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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19화 (119/206)

119. 정령사의 재능

-어휴, 답답해 멍청이들 그것도 몰라?

모두가 뮤어 아이번의 상태를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아스트로퍼가 튀어나왔다.

아스트로퍼를 처음 본 이들이 모두 놀랍고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스테이시만이 눈을 반짝이며 아스트로퍼 앞으로 얼굴을 바짝 붙였다.

“뭐, 뭐에요. 이 귀여운 애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입이 트여서 육성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나 스테이시가 저렇게 길게 말하는 거 처음 들어봐”

“나도”

아스트로퍼보다 스테이시가 말하는 것을 더 놀라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스테이시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부담이 돼서 슬쩍 밀어냈다.

“스트라이더 799번 아스트로퍼다. 1급 보고에서 내가 선택한 거야.”

“우와~!”

스테이시의 눈은 아스트로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또 미친 마법사 모드가 발동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갑자기 달려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아스트로퍼 너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어?”

-당연한 말씀. 나는 모르는 게 없어.

뭔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스트로퍼 안에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입력해둔 지식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뮤어의 상태는 왜 저러는 건데?”

-정령사로 각성이야. 그것도 몰라?

극히 희귀하지만, 엘프가 아닌데도 정령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희귀하기도 하지만 정령사로 각성하고 나면 인간들과 어울려 살기를 원하지 않아 직접 보는 것은 엘프만큼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뮤어 아이번이 정령사가 된다는 건가?”

-그래, 그런데 반응이 그리 좋진 않아. 아마 하급 정령사가 될거야.

하급 정령사라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냥 정령사 자체가 매우 귀한 존재다.

“잘됐네”

다른 정령사들처럼 사람 사이에서 생활하는 것을 포기하고 어딘가 자연으로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매우 좋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네요. 참 잘 됐습니다.”

“깨어나면 축하 파티를 하자.”

“이제 우리만 잘하면 되겠구나.”

“우리도 언젠가 저런 기회가 오겠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철권단원들이 한마디씩을 던졌다.

뮤어 아이번까지 독립한다고 하면 이제 남은 사람은 4명이다.

첫번째는 철권단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자힘 오로본이다. 아직까지 딱히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적은 없지만, 맏형으로서 철권단을 잘 이끌어 왔다.

리더쉽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다. 만약 자힘 오로본이 없었다면 스승님의 가혹한 훈련을 포기한 단원도 꽤 많았을 것이다.

두번째로는 비에르사 마르셀이라는 친구다. 이 친구 역시 딱히 다른 재능이 보이지 않아 남아있지만, 같이 생활하며 관찰했을 때 기본적으로 머리가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 기사가 아니라 문관 쪽으로 전향시키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는 뮤어 아이번과 비슷하게 내성적인 성격이라 항상 뒤편에서 조용히 있는 어네스트 하로웨이라는 사람인데 철권단 중에서 무인의 재능은 단연코 최하위지만 끈질기게 모든 훈련을 따라온 사람이다.

마지막은 마이켈 포터다. 역시 이 사람도 머리가 좋은 사람인데 평소에 대화를 하다 보면 뭔가 대국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사람 역시 정치계 쪽으로 전향시키는 것을 고민 중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름이 뭐야?

그 사이에 아스트로퍼의 이름 모으기가 시작됐다. 아스트로퍼가 모여있던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수집하는 데 성공했을 때 뮤어 아이번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푸른색의 마나가 뮤어 아이번에게서 뿜어졌다가 다시 흡수되었다가를 반복하더니 이번에는 연갈색의 마나가 나타났다.

“이것은 무슨 현상인지 알겠어?”

물어볼 곳은 역시 아스트로퍼 뿐이었다.

-에헴! 하급 정령이긴 하지만 두 가지 속성의 적성을 가지고 있는 거야. 물론 두 속성을 모두 각성한다고 장담하지는 못해. 하나만 각성해도 성공이랄까? 저 상태에서 끝내 정령과 이어지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

“일단 어떤 속성인데?”

-물과 땅 속성이야.

일단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주변에 물과 땅의 기운을 북돋아 주면 좋을 텐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네. 이런 것은 원래 자연 속에서 해야 성공확률이 높아. 그래서 엘프 중에 정령 사용자가 많은 거야.

