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38화 (38/206)

38. 돌아오지 않는 스승님

나와 스승님과 해후가 끝나고 내가 준비해둔 의복으로 스승님이 옷을 갈아입자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역시 에인프라흐 공작이었다.

“노엘 축하하네.”

“공작님 덕분에 벽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내 덕은 무슨 자네 스스로 이룬 업적인 것을 덕분이라고 한다면 자네 제자 덕분이겠지. 그런데 자네는 언제까지 나에게 공작님이라고 할 텐가? 이제 내 가신도 아닌데 말이야.”

“그 제자를 공작님과 인연으로 인해 얻게 되었으니 그 또한 공작님 덕택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어찌 공작님께 호형호제하겠습니까?”

사실 둘은 두 살차이다 스승님의 외모가 젊게 변했음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에인프라흐 공작이 스무살쯤 어려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살 더 많다. 스승님이 은퇴하며 공작이 호형을 허가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다.

같은 검의 길을 걷는 동료로서 혹은 가신의 관계로서 4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했으니 어쩌면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자네는 이번에 무슨 깨달음을 얻어서 벽을 넘었나?”

에인프라흐 공작의 눈이 빛났다. 8성 기사이자 왕국 최강의 무인임에도 아직 공작은 더 높은 경지를 바라고 있었다.

“제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순간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기 철권단이라 불리는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저는 저 아이들이 재능이 전혀 없고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이 이번에 제가 가지고 있던 지식과 상식의 틀을 넘어섰지요. 여태까지 50년 넘게 제가 알고 있던 지식이 틀린 겁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틀에 맞춰 저 자신의 한계를 정해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스승님의 긴 설명을 들은 공작은 허공을 응시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

스승님의 깨달음을 듣고 자신도 뭔가를 얻어가려고 했는데 잘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자네는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군. 할 일도 많을 테니 나는 이만 가보겠네.”

에인프라흐 공작의 3일 동안이나 우리 집에서 머문 진짜 목적은 이것이었나보다. 물론 외부로부터 나와 스승님을 지켜주는 것도 포함돼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작님”

“응? 왜 그러나”

막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던 공작을 불러세웠다.

“그 기세를 없애주는 반지 있잖습니까? 그건 어디서 얼마에 파는 건가요? 스승님께 하나 선물해드리고 싶은데요.”

“아, 이거 말인가? 이건 못 구하네.”

“네?”

“이게 이래 보여도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만든 보물일세.”

옛 용사의 이름이 나왔다. 스트라이더 997번을 만든 초월급 마법사의 이름이 이런 곳에서 또 나올 줄은 몰랐다.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건가요?”

“아니 하나는 아니지 몇 개 있는 것으로 아네. 하지만 주인들이 내놓지 않겠지. 나만 빼고.”

그러더니 공작은 그 자리에서 반지를 빼서 스승님에게 건넸다.

“노엘 자네에게 뭔가 더 큰 선물을 하고 싶지만 일단 이것을 주는 것으로 하지.”

“제가 어찌 이런 보물을 받겠습니까.”

스승님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공작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집에 하나 더 있거든. 예전에 왕실 창고에서 썩고 있는 것을 호드라스를 좀 괴롭히고 뺏어왔지.”

호드라스는 국왕의 이름이다. 이것이 바로 에인프라흐 공작의 힘이었다. 공작은 언젠가처럼 휘적휘적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슬라이트에게 몇 마디를 하고는 자신이 데려왔던 공작가의 기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공작과 기사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스승님이 입을 열었다.

“사실 깨달음 같은 것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럼 공작에게는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네가 만든 그 영약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네, 물론입니다.”

6성 기사를 7성 기사로 만들 수 있는 영약이다. 예전 지구로 치면 핵무기 제조시설이나 다름없다.

“복용하고 그것이 어떤 효능을 가지는지 관찰했다. 네가 만든 영약은 막힌 마나의 길을 뚫어주는 효능이 있다. 아니 아예 없는 길을 만들어낸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느냐?”

