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국경에서
뮤어 아이번을 바로 암테일 영지로 보낸 것은 아니다. 뮤어에게는 다른 부탁도 하나 했는데 우리가 집을 떠나있는 동안 정원사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겼다.
뮤어 아이번이 정령을 가졌다고 하나 식물을 키우는데 지식이 전혀 없다. 아스트로퍼의 말로는 별 지식 없어도 정령들이 알아서 해준다고 하지만 그래도 본인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겸사겸사 정원사들을 따라다니며 보고 배움과 동시에 감시하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일석이조라고 해야 할까.
정원사들에게도 미리 말을 했다. 아무래도 꽤 오랜 기간 동안 집을 떠나 있을 것 같으니 그동안 뮤어 아이번이 좀 귀찮게 하더라도 이해해달라고 했고 정원사들은 감히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폴켄에게도 미리 주의를 줬다. 정원사들이 절대로 닭장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했다. 뭐 굳이 폴켄이 아니라도 스테이시가 이미 마법으로 감시 마법을 덕지덕지 걸어둔 덕분에 닭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나와 폴켄 뿐이었다. 그래도 만약에 대비하는 것은 지나쳐서 나쁠 것이 없다.
국왕은 아무것도 준비할 것 없이 그냥 바로 출발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걸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보다 준비할 것이 많았다.
덕분에 스승님과 함께하는 지구 여행은 중지되었다. 그래도 수련을 멈추진 않았다. 스승님과 먼저 대련해서 내가 새로 얻은 능력을 확인했고 그 후에 슬라이트와 자칼을 동시에 상대해 어렵지 않게 압승을 거두었다.
“넌 또 뭘 한 거냐? 마치 아버지와 대련하는 느낌이었다.”
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패배한 슬라이트의 소감이었다. 눈치는 정말 귀신 같은 놈이었다. 에인프라흐 공작도 눈을 뜬 사람이니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하다 보면 된다. 하수 놈아.”
내 대답에 슬라이트가 광분하며 날뛰었지만, 어차피 저 천재 놈은 이것도 얼마 걸리지 않아 따라잡을 것이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왕실에서는 며칠 사이 몇번이나 전령이 도착했다. 뮤어 아이번이 정령사가 된 것도 있었고 새롭게 들어온 정보를 전달해주었다.
슬라이트와 자칼, 스테이시의 가문과 마탑에서도 사람을 보내 물건과 서신을 쉼 없이 전달하고 있었다.
아스트로퍼를 얻어서 좋은 점이 있었다. 휴대용 저장장치 느낌이랄까. 직접 글을 읽을 수는 없어서 내가 읽어줘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읽어주기만 하면 저장이 된다. 누구처럼 한번 읽기만 해도 모두 기억하는 천재가 아닌 나에게는 굉장히 유용한 기능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왕실의 비행선이 저택의 마당에 착륙했다. 지글러 후작이 탑승하고 있다가 내리며 우리에게 마지막 조언을 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백작님, 아니 이제 후작님이신가요?”
“아직 정식으로 승작한 것도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스승님과 지글러 후작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왕실의 비행선에 올라탔다. 비행선 안에는 선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둘째 왕자가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다가 우리의 인사에 고개만 까닥 움직이고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
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스승님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선장의 안내방송 후에 비행선이 국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비행선이 왕도를 벗어날 때쯤에 뒤에 두 대의 비행선이 따라붙었는데 이번에 참여하기로 한 기사와 마법사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비행선 여행은 지루하기 짝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한가지 변수가 있었다.
쉬지 않고 조잘거리는 아스트로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테이시는 그런 아스트로퍼의 옆에 찰싹 붙어있었다.
-그렇구나. 비행선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34가지 마법이 적용된다는 거지?
“너 정말 똑똑하구나?”
