음 대에 결점이 되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소문을 일축할 만큼 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던 것이 눈앞의 슬라이트다. 당연하게도 가문의 기대를 온몸에 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무거운 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군말 없이 우리 집에서 눌러살고 있는 거로군."

"뭐 그렇지."

가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수 있는 이곳은 녀석에게 자유로움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휴식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더 망나니짓을 하는 것은 너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아."

"어째서?"

"네가 망나니짓을 하고 수련을 게을리해서 성장이 늦어지면 오히려 더 걱정하고 바로 잡으려고 하겠지. 이곳에 있지도 못할 거다. 다시 붙잡혀 가겠지."

"빌어먹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나보고 어쩌란 거야."

슬라이트가 입술을 씹으며 신경질적으로 땅을 걷어찼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는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가주를 물려받기 싫은 거냐 아니면 귀족 자체가 되기 싫은 거냐"

"형들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아. 뭐 그렇다고 평민으로 살아갈 자신도 없어."

바라는 것도 참 많다. 그런데 순간 답이 보였다.

"그럼 간단한 거 아닌가?"

어렵게 생각하자면 한없이 어렵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매우 간단한 문제였다. 다만 슬라이트가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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