지구의 마나가 그런 효과가 있는 건가? 그래서 나도 그 영향을 받아 빠르게 성장한 모양이다.

“아무리 재능이 없는 사람도 먹다 보면 7성 기사가 될 수 있겠군요.”

“그래, 단순히 승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체가 강해지는 것이지. 그렇게 완전히 체질을 개선한다면 초월자로 가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내 추측일 뿐이다.”

그럼 나는 이미 초월자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건가? 어찌 됐든 영약의 위험성이 핵탄두에서 핵무기 제조시설로 올랐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세상에 내놓아선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조심하겠습니다. 이미 공작님도 한 말씀 하셨거든요.”

“그렇겠지.”

“스승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장 스승님을 왕실로 모셔가기 위해 저쪽에서 눈을 빛내며 우리가 대화를 끝내기만 기다리고 있는 근위 기사단이 있고 왕실에 다녀오시면 만나봐야 할 대귀족이 수십명은 될 것이다. 괜히 공작이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래, 슬슬 가보자꾸나.”

스승님은 당당한 걸음으로 나섰고 근위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왕실로 향하셨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고생했던 치안대와 경비대가 돌아가며 우리 집을 지켜주고 있던 보호막이 사라졌다. 그런데 방문자가 넘쳐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방문자는 없었다.

“굳이 미움받을 짓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

“그런가?”

방문자가 없는 것을 이상해하고 있던 나를 보고 슬라이트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집사님, 무너진 저택 잔해들을 치우고 새로 지어야겠어요.”

“전의 건설업자들을 다시 부를까요?”

“네, 이번엔 좀 빠르게 지을 수 있도록 사람을 더 써보도록 하죠. 그리고 돌턴골드 상단에 연락해서 양념치킨 레시피도 구입하라고 하세요. 집 지을 돈은 벌어야죠.”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유능한 집사가 있으니 이렇게 편하다. 이렇게 방문자가 없을 정도면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한 철권단을 돌려보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철권단도 모두 집에 돌려보냈다.

그런데 스승님은 왕궁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이틀이 사흘이 되어서도 스승님은 연락조차 없었다.

“슬라이트 뭔가 방법이 없냐?”

“나라고 왕실에 연줄이 있겠냐?”

“있잖아. 누나도 있고 매형도 있고”

왕세자와 세자빈보다 좋은 연줄이 어디 있나? 따지고 보면 국왕도 그냥 아버지 친구 아닌가?

“너는 왕족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쉽게 만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공작님에게 부탁해보면 어때?”

“노엘 경에게 나쁜 일이라면 이미 나서셨을 거다. 큰형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에인프라흐 공작이라면 스승님에게 최악의 일이 생기는 것은 막아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의 철권단원들이 끼어들었다.

“제가 들은 것이 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 나름 귀족 집안의 자식들이다. 이렇게 집안에 박혀있는 우리와 달리 집에서 출퇴근하니 듣는 것도 있을 것이다.

“스승님에 대한 소문이 있나요?”

“네,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엮이신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하급 귀족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소문이 돌 정도면 생각보다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작위 문제가 제일 큰 것 같습니다. 영지도 그렇고요.”

일단 스승님은 지금 작위가 없다. 원래 공작가의 봉신 자작이었으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퇴하는 바람에 지금은 작위가 없는 상태다.

“다른 7성 기사들과 형평성 때문인가요?”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스승님을 제외한 다른 7성 기사 둘은 모두 후작이다. 그렇다고 스승님에게도 후작위를 내리기엔 상황이 좀 다르긴 하다. 스승님이 왕실을 따르겠다고 하면 쉽게 끝날 문제지만 그런 선택을 하셨을 리는 없다.

“반대 파벌이 있는 모양이죠?”

“그게 좀 복잡합니다. 여러 파벌에서 교관님에게 접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기 파벌이 되면 후작위를 밀어주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절묘하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정작 스승님은 후작이나 백작이나 신경 쓰지 않으실 분인데 엄한 놈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보다 복잡한 것이 영지일 것이다. 이쪽은 돈이 걸려있다.

