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1+1=?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녀석을 죽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독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지만 녀석의 뼈와 근육이 워낙 단단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도끼로 나무를 하듯이 같은 부위를 계속 내리찍었다. 그래서 결국 목을 자르는 데 성공했지만 그래도 녀석은 죽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변이체 놈들을 생명체로 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죽긴 죽으니까 생명체로 봐야 할 것도 같은데 단순하게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찌른다고 해서 이 녀석들은 죽지 않는다.
그냥 목숨을 부지하며 버티는 정도가 아니다. 변이체 놈들은 머리가 잘리고 심장이 박살 나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완전히 죽여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변이체들의 진화 후에는 녀석들을 죽이는 것을 사실상 포기했었다. 전투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출중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던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녀석들은 그때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지난번 그리고 이번에도 확인했다. 지금이 변이체들의 전성기였다면 마탑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있었다고 해도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베고 찌르고 다시 베어냈다.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파내고 장기들을 모두 끄집어내 조각내고 팔다리의 관절을 끊어놓았다.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초감각이 미약하게나마 위험 반응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은 녀석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탑에서 가져온 물건 중 하나인 악마를 먹는 벌레를 꺼냈다. 작은 상자를 열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공벌레처럼 생긴 녀석들 십여마리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악마의 시체를 먹이로 삼는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시체만 먹는 벌레는 나에게 필요가 없다. 아직 시체는 아니지만, 반격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니 이 정도는 먹지 않을까 해서 벌레들을 악마의 피와 체액이 가득한 곳에 쏟아놓았다.
변이체의 피에 푹 절여지자 동면에 들어갔던 녀석들이 꼬물거리면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먹어 커지는 것처럼 급격하게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손바닥만 한 크기로 커진 녀석들은 짧은 다리를 꼬물거리며 움직여 토막 난 변이체의 살점을 씹어먹기 시작했다. 변이체의 몸은 살이라고 해도 보통 강도가 아닌데 오독오독 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뜯어먹는 것이 녀석들의 이빨도 무시할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벌레들도 열심히 일하니 나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계속해서 변이체를 계속 조각냈다. 검을 내리치는 동작이 반복되며 나는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깨달음이 찾아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옛날 생각을 조금 했다. 전생의 기억은 좋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것은 대격변 전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대격변 이후에는 더욱 좋지 않은 기억밖에 없다. 기억 하나하나를 떠올릴수록 대체 이런 식으로 어떻게 60살까지 살았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다.
그러다 정신이 돌아왔다. 변이체에게 느껴지던 위험 반응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침내 녀석이 죽은 것이다. 뼈와 단단한 근육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진고기 수준이 되어있었다. 이 정도가 되어서야 완전히 죽는다. 놈들의 지독함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
그건 그거고 이제 챙겨야 할 것이 있다. 변이체의 시체를 저쪽 세상에 쉽게 꺼내놓을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악마와 관련된 것은 그만큼 위험했다. 아공간에 들어있던 도플갱어의 시체도 꺼내서 땅에 내려놨다.
그것은 지금도 열심히 변이체의 시체를 야금야금 뜯어먹고 있는 벌레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피를 잔뜩 마시고 손바닥만 하게 몸을 부풀렸던 녀석들이 눈에 띄게 더 커져 있었다.
발밑을 꼬물거리며 돌아다니면서도 나를 공격하지는 않는 것이 딱히 다른 생물에 대한 공격성은 없는 듯 하다.
그런데 이제 시체를 다 먹고 나면 이 녀석들은 다시 동면에 들어가는 건가? 뭐 그것은 시간이 지난다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문제고 녀석들이 시체를 다 씹어먹기 전에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이 녀석의 능력은 아마도 사이코 메트리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다. 같은 능력이 중복되면 과연 어떻게 될까. 게임처럼 강화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아무 효과도 일어나지 않을까? 궁금하면 해보면 된다.
나는 녀석의 덩어리 중에 가장 큰 덩어리로 손을 뻗었다. 자르지 못한 척추뼈와 이것저것이 붙어있는 부분이었다. 시체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뼈 부분에 손을 댔다.
화아아악!
실제로 소리가 난 것은 아니지만 저런 소리가 귀에 들린 것만 같았다. 걱정과 다르게 또 한 번의 각성이 있었다.
