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재미있었다.
일이 이렇게 커지길 바랐던 것은 아닌데 너무 커져 버렸다. 10년 내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확실하다고 평가되는 왕세자다. 이미 국정에 상당 부분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고 왕위 계승에 경쟁자도 없다. 다른 왕자들은 이미 일찌감치 계승권을 포기했으니까.
그렇게 확실한 후계자이면서 이미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왕세자에 대한 정보는 딱 그만큼이다. 정보 통제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티끌 하나 없는 흰색 마동차에서 왕세자가 내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차에서 내리는 왕세자를 보았다.
왕, 처음 왕세자를 본 내 느낌이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압박감과 고귀함, 뭔가 아이템이나 마법을 썼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전생에 나는 왕세자와 비슷한 사람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압도적인 리더십을 보이던 대형 쉘터의 주인 중에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왕세자는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기품있는 걸음걸이로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 시간이 무척이나 천천히 간다고 느껴졌다.
“오랜만이군. 처남”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왕세자는 먼저 슬라이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슬라이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왕세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왕세자의 시선이 내 뒤통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들은 고개를 들라.”
왕세자의 명에 나와 슬라이트가 고개를 들어 왕세자를 보았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굉장한 미남이다. 명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조각한 것 같은 외모였다. 불법이라고 하지만 왕족들은 다들 성형 포션을 사용한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40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런 얼굴이라고? 자연적으로는 저런 외모가 나올 수가 없다. 저게 선천적인 외모라면 슬퍼해야 할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다. 물론 나는 아니다. 절대 아니다.
왕세자의 시선이 잠시 슬라이트를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이런 일이 처남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 같지는 않고 그대로군?”
“빅터 하네스가 전하를 뵙습니다. 송구하오나 이번 일은 제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일단 잡아뗀다. 페미컨으로 변신했던 내가 만든 상황이긴 하지만 그건 페미컨이지 내가 아니다.
“설명하라”
과연 왕세자가 이번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왔을까? 그럴 리가 없다. 고작 도축업자 몇 명이 모여 시위하는 것이 왕세자가 직접 행차할 일인가? 아무리 이곳에 처남인 슬라이트가 있다고 해도 아닐 것이다.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도축업자들의 조합장이었던 페미컨의 유서와 자료들이 있습니다. 꺼내도 되겠습니까?”
“허락한다.”
왕세자가 허락하자 호위 기사 중 한명이 앞으로 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6성 기사다.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다. 같은 6성 기사지만 지난번에 만났던 검은형제단의 브루노보다 훨씬 윗줄로 느껴진다.
나는 조심스럽게 페미컨의 유서와 그간 도축업자들이 부당하게 징세된 세금 그리고 사채업자들에게 뜯긴 돈 등이 정리된 자료를 기사에게 건넸다.
기사는 받자마자 그것들을 넘겨가며 확인했다. 안전을 위한 조치인듯 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감찰국장에게 넘겼다. 독사 같은 분위기의 감찰국장은 굉장히 빠르게 유서와 자료들을 읽었다.
“어떤가?”
왕세자의 물음에 감찰국장이 대답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징세청장 울리 자히르 백작과 치안대 그리고 경비대까지 연관된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것을 내게 보여주게”
왕세자가 페미컨의 유서를 가리키자 감찰국장을 직접 유서를 펼쳐 왕세자에게 보여주었다. 찬찬히 그것을 읽은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페미컨이라는 자의 의기가 매우 훌륭하군. 그래서 이것이 끝인가?”
왕세자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자꾸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건데요? 옆에 처남이자 공작가 망나니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내 생각에는 자히르 백작이 혼자 이런 일을 벌였을 것 같지 않군. 욕심은 많지만, 겁이 많은 사람이거든. 그대가 도와준다면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무대신이 관련된 증거를 원하는 것이다. 나에겐 그것이 있다. 사채업자 두목이 정성껏 만들어둔 상납내역이다. 그런데 이것을 왕세자에게 건네는 것이 맞을까?