스테이시가 허공에 쓰는 마법 문자를 아스트로퍼가 읽지 못하는 바람에 스테이시는 육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저러면 언령마법을 익히는 데 꽤 지장이 있다고 하던데 이제 다른 방식의 마법을 익혀서 그런지 육성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당연한 말씀, 내가 누군지 알아?
“그래 대마법사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만든 마법 생명체 아스트로퍼님”
아스트로퍼는 자신이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스트로퍼와 둘만 있을 때 그 사실을 미리 알아내 다른 사람에게 숨겨야 할 내용을 미리 알려줘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다.
아스트로퍼는 처음부터 광검제에게 선물하려고 만든 물건이었다. 그리고 아스트로퍼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보통 것들이 아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너무 큰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왕실에서 도로 회수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던 도중 던전에 관련한 내용이 나오자 아스트로퍼가 생각지도 못한 발언을 했다.
-이번 던전은 매우 위험할 거야.
“너 제국의 유산에 대해 알고 있었어?”
아스트로퍼가 제국의 유산에 대해서 알고 있기에는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아스트로퍼가 만들어진 것은 제국이 망하기 한참 전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몰라.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던전은 몰라. 하지만 거기 설치된 장치는 알아.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아스트로퍼의 말에 비행선 안에 있던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거기 설치된 장치는 주인님이 만든 거야.
“그러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네가 만들어졌을 때 제국의 던전이 없었을 때잖아.
-나는 제작된 후로 120년 동안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어. 다만 마나 소비를 줄이기 위해 휴면상태로 있었을 뿐이야. 휴면상태에서도 주변의 이야기는 모두 들을 수 있어.
“그러니까 휴면상태에서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지?”
-그래
아스트로퍼의 말이 맞다면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수도 있다.
“그럼 거기 설치된 장치가 뭔지 알아?”
-아니 몰라.
“안다며?”
-설치된 것이 주인님이 만든 내 형제라는 것만 알아. 그것이 제국 중부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제국의 중부가 바로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국경 지대다. 제국의 유산을 한 곳에 몰아서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도 이곳이 맞을 것이다.
스트라이더 시리즈 중 하나를 함정으로 만든 건가? 아니면 지난번 내가 경험했던 제국의 유산처럼 던전 자체가 그런 아티팩트를 통해 유지되는 것일 수도 있다.
“던전은 원래 위험한 곳이다. 우매한 물건아.”
저 멀리서 나와 아스트로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둘째 왕자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툭 내뱉었다.
-그래? 그런데 우리 형제가 설치된 던전은 없지 않아?
“아스트로퍼 말투 조심하랬지.”
아스트로퍼에게 주의를 줬다. 둘째 왕자도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아스트로퍼가 반말을 해도 발작하지 않고 있지만 타국의 사람에게도 이러면 괜한 분란을 만들 수 있어 아스트로퍼에게 주의를 줬었다.
그런데 보통 기계와는 다른 것인지 한 번에 교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미안, 깜빡했네?
진짜 깜빡한 걸까? 좀 의심스럽지만, 굳이 추궁하진 않았다.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것은 모른다. 하지만 원래도 보통 사람을 통과시킬 생각이 없이 만든 제국의 유산에 스트라이더 시리즈가 핵으로 사용됐다면 더욱 위험할 것만은 틀림없다.
“여태까지 발견된 모든 던전 중에 스트라이더 연작이 사용된 던전은 없었어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래요.”
모자란 내 지식에 스테이시가 보충해주었다. 제발 내가 들어갈 필요 없이 제멜아크의 공략대가 먼저 들어가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곳에 들어간 형제가 누군지는 모르고?”
-몰라.
아스트로퍼는 양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이것은 나와 아스트로퍼가 약속한 수신호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진짜 사람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스트로퍼와 둘이 남게 되면 그것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아스트로퍼 덕분에 지루하기만 할 줄 알았던 비행선 여행이 조금은 지겹지 않게 흘러갔다.