일단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 하다. 차라리 불의 속성 같은 것이라고 하면 주변에 불이라도 질러줬을 것이다.

뮤어 아이번이 두 가지 기운을 뿜어냈다가 흡수하는 간격이 점점 더 빨라지고 시작했다. 아마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뮤어 아이번의 머리 위에 푸른색의 반투명한 작은 꼬마가 하나 나타나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어서 뮤어 아이번의 발밑에 흙색의 작은 꼬마가 나타나는 것도 보였다.

그런데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반응이 없다. 이것도 나만 보이는 건가?

“스승님 뮤어의 머리 위에 뭔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이냐?”

“뮤어의 머리 위에서 뭔가 보입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구나.”

일단 스승님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다른 이들에겐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보였다면 이미 반응했을 것이다. 특히 슬라이트나 스테이시라면 아주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아스트로퍼 너는 보이냐?”

-내가 눈이 어딨어? 하지만 느껴지기는 해. 너는 보이는구나?

아, 얘가 물건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그래 왜 나만 보이지?”

-너도 정령에 적성이 있는 거야.

“그럼 나도 언젠가 정령을 부릴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니야. 적성이 있다고 해도 각성하는 건 운에 가까워. 인간은 엘프처럼 몇백년 동안 그걸 기다릴 시간이 없잖아.

그렇다고 해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괴물 같은 놈, 이제는 정령까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슬라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능성은 작다잖아.”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

[그래요! 부럽네요!]

스테이시까지 가세해서 나를 몰아붙이려고 할 때 고맙게도 아스트로퍼가 나서 주었다.

-그런데 정령이 나타난 것을 보면 계약할 확률이 높을 것 같네.

“그래, 나 말고 뮤어를 부러워하라고.”

아스트로퍼가 나에게만 보이도록 뒤돌아서 눈을 윙크를 날렸다. 아스트로퍼의 지능이 내 생각보다 훨씬 높은 것 같다.

잠시 후 마나의 순환이 마침내 멈추고 뮤어 아이번이 눈을 떴다.

“어···.”

정작 뮤어 아이번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앞에 두 마리의 정령이 떠올라 뮤어 아이번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정령이 목소리까지는 내게 들리지 않았다.

“뮤어, 너 눈이···.”

누군가 뮤어의 눈을 보고 말을 꺼냈다. 양쪽 다 갈색 눈이던 뮤어 아이번의 눈동자 색이 바뀌어 있었다. 한쪽 눈은 마치 호수처럼 짙푸른 색이었고 다른 한쪽은 예전보다 훨씬 짙은 갈색이 되어 있었다.

또 누군가는 뮤어 아이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려고 하였으나 이번에도 아스트로퍼가 나섰다.

-쉿! 조용히 해. 중요한 순간이란 말이야!

모두가 숨을 죽이고 뮤어 아이번을 지켜보았다. 뮤어 아이번과 정령들의 교감처럼 보이는 시간은 꽤 길게 이어졌다. 정령들이 쉼 없이 조잘대면 뮤어 아이번은 그냥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만 있었다.

이윽고 물과 땅의 정령이 뮤어 아이번이 하나가 되었다. 아쉽게도 그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정령들이 푸른색과 갈색의 빛무리를 남기며 뮤어 아이번의 주변을 돌며 춤을 추고 뮤어 아이번은 미소를 지으며 정령들을 지켜보았다. 정령들의 춤이 끝날 때쯤 뮤어 아이번은 한쪽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령들은 손바닥 위에 착지하듯이 내려앉아 뮤어 아이번에게 흡수되듯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뮤어 아이번의 두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은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도 보였던 모양이다.

“어?”

“왜 저래? 괜찮은 거야?”

잠시 뿜어지던 안광이 사라지자 뮤어 아이번이 빙긋 웃으며 아직 들고 있던 엘프의 활을 내게 돌려주려 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덕분에 정령과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 활은 선물로 줄 테니 계속 쓰도록 해. 어차피 나는 궁술을 딱히 연마하지도 않는걸. 정령의 기운이 남아있다니 네가 쓰는 게 더 나을 거야. 괜찮겠지요. 스승님?”