상납내역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사건과 증거를 가지고 왕국에서 손에 꼽는 정치계의 거물을 실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상납 내역을 지금 왕세자에게 바친다면 나는 내무대신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지금도 좋은 사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완전히 적이 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왕세자를 믿지 않는다. 낳고 길러준 부모님도 완전히 믿지 않는데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믿겠는가? 내가 증거를 건넸다고 해서 왕세자가 나를 지켜줄까? 절대 아닐 것이다.
“저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전하”
나는 잡아뗐다.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의심은 하되 증거는 없어야 한다.
“그런가? 아쉽군. 그의 세력을 조금 줄여볼 기회였는데”
방금 조금이라고 했지? 그것 봐라 내가 상납내역을 건넸다고 하더라도 결국 내무대신을 완전히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왕실과 내무대신 사이에 끼어서 나만 죽을 뻔 한 거지.
“그럼 정리하지. 감찰국장, 처리는 맡겨도 되겠지?”
“네, 전하”
독사 같은 감찰국장이지만 왕세자 앞에서는 순한 양과 같았다. 아니 말 잘 듣는 충견이라고 해야 하나. 왕세자는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의 활약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불충한 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실의 허락 없이 파업을 벌여 왕국에 혼란을 일으킨 것과 부패했다고 하나 공무를 방해한 점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조금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한 처벌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 우리에게 심한 처벌을 내린다면 왕세자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본 왕세자가 공과를 판단한바, 공이 앞선다고 판단했다. 이에 슬라이트 에인프라흐에게는 왕실의 3급 보고에서 한 가지를 얻을 자격을 주겠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큰 선물이다. 죄를 사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 정도 포상을 준다고?
“빅터 하네스에게는 사망한 도축업자 페미컨이 왕실에 기부한 사업체를 넘기도록 하겠다. 이에 빅터 하네스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축업자들을 돌보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비명을 지를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기야 도축업체 같은 것을 왕실에서 직접 운영할 리가 없었다. 어중간한 보물보다는 이쪽이 훨씬 좋다.
“그리고 함께 백성들을 지킨 귀족 집안의 자제들에게는 공훈서를 하사하도록 하겠다.”
공훈서는 일종의 상장이다. 이름은 되게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표창장 정도의 상장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공직에 들어가려고 할 때 이 공훈서를 많이 모아둔 사람이 유리하다고 한다. 생각보다 흔하게 수여되는 상장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 도련님 부대의 대원들은 감격에 차오른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흔하게 수여되는 공훈서라고 해도 평생 반푼이 취급받으며 살아왔던 그들에게는 언감생심의 물건이었다.
와아아아! 왕세자 전하 만세!
왕세자의 판결이 끝나자 주위에 모여있던 백성들이 왕세자를 칭송했다. 왕세자는 그들의 환호에 느긋하게 손을 들어 답을 해주고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빅터 하네스, 재미있었다.”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왕세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왕세자가 돌아가고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조사에 들어간 감찰국 요원들의 질문 공세에 며칠 동안 시달려야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잡혀있던 사채업자 페니실버에 소속되어 있던 건달들은 모두 사형이 판결되었다. 경비대와 치안대에서도 관련되어 있던 간부를 비롯한 모든 대원이 구속되었고 중형을 선고받았다.
징세청장 울리 자히르 백작도 실각함과 동시에 엄청난 벌금과 함께 작위가 두 단계나 강등되었다. 사실상 모든 힘을 잃고 중앙정계는 물론 귀족사회에서 완전히 퇴출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페미컨의 사업체를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직접 운영할 생각은 없었다. 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것 말고 할 일이 많았으니까. 막스의 월급을 올려주고 도축장의 운영을 맡겼다. 오히려 직원들은 좋아했다. 페미컨이 없으니 도축장이 더 잘 돌아간다나?
