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한밤의 침입자
방문자 같은 것이 아니다. 방문자라면 저렇게 여러 명이 은밀한 움직임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확실히 타국의 암살자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방비를 좀 더 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시간도 없었고 이미 지난 일이다.
현재 집에 있는 것은 나와 슬라이트 그리고 폴켄과 제이시다. 나머지는 모두 출퇴근을 하기에 지금은 집에 없었다.
나 역시 소리를 최대한 죽이면서 빠르게 올라가 슬라이트의 방문을 열었다. 멍청한 슬라이트는 침입자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막 잠이 들 참이었는지 갑자기 문을 연 나를 보고 짜증을 내려 하고 있었다.
“침입자다.”
내 한마디에 슬라이트의 눈빛이 바뀌며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 저택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일단 폴켄과 제이시를 지하로 보내고 올게.”
슬라이트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는 곧바로 제이시의 방으로 갔다. 다행히 제이시와 폴켄은 아직 잠이 들지 않고 있었다.
“제이시 당장 폴켄을 데리고 지하로 내려가라 지하 2층 여는 법은 알지?”
“무슨 일인가요?”
“알 수 없는 무리가 집으로 다가오고 있다.”
제이시가 폴켄의 손을 잡고 일어서려고 할 때 폴켄이 그 손을 뿌리쳤다.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제 오러홀을 막 깨우친 녀석이 누구를 돕겠는가. 다가오고 있는 침입자들의 움직임을 볼 때 나와 슬라이트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폴켄, 네 임무는 엄마를 지키는 거야. 알았지?”
“네”
폴켄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을 잡고 지하로 내려가는 폴켄과 제이시를 보며 데자뷔가 느껴졌다. 분명 아주 오래전에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모양이다.
비슷한 기억이 워낙 많아 그게 확실히 어떤 사건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언제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강한수의 기억이고 지구였다. 지금은 다르다.
슬라이트에게 돌아가니 슬라이트가 창문 옆에 붙어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넌 느껴지지 않는 거냐?”
지금도 아주 은밀한 움직임으로 침입자 혹은 암살자일지도 모르는 자들이 여러 방향에서 저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난 느껴지지 않는다.”
“둔한 놈”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네가 너무 민감한 거다.”
아마 슬라이트가 정상일 것이다. 저 천재의 감각이 평균 이하일 리는 없었다. 초감각 덕분에 내 감지 범위가 넓은 것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고?”
“네가 느낀 감각이 거짓이 아니라고 하면 아마 마법을 썼거나 마법 도구를 사용했을 거다.”
나도 창문 옆에 붙어서 밖을 내다보았지만, 감각으로 느껴지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밤의 어둠에 숨었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어둠’ 소속의 전설적인 암살자들은 그림자에 몸을 숨기는 은신술을 사용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내 눈에도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감각은 진짜다. 5명이 다가오고 있다.”
“경지는?”
“최소한 우리와 비슷한 정도?”
“좋지 않군.”
슬라이트가 손에 쥔 검에 힘을 주었다. 녀석도 긴장하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상황은 좋지 않다. 내가 동급의 5성 기사보다 조금 강할지도 모르지만 다섯 명을 상대할 수 있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도 좀 힘들 것 같다. 여차하면 슬라이트와 함께 지구로 넘어가야 한다.
“왔다.”
칩입자들이 어느새 저택의 지척에 도착했다. 여전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거의 확실하다. 열린 문이나 창문은 없지만, 마법 처리가 되지 않은 문짝 같은 것은 5성 기사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장애물이다.
스스슥! 끼익!
거의 동시에 여러 군데에서 창문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슬라이트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다. 나도 초감각으로 감지하고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나는 몰라도 슬라이트는 거의 일방적으로 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인 점은 침입자들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수준 높은 암살자의 경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기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씩 침입자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것은 확실하다. 창밖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만이 유난히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정적을 깨는 존재가 있었다.
으르르! 먕! 먕!
똘똘이가 허공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집안에 들어온 침입자 중 한명의 바로 앞이었다. 이상하게 감이 좋은 녀석이다. 쥐는 못 잡아도 침입자는 잡는구나.
어쨌든 돌이킬 수는 없게 됐다. 똘똘이가 짖는 방향의 침입자에게 몸을 날리려는 순간 허공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잠깐 멈추십시오.”
암살자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설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십니까?”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를 살폈다. 고저 없이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적어도 사내로 추정되는 상대는 온몸에 밀착된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특수한 복장인지 눈구멍조차 없는 완벽히 밀폐된 복장이었다.
표식 하나 특징 하나 드러나지 않는 옷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전형적인 암살자의 행색이긴 하다.
“왕실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이 사람들은 몸에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믿죠?”
내가 의문을 제기할 때 옆에서 슬라이트가 옆구리를 찔렀다.
“아마 맞을 거다. 들어본 적이 있다. 왕실의 특작 부대다.”
뭘 보고 확신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상대가 우리와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은 알았다. 만약 우리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은밀히 찾아오신 이유는요?”
“폐하께서 은밀히 공자를 불러들이라 하셨습니다.”
왕이 나선 건가? 하기야 7성에 오른 스승님은 그렇다고 해도 스승의 승급을 도운 것으로 추정되는 나는 매우 애매한 존재다.