스승님의 물건이기 때문에 동의를 구했고 스승님은 흔쾌히 그것을 승낙하셨다.

“내 평생 정령사를 직접 본 적은 이번이 두번째인데 내 눈앞에서 새로운 정령사의 탄생을 보았으니 그 값은 치러야겠지.”

-맞아. 정령사는 정령의 기운이 담겨있는 물건을 쓰는 게 좋아.

아스트로퍼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런데 내가 엘프의 활을 선물로 준 것은 뮤어 아이번을 보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뮤어 아이번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뭐, 나중에 나를 좀 도와주면 되지.”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본인의 의지가 이렇게나 강한 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도 실례가 아닌가 말이다.

“그럼 오늘은 파티인가?”

“단장님 파티인가요?!”

“우와!”

내 의견을 딱히 듣지도 않고 파티가 결정되었다. 우리 집의 파티라고 해봐야 치킨이 제공되는 아주 소박한 파티이긴 하지만 오늘은 이 녀석들에게도 특별히 고향의 맛을 좀 보여주기로 했다.

고향의 맛이 첨가된 요리에 모두가 감탄하는 작은 파티가 끝나고 제멜아크로 떠나야 하는 인원들을 따로 모아 왕궁에서 있었던 일을 전달한 뒤에야 시간이 좀 나게 되었다.

스승님도 그제야 나머지 3급 보고에서 골라서 가져온 5개의 물건을 꺼내셨는데 여러 종류의 물건이 있었다.

“종류별로 골라봤는데 잘 가져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안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3급 보고라고 해도 왕실의 보물창고이니 품질이 낮은 물건은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것을 고르셨을 것이다.

스승님이 꺼낸 물건들은 검 한 자루와 방패 하나 그리고 검을 끼울 수 있는 요대와 장갑 그리고 장화였다. 그냥 딱 봐도 왜 이렇게 골라오셨는지 알 것 같은 구성이었다.

제자가 여태까지 딱히 제대로 된 장비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검을 빼놓고는 일단 네가 다 사용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리고 남은 한 자루는 폴켄에게 돌아갔다. 아직 어려서 제대로 된 수련을 하고 있진 않지만, 폴켄도 엄연히 스승님의 제자다. 나와 함께 하고 계시지 않을 땐 틈틈이 폴켄을 봐주시기도 한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검을 받은 폴켄은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자신의 검을 자랑했고 모두가 폴켄을 축하해주었다.

낮에 꽤 많은 일이 있었기에 스승님과 함께하는 지구여행은 하루 쉬게 되었다. 그래도 지구로 넘어가 수련을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뮤어 아이번을 불렀다. 뮤어 아이번의 양쪽 어깨에는 정령들이 앉아서 뭐라고 조잘거리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서 말이야.”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

뮤어 아이번은 내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집에도 아직 알리지 않은걸요.”

“가문에서 일할 생각은 아닌 모양이네.”

철권단원들 모두가 그래왔다. 이미 가문에서 소외된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라 가문 내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습니다.”

“다른 정령사들처럼 자연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는 건가?”

“정령들이 물과 땅이 많은 곳을 원하긴 하더군요.”

정령사들이 사람이 많은 곳을 떠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그럼 암테일 영지는 어때?”

“그곳에서 제가 할 일이 있겠습니까?”

“있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에 지구로 넘어가 아스트로퍼에게 많은 질문을 했고 답을 얻었다.

“땅과 물의 정령을 다루면 농작물을 잘 키운다는 얘기가 있더라고. 엘프의 숲이 그렇게 울창한 이유가 그런 이유라고 하더군.”

-에헴! 내가 알려줬지.

안으로 들어가 쉬고 있던 아스트로퍼가 이때다 하고 튀어나와 잘난 척을 했다.

“그렇군요. 혹시··· 그 영약 재료 때문입니까?”

“아니, 그것은 아니야. 그런데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작물일 수도 있어.”

내 물음에 뮤어 아이번은 정령들과 잠시 교감을 하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맡겨 주십시오. 정령들도 좋아하는군요.”

나는 지구에서 가져온 씨앗들을 뮤어 아이번에게 건넸다. 그리고 암테일 영지에 있는 아버지와 벤 행정관에게 전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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