새로운 조합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다들 나를 지목했으나 나는 도축업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는 것을 내세워 정중히 고사하고 옆집에 사는 이웃인 젠투를 추천했다. 그렇지만 왕세자의 명도 있었고 아무 직책도 맡지 않을 수는 없어서 고문 자리를 맡기로 했다.
조합장을 새로 뽑는 과정에서 도축업자들이 모인 김에 궁금했던 것을 알아보기로 했다.
“혹시 사채업자들에게 집안의 귀한 물건이나 가보 같은 것을 빼앗긴 분이 계십니까? 감찰단이 압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면 돌려받을 수 있게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돌려줄 생각도 없다. 제국 장부의 출처를 알려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보검을 빼앗겼습니다. 혹시 후손 중에 기사가 나온다면 주신다고 구입한 비싼 검입니다.”
손잡이가 무척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던 검이 한 자루 있었던 것 같긴 하다. 그런데 뽑아보니 그냥 보통 철검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사기를 당하신 모양이다.
“저기 이걸 가보라고 하기는 뭐합니다만, 고조할아버지였나 그 위였나 여하튼 그분이 제국의 관리셨다고 합니다. 그때는 저희 집안도 귀족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반역으로 몰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다른 가족들은 간신히 탈출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고요. 여하튼 그분이 집에서도 일을 열심히 하셨는지 장부 같은 것을 남기고 가셔서 대대로 물려오고 있었습니다만 그게 무슨 고서나 되는 줄 알고 페니실버 놈들이 강탈해 갔습니다. 실제로 가치는 없습니다. 저도 팔아먹으려고 고서점에 가져가 봤지만 은화 3개 준다고 하더군요.”
찾았다. 출처도 제법 확실하다. 당장 내가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 외에도 자질구레한 것을 빼앗겼다고 여러 명이 말했지만 미안하게도 모두 돌려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리 귀한 물건도 없었다. 업체를 통째로 빼앗길 뻔한 것을 내가 구해줬으니 비긴 것으로 하자.
슬라이트는 집에 다녀온다고 이틀 정도 사라지더니 다시 나타났다.
“나를 이기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 아니었냐?”
“그래서 지금 붙어 볼테냐?”
아닙니다. 제가 어찌 5성 기사님과 싸우겠습니까. 경지가 올라서 그런 것인지 슬라이트의 혀가 제법 매서워졌다.
“오다 주웠다.”
녀석이 뭔가를 툭 던지길래 받았더니 검집만 봐도 고급으로 보이는 검이었다.
“뭐냐?”
“3급 보고에서 받아온 거다.”
검을 뽑아보니 좋은 검이긴 했지만, 과연 왕실의 보고! 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모자란 검이었다.
“3급 보고에는 그리 대단한 물건이 없다.”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슬라이트가 알려주었다. 그래도 확실히 전에 쓰던 검에 비한다면 훨씬 좋은 검이다.
“나 주는 거냐?”
“목숨값의 일부라고 치지.”
전부라고는 안 하는구나? 하긴 공작가 막내 도련님의 목숨값이 이런 검 한 자루일 리는 없지.
“이제 뭘 할 거냐?”
“뭐하긴 할 일이야 많지. 수련도 해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도련님 부대의 정체성도 좀 찾아줘야 한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도련님, 아니 철권단을 좀 키워보는 게 어때?”
“이런 말은 좀 뭐하지만, 그들은 재능이 없다. 이제 와서 수련한다고 해도 기사로서 대성하기는 힘들다.”
“그건 알지. 그래도 자신의 한계가 어딘지 깨닫는 건 중요하다. 그래야 다른 일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전생에 나는 그것을 조금 일찍 깨달은 편이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슬라이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죽도록 굴리면 되는 거로군. 그건 쉽지.”
“나도 도울 거다.”
사람 괴롭히는 것이라면 그 에인프라흐 공작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슬라이트도 잘 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못지않게 자신이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