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최고의 스승
토끼 꼬리풀은 영초다. 작은 풀인데 다 자라면 꽃이 피었던 곳에 작은 열매가 열린다. 그것이 마치 토끼 꼬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토끼 꼬리 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영초 중에서 가장 최하위에 속한다. 영초라고 해도 워낙 품을 수 있는 마나가 적어서 보통 먹어서 뭘 하기보다는 마법 실험의 재료로 많이 쓰인다.
영초치고는 값이 저렴한 편이지만 기본적으로 영초라는 것이 마나가 풍부한 곳에서 자라는 것이다 보니 인공적으로 마나가 풍부한 환경을 만들어 직접 재배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직접 재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마나가 풍부한 곳이 나에겐 있다. 거기에 토끼 꼬리 풀은 조건만 맞는다면 아주 잘 자란다고 알려져 있다.
꼬꼬들이 낳았던 마력란도 마나를 그리 많이 품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지 알 수 없는 작용을 해서 철권단의 각성을 도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토끼 꼬리 풀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씨앗을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으면서 마나만 풍부하면 잘 자라는 영초를 찾다 보니 그렇게 토끼 꼬리풀이 선택된 것이다.
빈 땅에 여러 가지 건축이 동시에 들어가고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는 닭장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 때 새 생명이 태어났다.
삐약! 삐약!
꼬이와 꼬삼이가 품고 있던 알에서 보통 병아리보다 몇 배는 큰 병아리 두 마리가 깨어났다.
“꼬일이의 자식들이구나.”
먕!
똘똘이는 마치 호위라도 하는 것처럼 병아리들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병아리가 워낙 크고 똘똘이는 작아서 덩치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았다. 아마 몇주만 지나면 병아리들이 똘똘이보다 커질 것이다.
아노더스로 돌아온 꼬이와 꼬삼이는 더 이상 마력란을 낳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잡아먹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여전히 크고 맛 좋은 달걀을 공급해주고 있었고 다른 병아리들이 조금 더 자란다면 보통 닭들과 합사해서 실험해볼 것도 있었다.
다음에는 연무장이 완성되었다. 그래봐야 흙바닥을 다지고 편편한 돌만 깐 수준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철권단 단원들은 환호했다. 그래서 하는 김에 옆에 간단한 시설을 갖춘 숙소도 짓기 시작했다.
연무장이라고는 해도 크기는 그렇게 넓지 않았다. 보통 기사들의 연무장은 무식하게 크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이 동시에 기마술을 연습하기에 그런 것이고 이곳에서는 겨우 열 명 남짓이 검술과 체력단련만 하는 수준이라서 그렇게 클 필요가 없었다.
철권단의 훈련은 여전히 강도가 높았지만, 철권단이 스스로 원해서 하는 수련이 많아졌고 슬라이트와 내가 직접 지도하는 일이 적어졌다. 그래서 시간이 남을 때 슬라이트와 내가 대련하기도 했다.
나도 매일 잠을 줄여가면서 수련하고 있지만 이제는 마법을 사용해도 슬라이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만큼 한단계의 차이는 컸다. 물론 방심할 때 신체 변형을 해서 공격하거나 재생력으로 버틸 생각을 하며 검을 한 대 맞아주고 들어가는 방법을 쓴다면야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는 이길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대련에서는 가진 기술과 힘에서 모두 밀리는지라 이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슬라이트의 천재성에서 나오는 임기응변과 공작가의 수준 높은 검술을 흡수하는 한편 오러 사용자와의 전투 경험을 매일 착실하게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슬라이트가 대련 중에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것인데 넌 뭔가 어긋나있다.”
“뭐가 문제가 있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넌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 전투에 익숙해져 있어.”
그런 것까지 꿰뚫어 보는 건가? 역시 천재란 족속들은 무섭다. 당연히 나야 전생의 경험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오러를 사용한다고 해도 전생의 습관이 나오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은 나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형하고 다투는 것에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어려서부터 형하고 많이 싸웠거든.”
일단 이렇게 둘러대긴 했다.
“형제가 대체 얼마나 사이가 안 좋은 거냐?”
딱히 사이가 안 좋지는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보통의 형제다. 오히려 공작가의 형제 사이가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물론 쟤네 집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싸울 일이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또 있다. 너 그 검술 어디서 배운 거냐?”
마구잡이 검술을 말하는 거다.
“어쩌다 만난 아저씨에게 배웠다.”
