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32화 (32/206)

32. 한계

철권단이 슬라이트에 의해 지옥 훈련에 돌입할 때쯤 집에 사람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지미 브리스라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이 저택의 예전 집사셨죠.”

“아, 그 손자분이시군요? 새 저택이 완성되면 면접을 보러 오신다고 하셨었는데 일찍 오셨네요.”

원래 이 집의 집사였던 노인의 손자였다. 원래 새 저택이 지어지면 한번 보러 오겠다고 하던 집사 후보였다.

20대 중반의 젊은 사람이다. 비록 중퇴라고는 하지만 아카데미도 다녔고 공직에도 있었다고 하니 능력은 검증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반듯해 보이는 사람이다. 대나무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저런 사람이 공직에 자리 잡기 힘들긴 하다.

그래도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 이름 있는 귀족도 아닌 아직 작위도 없는 소년이 주인인 저택의 집사를 맡기엔 망설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새 저택이 지어지지 않았는데도 찾아온 것을 보면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는 모양이다.

“제가 필요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필요하긴 하다. 나는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수련에 투자하고 싶다. 그런데 왕도에 올라오면서 계속 일이 많았다. 심지어 아직 스트라이더 997번에 저장된 아이템들의 정리도 끝내지 못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곳의 집사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으실까요? 다른 일도 얼마든지 구하실 수 있으실 텐데요.”

“빅터 하네스님 정도면 보장된 미래를 약속받으신 분 아닐까요? 그리고 한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확실히 나 정도면 출세가 보장된 유망주이기는 하다. 앞날을 생각하면 아직 내 힘이 미약할 때 미리 자리를 잡고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선택이다.

“나머지 이유는 뭔가요?”

“제가 공직에 있었을 때 어디 소속이었는지 아십니까?”

일부러 조사한 것도 아닌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징세청입니다.”

“아...”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대쪽 같은 사람과 대놓고 비리를 저지르는 상관의 만남이라니 비극적인 결말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해했습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아마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완벽한 복수를 내가 해줬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복수 때문이 아니라 이 왕국을 좀 먹는 기생충을 처리해주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순간 강직하지만 순해 보이던 지미 브리스의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징세청장이 그렇게 된 것이 제 힘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가능성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옆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다른 생각을 조금 하는 느낌도 들지만 유능하면서 착한 사람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착한데 무능하거나 유능한데 나쁜 놈이 곁에 있는 것보다는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훨씬 편할 것이다.

“좋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먼저 새로운 집사인 지미 브리스를 데리고 나가 폴켄과 제이시에게 소개해줬다. 폴켄과 제이시는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아마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제법 새로 뽑아야 할 겁니다. 지금은 제이시 혼자서 어떻게든 하고 있지만 앞으로 일이 많아질 테니까요.”

“할아버지를 통해서라면 경력 있는 분들을 모실 수 있을 겁니다.”

“제이시는 확실한 내 사람이니 제이시와 큰 충돌이 없는 사람으로 뽑아주세요.”

그리고 아직 방에서 지내고 있는 꼬이와 꼬삼이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생활한다면 언젠가는 봐야 할 아이들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르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지미 브리스는 꼬꼬들을 처음 보고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야 저런 크기의 닭을 봤을 리가 있겠는가.

“닭이 맞습니까?”

“네, 어렸을 때 좋은걸 주워 먹더니 저렇게 커버렸습니다. 보기엔 저래도 순한 아이들입니다.”

먕! 먕!

언제부턴가 꼬꼬들이 있는 곳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는 똘똘이가 꼬이의 날개 밑에서 튀어나와 자기도 알아달라는 듯 짖었다.

“똘똘이입니다. 쟨 그냥 보통 개입니다. 쥐를 잘 잡는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쥐가 없는 바람에 할 일은 없지만 귀엽습니다.”

“뭐 그래 보입니다.”

밖으로 나와서 한창 공사 중인 새 저택의 공사담당자를 소개해주었다.

“일단 저택의 공사가 끝나면 닭장도 크게 만들어주고 연무장도 만들 계획입니다. 그리고 혹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정원사도 좀 찾아주십시오.”

“농사를 지으실 생각이십니까?”

“네, 일단 땅은 남아도니까요. 텃밭을 좀 일궈볼까 생각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은 슬라이트와 철권단이었다. 철권단은 슬라이트의 악랄한 훈련방식에 거의 매일 시체가 되어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제대로 된 연무장도 없어서 흙바닥에 이리저리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는 철권단이었다.

철권단은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이 없기에 일단은 슬라이트만을 소개해주었다.

“슬라이트 에인프라흐입니다. 들어보셨겠지요? 유명하니까요.”

“아, 네”

예전보다는 인식이 좋아졌지만 슬라이트는 아직 망나니라는 오명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누구시냐?”

“새로 오신 집사님이다.”

슬라이트는 들고 있던 목검을 집어넣고 정중하게 지미 브리스에게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곳에 얹혀살고 있는 슬라이트 에인프라흐입니다.”

“지미 브리스입니다. 소문과는 많이 다른 분이시군요.”

굳이 망나니짓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설명을 해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리고 저쪽은 철권단이었던 시체들인데 지금은 소개가 불가능할듯하니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지미 브리스와 함께 붕붕이를 타고 먼저 도축장을 향했다. 도축장은 오늘도 성황이었다. 바쁘게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막스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와 꾸벅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여기는 도축장을 관리하는 막스 공장장입니다.”