가끔 둘째 왕자가 기분 나쁜 도발을 하곤 했지만, 그 정도야 전생에 지구에서 회사 생활도 해봤던 나에게 별것 아니다. 오히려 지루한 비행에 활력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거기에 이곳에서는 전생의 회사처럼 언제까지 무조건 참을 필요도 없다. 기회만 찾아온다면 아주 확실한 방법으로 복수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며칠을 날아 마침내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비행선에서 하선하는 것은 라이브러쉬 영토 내에서 이루어졌다.
비행선의 최대 단점은 외부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왕실의 비행선은 여러 가지 방어 마법을 덕지덕지 발라놨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진 않다.
비행선을 타고 국경을 건널 때 저쪽에서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공격한다면 꼼짝없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내린 곳은 오스데라 변경백의 영지로 이곳에서부터는 말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문제는 내가 승마술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암테일 영지에서 내가 탔던 말은 아주 온순한 녀석이어서 그다지 표시가 나지 않았는데 오스데라 영지에서 내게 배정된 말은 그렇게 온순한 녀석이 아니었다.
“뭐야? 너 말을 잘 못 타는 거냐?”
슬라이트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다가왔다.
“시끄러워, 이 녀석 성격이 좋지 않아.”
내가 탄 말은 날뛰는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연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반항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스테이시까지 아무 문제 없이 말을 타고 있었다.
-바보야?
아스트로퍼까지 나를 놀리려는 듯 했다.
“너까지 왜 그래?”
-네가 가진 능력을 써. 바보야.
“쉿!”
아스트로퍼에게도 내가 가진 능력을 알려주었다. 이미 지구에도 몇번이나 아스트로퍼를 데리고 갔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조만간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알고 있어. 너무 바보 같아서 조언을 한 거야.
마법 생명체라고 하지만 물건에게 바보 취급을 받다니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런데 내 능력?
“아?”
그제야 내가 가진 능력이 떠올랐다. 이제 꽤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내가 가진 능력을 금방 떠올리지 못할 때가 있다.
여왕 돌개미에게서 흡수한 능력 중에 지배력이 있었다. 집중해서 지배력을 반항하는 말에게 사용하니 말이 거짓말처럼 온순해졌다. 정확히는 온순해졌다기보다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고 해야 할까?
다만 이것도 재생력이나 신체 변화만큼은 아니어도 지속해서 꽤 에너지를 소모하는 느낌이다.
미리 사탕을 한 주먹 꺼내 씹으며 어떠냐는 듯이 슬라이트를 보자 놀릴 거리가 사라진 녀석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몇십년 만에 정식으로 초청받아 국경을 넘어가는 사절이니만큼 우리는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대오를 정확히 유지하며 국경을 향했다.
그렇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마침내 국경선에 도착했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제멜아크의 인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내 예상보다 환영 행사는 매우 성대했다.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기사 수백명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만든 길의 끝에는 제멜아크의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 수십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가장 앞에는 제멜아크의 왕세자가 있었다.
옷차림새를 떠나서 누가 봐도 한눈에 왕세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라이브러쉬의 왕세자와 매우 비슷한 느낌이었다. 태어나기를 지배자로 태어난 인간이다.
무척 비교가 되긴 하지만 우리 쪽도 가장 선두에 둘째 왕자를 선두로 세웠고 바로 뒤에 스승님이 자리해서 겨우 균형을 맞췄다. 우리들은 그 뒤를 따라 제멜아크 왕국의 기사들이 만든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제멜아크 왕세자의 앞에 도달했다.
“환영합니다. 라이브러쉬의 왕국 여러분”
우리 왕국의 왕세자처럼 절세 미남은 아니었지만, 제멜아크의 왕세자는 품위 있으면서 절도 있는 예법을 선보이며 우리를 맞이했다.
조금 의외였다. 이미 그들이 먼저 던전을 발굴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들러리를 서주는 것으로 합의하고 온 것이긴 하지만, 조금은 우리를 경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왕세자를 비롯해 뒤를 따르는 인원들 그 누구도 우리를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단 한명을 제외하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