“누구인지는 알고 있나?”
“아니 그냥 희한한 이름을 썼다는 것 정도?”
이것도 역시 전생에서 배웠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대충 둘러댔다.
“부분적으로 따로 떼놓고 봤을 때는 좋은 검술 같다. 그런데 그거 내가 봤을 때는 완전한 검술이 아니야.”
“뭐라고?”
“마치 여러 가지 검술의 초입부만 모아서 연결해놓은 것 같단 말이지. 아니,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상황에 맞춘 검술 여러 가지를 연결해놓은 검술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초입부만 모아놓은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이 검술을 알려준 김경식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지구에서 죽었다.
“알려줬던 아저씨를 이제 와서 찾을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너희 가문의 검술은···. 아니다. 차라리 다른 검술을 배워보는 것은 어떠냐? 지금 그 검술은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그건 알지만 누가 그런 수준 높은 검술을 가르쳐 주겠어?”
돈을 받고 검술을 가르쳐주는 학원이나 개인 교사는 많지만, 그들이 수준 높은 검술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슬라이트는 조금 고민하는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있긴 있다. 그런데···. 조금 까다로운 분이다.”
“누군데?”
성격 까다로운 스승 섬기는 것 정도로 좋은 검술을 배울 수 있다면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공작가의 전대 기사단장님이다. 지금은 은퇴하셨지.”
“기사단장까지 했던 분이 성격이 안 좋다고?”
보통 기사였다면 모르겠지만 수십 혹은 수백명을 휘하에 지휘하는 자리에 공작가에서 그렇게 성격이 모난 사람을 임명했을까?
“아니 인격적으로는 훌륭한 분이다. 다만 제자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 과하시지.”
“얼마나 심하길래?”
“제자로 받았던 사람 중에 둘이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다.”
아니 그건 좀 심하지 않냐? 이 자식이 또 이런 식으로 나를 암살할 셈인가? 그래도 공작가의 기사단장이었다면 대단한 실력자였을 텐데 좀 아쉽다.
“실력은 확실하시지?”
“검에 대한 지식으로는 우리 아버지도 인정하셨던 분이다.”
왕국 최강의 기사가 인정할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그냥 포기하기엔 아깝다. 재생력도 있고 정 못 견디겠으면 나도 도망이라도 치면 되겠지.
“소개해줄 수 있으니 말한 거겠지?”
“오히려 반기실걸?”
“그래 그럼 한번 만나보기라도 하자.”
다음 날 슬라이트와 함께 어쩌면 스승이 돼줄지도 모르는 전직 공작가의 기사단장님을 만나러 출발했다. 예비 스승님이 사는 곳은 의외로 별로 멀지 않았다. 왕도 안의 중심가에 제법 큰 저택이었다. 가격으로 치면 어마어마할 것이다.
밖에서 사용인에게 슬라이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따라간 저택 뒤쪽의 연무장에는 웃통을 벗은 채 검을 휘두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머리와 긴 수염이 하얀 백발이라서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던 것이지 팽팽한 몸은 강철같은 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 슬라이트 도련님 어쩐 일이십니까? 요즘 바쁘시다고 소문은 들었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노엘 브라스 기사단장님”
“허허, 이제 은퇴했으니 기사단장도 아니지요.”
검을 휘두르던 노인이 멀리서 우리를 감지하고 상의를 다시 입고는 다가와 인사를 했다. 제자에게 어떤 수련을 시켰길래 사람이 죽어 나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보기에는 슬라이트의 말대로 무척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나도 먼저 인사를 하며 스승이 될지도 모르는 상대를 살폈다. 감각으로 느껴지기에는 6성 기사다. 왕세자의 호위와 거의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로 6성의 끝에 다다른 강자였다. 하지만 나이를 생각해볼 때 7성에 올라서기는 힘들 것이다.
“호오? 도련님을 이긴 소년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게 이 친구인가 보군요?”
노엘 브라스의 예리한 눈빛이 순식간에 나를 훑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제는 제가 이기지만요.”
슬라이트 놈이 쓸데없는 한마디를 붙였다.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이 친구를 소개해드리려고 왔습니다. 혹시 아직도 제자를 구하시나 해서요.”
“제가 요즘 검에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 슬라이트가 노엘 님의 얘기를 꺼내더군요.”
순간 노엘 브라스의 눈빛이 맹수처럼 빛나다가 다시 빛이 흐려졌다.
“그랬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제자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지?