두 사람을 인사시켰다.

“이제 도축장의 관리를 지미 집사님이 막스 공장장과 협력해서 진행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징세청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집사 일보다는 이쪽이 오히려 익숙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돌턴골드 상단이었다. 지미 브리스를 인사시키는 이유 말고도 이곳은 오늘 왔어야 했을 곳이다.

먼저 찰리 데커를 만나 지미 브리스를 인사시켰다. 어쩌면 앞으로 나보다 집사가 찰리 데커를 만날 일이 많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둔 후 나는 돌턴골드 상단주를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상단주님”

“어서 오시오. 공자”

“일을 잘 처리해주셔서 사건이 원만하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어찌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힘든 일은 공자가 다 하셨잖습니까.”

전에 상단주와 나는 비밀리에 한가지 거래를 했었다. 상단주는 가진 인맥을 동원해 도축업자 사건을 소문냈다.

그 대가로 돌턴골드 상단은 도축장에서 나오는 모든 육류의 독점 유통 권한을 얻었다. 조합장이 바뀌고 내가 고문직을 맡으면서 그렇게 계약을 추진했다.

예전의 유통 방식은이 고기가 필요한 업장에서 직접 도축장을 찾아와 고기를 구입해가는 방식이었다. 일부 상단에서 대량 구입 후에 자신들의 업장에 공급하기는 했어도 도축장과 직접 계약한 곳은 없었다.

덕분에 도축장도 돌턴골드 상단도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유통과정에서 얻는 이득의 5푼을 받기로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아주 큰 돈은 아니었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생긴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돌턴골드 상단은 원래 가지고 있던 유통망을 이용해 돈도 벌고 영향력도 늘리게 되었으니 이득인 것이다.

“조만간 한가지 사업을 더 해보려고 합니다. 그때 한 번 더 같이 해보시죠.”

“그것참 기대되는군요.”

새로운 사업이라는 말에 상단주의 눈이 빛났다. 여태까지 나와 돌턴골드 상단은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관계다. 참으로 이상적인 관계가 아닌가?

돌턴골드 상단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에 지미 브리스가 의문을 표했다.

“한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세요.”

“에인프라흐 공작가와는 어떤 사이십니까? 정말 에인프라흐 공작님이 후원자 십니까?”

찰리 데커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런 부분까지 알아낸 모양이다.

“아니에요. 그냥 우호적인 사이 정도죠. 그런데 슬라이트가 우리 집에 얹혀사는 것만으로도 후원자 이상의 존재감 아닐까요?”

“과연 그렇군요.”

굳이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슬라이트가 우리 집에 머문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명이 되었다.

“앞으로도 에인프라흐 공작가와는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시겠군요? 아,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앞으로 발전 방향에 대해 조언을 드리기 위해 알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얘기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정치 싸움에는 관심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휘말리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할 거예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곳은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곳이니까요.”

정치라면 신물이 나는 사람이 나다. 대격변 이전에도 썩은 정치인들을 지겹도록 많이 봤고 무능한 정치인들 덕분에 대격변 초기에 정말 많은 사람이 허무하게 죽었다. 그렇다고 대격변 이후에는 정치 싸움이 없었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심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위한 정치싸움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지미 브리스 집사의 합류로 나는 자유시간이 많아졌다. 집사는 생각보다 훨씬 유능했다. 이런 유능한 인재를 그만두게 만든 징세청장은 확실히 역적이 맞았다.

일단 내가 원했던 대로 사람을 보충했다. 집안일을 도울 하녀 두 명과 정원사 겸 일꾼 한명을 데려와서 면접을 본 후 고용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건설에도 손을 대기 시작해서 다른 건설업자들을 추가로 고용해 완성도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닭장과 연무장을 동시에 짓기 시작했다.

시간이 생긴 나는 슬라이트와 함께 철권단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순수하게 실력을 키워주기 위한 훈련이었다. 다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지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다만 슬라이트는 공작가 기사단 훈련을 응용해 체계적인 방식으로 괴롭히는 데 반해 나는 실전 같은 대련을 실시했다.

문제는 그렇게 괴롭히는데도 철권단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오러홀을 깨우지 못했던 인원 중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오러홀을 만들었다. 거기에 1성에 머물러 있던 인원 중 두 명이 2성으로 경지가 올랐다.

한계를 느끼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한계를 부쉈다. 어쩌면 부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능의 벽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일지도 몰랐다.

“이거 학원을 차리면 괜찮은 사업이 될지도...?”

왕도에서 유명한 무능아들을 데려다 오러홀을 각성시키고 승급까지 시켰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이 몰릴 터였다.

“진짜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옆에 있던 슬라이트가 눈을 부라렸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그냥 해본 말이다.”

돈이 될 것 같은 사업이긴 한데 너무 귀찮은 일이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냐?”

포기하도록 독하게 굴렸는데 포기는커녕 오히려 불이 붙었다. 내가 도련님 부대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진지하게 키워도 힘들겠지?”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다. 저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내가 반성하게 된다.”

슬라이트도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그럼 제대로 해볼까?”

“방법이 있는 거냐?”

“아니 나도 장담은 못 하겠는데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시도해보려고 하던 실험이 있었다. 나는 지미 집사에게 돌턴골드 상단과 협력해서 토끼 꼬리풀의 씨앗을 구해보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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