“영지는요?”

“그것 역시 몇 군데 후보지를 놓고 파벌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대략 어디라는 말은 없나요?”

“왕실에서는 왕도 근처에 영지를 하사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귀족들이 그것만은 결사반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될 수 있으면 변방으로 내몰겠다는 뜻이죠.”

건방진 귀족 놈들 반대한 놈들 목록을 뽑아서 살생부라도 만들어야 하나? 나중에 꼭 복수할 테다.

“야, 너 표정이 무서워.”

“아, 그런가?”

슬라이트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나 표정을 풀었다. 그런데 변방이라···사실 이것도 내가 원하는 장소를 고를 수만 있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잘하면 이용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일단 스승님을 만나야 할 것 같다. 내가 왕실에 들어갈 방법은 없을까?

스승님에 관해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정원사 벤프리가 집사와 함께 찾아왔다.

벤프리는 덥지도 않은데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죠?”

“저기···.”

벤프리가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옆에서 집사가 입을 열었다.

“벤프리씨가 아주 좋은 조건으로 제안을 받은 모양입니다.”

아, 토끼꼬리 풀을 실제로 키운 것은 벤프리니까 그쪽으로 누군가 벌써 손을 쓴 건가? 참 빠르기도 해라.

“그래요? 얼마나 준다는데요?”

“여기서 받는 보수의 10배입니다. 그게... 처음에는 저도 거절했습니다만 자꾸 보수를 올려 부르는 바람에···.”

벤프리는 무척 착한 사람이어서 굉장한 죄책감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축하해요. 벤프리씨.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벤프리씨가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가서 높은 보수 받으시고 나가라고 하면 다시 돌아오세요. 물론 거기에서 받던 만큼 드리지는 못하는 건 아시죠?”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벤프리는 어느 대귀족 가문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굳이 뒤를 캘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벤프리에게 월급만 잔뜩 주게 될 호구니까.

생각난 김에 고용인들을 모두 모아놓고 얘기했다. 그래봐야 제이시와 폴켄을 제외하면 마사와 힐마 그리고 집사밖에 없다.

“혹시 여기 다른 사람들도 좋은 제안을 받은 사람이 있나요?”

조용히 집사가 손을 들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더니 뒤를 이어서 모두가 손을 들었다. 아니 폴켄 너는 왜 손을 들어? 그리고 폴켄 옆에 똘똘이는 뭔데 앞발을 들고 있지?

“폴켄 너도?”

“예, 견습 기사를 시켜주겠다고 하던걸요.”

이미 최고의 스승 밑에서 배우고 있는 애한테 제의한다는 게 겨우 견습기사? 어림도 없지. 그리고 옆의 똘똘이에게 시선이 갔다.

먕!

그래 쥐는 못 잡지만 귀여우니까 영입 제안이 왔을 수도 있다.

“제이시하고 마사, 힐마는 무슨 제안이에요?”

저 세 사람은 영약과 관련도 없는데?

“저희는 치킨 제조법 때문이에요. 그래도 저희는 포상금을 받는 게 더 좋아요.”

마사가 배시시 웃었다. 아, 치킨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치킨을 개발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마사 말고도 제이시와 힐마에게도 레시피를 판 금액에서 일부분을 떼어줬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엄청난 제안이 오면 얘기해줘요. 그거에 맞춰서 급료를 올려줄 테니까요.”

영약이 문제가 아니라 이쪽이 진짜 유출에 취약한 부분이었다.

“집사님은요?”

“돌턴골드 상단에서 제의가 있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상단에 취직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사방이 난리였다. 찰리 데커 이 양반 안 되겠네. 내 사람을 채가려고 들어? 시간이 나면 가서 한 소리 해야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스승님을 만날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막 지구로 넘어가려고 할 때 집으로 몰래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이 감지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