“포기하신 건가요?”
“아니요.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평생 7성에 오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방법을 연구했지요. 제자들에게 제가 생각한 최선의 수련법을 전수해서 익히게 하기도 했고요. 육체를 강화하거나 혹은 오러의 사용법을 개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요즘 마침내 깨달은 것이지요.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것을요.”
수련만 한다고 7성에 못 오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니 평생 수련하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해 4성에도 못 오르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실례가 안 된다면 깨달으신 것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재능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태어나야 하는 것이지요. 6성까지는 수련으로 가능합니다. 강제로 깨달음을 얻게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이상은 순수하게 재능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노엘 브라스가 얻은 깨달음이지 절대적이지는 않겠지만 평생 검술과 오러만 연구한 사람의 말이니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럼 나도 어쩌면 6성이 최대치일 수도 있다. 나는 결코 천재가 아니니까. 물론 6성도 대단한 경지이긴 하지만 좀 아쉽다.
“그걸 미리 알아볼 수 있는 건가요?”
“아쉽게도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6성에 오르면 알 수 있겠지만요.”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나는 7성 기사가 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단순하게 강해지는 것이다. 기사로서 6성에 머문다고 할지라도 마법의 경지를 끌어올려 6성의 마검사가 되는 방법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고급 검술을 배울 기회가 날아간 것은 아쉽다.
“제자를 거두는 것을 그만두긴 했습니다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재능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빅터 공자의 나이는 어떻게 되지요? 하네스 가문은 명문인 건가요?”
“15살입니다. 아버지는 변경백의 봉신 기사이시고 저는 차남입니다.”
“놀라운 재능입니다. 스승을 따로 두진 않았겠지요?”
“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검술을 우연히 만난 기인에게 배우긴 했습니다만 따로 검술 스승을 두진 않았습니다.”
“허허”
노엘 브라스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빅터 공자, 내가 잠시 공자의 몸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노엘 브라스가 내 손목을 잡고 조심스럽게 오러를 밀어 넣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브라스의 오러는 온몸을 구석구석 훑고 지나갔다. 나도 폴켄의 몸을 이런 식으로 살핀 적이 있지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정밀한 움직임이었다.
오러로 몸을 탐색하는 것으 끝낸 후에는 여기저기 몸의 관절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낸 후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탄식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것참··· 이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나와 슬라이트는 노엘 브라스가 생각을 마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사색을 마친 노엘 브라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빅터 공자”
“네, 노엘 님”
“공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신체적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오러와 몸을 가졌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말씀드린 것에 거짓은 없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선의의 거짓말처럼 이것은 내 생존을 위한 거짓말이라고 해두자.
“믿습니다. 이것은 누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려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그래도 왕실 같은 곳에서 마음먹는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7성 기사가 되는 것이 평생의 숙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포기한 후에는 내 제자가 그 벽을 뛰어넘기를 바랐죠. 하지만 운이 없었던 것인지 좋은 제자를 만나지 못했죠.”
그런데 두 명이 죽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다는 것은 좋은 제자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아, 물론 저에 대한 소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슬라이트 도련님도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저의 제자 두 명이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명은 중형 마수를 사냥하는 수행을 나갔다가 운이 없어 대형 마수를 만난 것이고 다른 한명은 제가 가르쳐준 오러수련법을 스스로 변형시키다가 오러가 역류해서 사망한 겁니다. 그 후에 이런저런 추천으로 제자들을 받았지만, 기초적인 신체 단련이나 조금 어려운 수련이 들어갈 때면 스스로 그만두고 나가더군요. 전 그것을 받아줬고요.”
뭐야? 그럼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러면 왜 오해를 풀지 않으셨습니까?”
“그냥 내버려 두니 제자를 추천해주는 이가 없더군요. 그건 그것 나름대로 편해서 오히려 소문을 부추긴 면이 있지요.”
슬라이트가 미리 알려준 바에 의하면 노엘 브라스는 결혼하지 않아서 후사가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 노엘이 사망한다면 제자가 노엘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그걸 노리고 모인 버러지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빅터 공자 혹시 아직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한가지 제의를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내 마지막 제자가 되어주십시오.”
이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모실 수 있는 최고의 스승이다.
“제가 부탁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저의 스승이 되어주십시오.”
그렇게 오늘 나는 노엘 브라스라는 최고의 스승을 얻었고 노엘 브라스는 빅터 하네스라는 최고의 제자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