차라리 뭔가 확실하게 이룬 것이 있다면 공을 세운 것으로 해서 작위라도 하사하겠지만 그러기엔 어리고 확실히 공을 세운 것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암살자처럼 집안에 들어오신 이유가 있나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니 당신들이 들어온 방식도 충분히 눈에 띄는데 말이지. 물론 나에게만 그렇고 보통 사람들 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지요. 저도 스승님을 뵙고 싶으니까요. 어떻게 가야 하죠?”
그러자 옆에 한명의 모습이 더 드러났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슬라이트는 움찔하며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먕!
거봐 똘똘이도 알고 있었다고 하잖은가? 똘똘이만도 못한 놈.
새로 나타난 사람의 손에는 검은색의 천 쪼가리가 들려있었다. 설마 그거 당신들이 입고 있는 전신 타이즈?
“그거 꼭 입어야 하는 건가요?”
“입지 않고는 은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거야 그럴 것 같긴 한데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전신 타이즈에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입어보죠.”
전신 타이즈를 건넨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옷을 모두 벗고 환복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옆을 보자 슬라이트 놈의 눈꼬리가 슬쩍 휘어진 것이 보인다.
“이거 한 벌 더 없나요? 혹시 폐하께서 슬라이트는 부르지 않으셨나요?”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여벌도 없습니다.”
슬라이트놈도 이 전신 타이즈의 불쾌함을 느껴봤어야 하는 건데 아쉽게 되었다.
“집 잘 지키고 있어라. 사람들 좀 잘 다독이고.”
“알았다.”
슬라이트에게 뒤를 부탁하고 간단하게 은신복의 작동방법을 배운 뒤 특작 부대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니 확실히 이 옷의 위력을 알 것 같았다. 이것은 굉장한 아이템이다.
눈까지 가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훤히 시야가 보일 뿐더러 다른 특작 대원의 모습도 보인다. 전신에 밀착되는 옷이라 조금 불편하고 땀도 찰 줄 알았는데 굉장히 쾌적하다. 은신 기능을 포함해서 대체 몇 가지 기능이 들어있는 옷인지 모르겠다.
말없이 특작대를 따라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을 걸어 한참을 걷자 그곳에 특색 없는 검은색 마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타십시오.”
차에는 나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한 사람만이 타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헤어졌다. 마동차는 바로 왕궁으로 향하지 않고 몇군데를 일부러 돌아 북쪽 외곽의 어느 평범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내린 후 저택의 지하로 들어가자 꽤 거대한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 안에는 또 다른 마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곳 앞에는 은신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차를 타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기왕 입은 것 조금 더 은신복의 기능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벗어서 내놓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내준 깔끔한 보통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곳에서 특작대와 완전히 헤어지고 대기하고 있던 마동차를 타고 지하통로를 달렸다. 이거 왕실의 비밀통로인가? 그냥 보여주지 말고 눈이라도 가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슬쩍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운전하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곳도 기본적으로는 기밀이긴 하지만 그리 중요한 비밀 통로는 아닙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발설하진 말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통로라고는 했지만 들어오면서 봤던 보안 수준을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밖에서 이곳의 얘기를 할 생각도 없었다. 왕실의 비밀을 발설하고 다니다간 매우 좋지 않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조금 전에 만났던 특작대가 이번엔 심장을 노리고 찾아올지도 모른다.
기나긴 통로를 지나 마침내 도착한 곳에는 드디어 왕궁이라는 것이 실감이 날 정도의 삼엄한 경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체 변형을 사용해 왕실에 침투하는 것도 생각해봤던 나로서는 안 하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렇게 수십 개의 확인과 보안 절차를 거쳐 마침내 도착한 곳은 그냥 빈방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밤에 끌려오기는 했다.
“쉬시고 난 후에 폐하를 접견하실 겁니다.”
이곳까지 나를 안내한 왕궁의 시녀가 그렇게 알려주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 전에 스승님을 뵐 수 있을까요? 노엘 브라스경이요.”
“그것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확인해 드릴까요?”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
왕궁의 시녀는 귀족 출신이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한번 해본 소리인데 거절하지 않고 알아봐 준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잠시 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좀 전의 시녀가 다시 나타났다.
“폐하를 접견하실 때 함께 뵐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방을 나가는 시녀가 은근히 눈웃음을 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잘 생겨서는 아닐 것이고 내 소문이 벌써 퍼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지 않은 방을 내준 것인지는 몰라도 물건이 모두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왕궁치고 방은 화려하지 않았다.
잠시 눈을 붙여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국왕을 만나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수십 개의 경로를 만들어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동이 트는 것을 지켜보다 깜빡 졸았을까? 내가 아무리 불면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없이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놀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녀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시녀다.
“폐하를 뵈러 갈 시간입니다.”
나는 군말 없이 일어서서 시녀를 따라갔다. 그런데 시녀가 나에게 아주 약한 적의를 가지고 있다. 뭐 여러 귀족 가문에서 들어오는 시녀들이니 에인프라흐 공작가와 반대 파벌에서 들어온 시녀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왕궁이 확실히 넓긴 했다. 그게 그거인 것 같은 복도를 돌고 돌았다. 전생의 기억으로 왕궁 같은 곳은 일부러 복잡하게 짓는다고 들었던 것 같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왕이 있을 것 같은 화려한 문 앞에 도착했다.
문밖에 근위 기사로 보이는 기사 둘이 경계하고 있다가 시녀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안에 기별을 넣었다.
“아이브 라이브러쉬 공주님과 빅터 하네스가 도착하였습니다.”
시녀가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