예상대로 녀석의 능력은 사이코 메트리였다. 그리고 마치 게임처럼 나에게 있던 능력이 강화되었다. 상식적으로 1+1은 2가 되어야 하는데 느낌상으로는 2보다는 더 좋아진 것 같았다. 2.5나 3 정도는 되는 느낌?
그렇다면 변이체나 생존자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 중에 가장 흔했던 능력인 신체 강화 같은 능력을 두 번 정도만 각성하면 엄청나게 강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변이체는 모두 떠돌이, 그것도 비전투능력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그렇기에 상대할 수 있었다.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강한 변이체들은 대부분 무시무시한 전투 능력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아직 나는 약하다. 그것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나는 아직 더 강해져야만 한다.
강화된 사이코 메트리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잘 모르겠으면 직접 해보면 된다. 더럽혀 지지 않은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사채업자들에게 빼앗은 제국 시절의 장부를 꺼내 위에 손을 올리고 집중했다.
곧 시야가 바뀌고 장부의 시야에서 옛 기억이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제국의 유산을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기대했지만 정작 보이고 들린 것은 장부의 작성자인 것으로 보이는 하급 관리의 푸념뿐이었다.
기억의 재생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확실히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부작용이 줄어들었다. 뇌를 불판에 올려놓고 굽는 것 같던 고통이 없었다. 그래도 뇌가 조금 따끈하게 데워진 느낌은 들었다. 이 정도라면 하루에 한 번씩은 써도 몸에 무리가 갈 것 같진 않았다.
변이체 놈은 쉴 새도 없이 계속 쓰는 것 같았는데 그 정도가 되려면 사이코 메트리를 가진 녀석을 두세번은 더 만나서 잡아야 가능할 것 같았다.
아직도 여전히 꾸준하게 포식하고 있는 공벌레들을 내버려 두고 일단 지구로 넘어왔다.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구로 넘어오자마자 1층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스승님이 느껴졌다. 본래 일찍 일어나시긴 하지만 이 시간에 1층으로 내려오시진 않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고용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배려였다.
나는 몸과 옷 상태를 확인하고 재빨리 옷을 벗어 던지고 물수건으로 몸을 꼼꼼하게 닦은 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위로 올라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스승님에게 아침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시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시더니 천천히 입을 여셨다.
올 것이 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밤사이에 내가 잔뜩 기세를 피워올리며 지구를 들락거리는 것을 스승님이 느끼지 못하셨을 리 없다.
“빅터야.”
“네, 스승님”
“너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역시 모르셨을 리가 없다. 굳이 지구를 들락거리는 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영약 사태에서 이미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나는 스승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었다.
“네 비밀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
스승님은 좋은 분이다. 물론 내 덕분에 평생의 숙원이었던 벽을 넘어선 것도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그것을 떠나 충분히 인격자였고 좋은 사람이다.
감동적인 말씀이긴 했지만, 과연 내가 연 통로에서 악마가 튀어나와도 저 생각이 변하지 않으실까? 이런 상황에선 순수하게 감동하고 기뻐해도 좋을 텐데 또다시 인간 불신이 튀어나와 버렸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믿고 있으마.”
스승님은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본인의 방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 시작되었고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겨울이 찾아온다 싶었는데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16살이 되었다. 그 사이에 철권단에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졸업자가 연달아서 나왔다. 홍보용으로 풀어놓은 노래는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고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좋자. 슈에르츠는 결국 가수로 전향하는 것을 선택했다.
슈에르츠가 공연하는 극장은 연일 만원사례였고 각종 귀족가의 초청이 끊이지 않았다. 세 번째 졸업자는 제이콥 카이사라는 녀석이었다. 제이콥은 철권단 내에서 가장 사교성이 좋고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는 밝은 녀석이었다. 그리고 슈에르츠와는 어린 시절부터 절친이었다.
외모로만 보면 이 녀석이 가장 연예인에 가깝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춤과 노래 어느 쪽도 대단하진 못했다. 대신 화술이 아주 좋았다.
제이콥은 곁에 있는 사람을 즐겁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화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격변 전의 지구였다면 예능인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직 재능을 꽃피울 환경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이콥 카이사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할 곳을 찾아냈다. 제이콥은 나에게 스스로 찾아와 자신이 슈에르츠의 뒷바라지하겠다고 했다. 혼자서 이래저래 설명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아직 이 세상에는 없는 개념인 연예인 매니저였다.
이미 그 개념을 알고 있는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원한다는 것이 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아이브 공주를 설득해 제이콥을 토끼 꼬리 상단의 직원이자 슈에르츠의 전담 매니저로 취직시켰다.
제이콥은 자신의 천직을 찾은 것처럼 기가 막히게 자기 능력을 발휘했는데 섭외가 들어온 귀족가를 상대해 원래보다 훨씬 좋은 조건의 계약을 따오며 많은 관객들을 상대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해지기 쉬운 슈에르츠를 살폈다.
‘모두의 왕국’은 여전히 찍어내기가 바쁘게 팔리고 있었다. 덕분에 미스카엘은 여전히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이브 공주는 ‘모두의 왕국’으로 번 돈을 슈에르츠 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재능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해 지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 한 번 제이콥의 능력이 발휘되는데 성격이 까칠하기로 유명한 예술가들을 찾아가 설득해 계약을 따내고 화가나 조각가들이 만들어낸 예술품을 예상한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곡을 계속 작곡해 슈에르츠에게 공급했다. 슈에르츠도 유명해졌지만, 작곡가인 내 이름도 슬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작곡도 하고 거의 간섭은 하지 않지만, 사업도 하면서 훈련도 열심히 했다. 그런 나를 가끔 슬라이트가 질렸다는 눈으로 보고는 하는데 가뿐히 무시해줬다.
나는 공작가의 자식도 아니고 물려받을 재산도 많지 않다. 스승님의 영지를 물려받게 될 확률이 높지만 확정된 것도 아니다. 근처에 제국의 유산이 잠들어 있을 확률이 높지만, 영지 그 자체로는 그다지 좋은 영지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슬라이트나 자칼 혹은 스테이시처럼 타고난 천재도 아니다. 그들보다 몇 배는 열심히 살아야 겨우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하루를 마치고 지구로 건너왔다. 공벌레들은 시간이 꽤 오래 걸리긴 했지만 5성 기사의 검을 맞고도 흠집도 나지 않던 변이체를 뼈까지 씹어먹어서 이제 방에는 변이체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공벌레들을 붙잡아 뒤집어서 확인까지 했지만, 저 작은 녀석의 턱에 그만한 힘이 있을 리는 없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녀석들의 타액이 조금씩이지만 변이체의 가죽이나 뼈를 녹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모두 마친 공벌레들은 구석에 모여 몸을 둥글게 말고 다시 동면에 들어갔다. 아직 크기는 제법 커진 그 상태였는데 여기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처음 봤을 때처럼 손가락만 한 크기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뭔가 타액도 그렇고 뭔가 연구하고 싶어지는 녀석들이긴 한데 아쉽게도 나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이 부족했다.
오늘 지구에 들어온 것은 매일 하는 연공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수확이 다가왔다. 저택에서 화분에 키우는 토끼 꼬리 풀도 열매를 맺었고 모두 수확했다.
딱히 계절에 상관없이 열매를 맺는 품종이라 기상연구소 뒤편에서 자란 녀석들은 아직 한참 겨울인데도 눈밭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초록색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두 번째 수확물을 어떻게 처리하냐였다. 영약을 만드는 것은 확정이다. 어차피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명문가 3종 세트는 처음부터 당연히 그것을 바라고 들어온 녀석들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혜택을 줄 수는 없다. 일단 슬라이트는 제외다. 이미 녀석은 한번 영약을 먹었다. 지구의 마나에 계속 노출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철권단도 마찬가지다.
자칼과 스테이시는 고민을 좀 해봐야 한다. 자칼이라면 모르겠지만 스테이시는 스승님처럼 영약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챌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마그나는 조금 안심이다. 이번 2차 영약 배포 때는 명문가의 자식치고 성장이 더딘 마그나가 최대 수혜자가 될 확률이 높을 것 같다.
기상연구소의 뒷산에서 심어둔 토끼꼬리 풀을 모두 수확하고 나는 두 번째 영약 제조에 들어갔다. 지난번과 달리 왕실 연단술사의 조언을 받아 여러 가지 기술과 배합법이 향상되었다.
두 번째로 중요할 수도 있는 부분인 맛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먹을 것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