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21화 (121/206)

121. 의문의 남자

“환대에 감사합니다.”

둘째 왕자는 의외로 멀쩡한 인간처럼 제멜아크 왕세자에게 답례했다. 이런 자리에서도 그 특유의 싸가지를 발동할까봐 조금 불안했었는데 그래도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둘째 왕자가 생각보다 정상인처럼 왕세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나는 지금 상대편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적의를 보내고 있는 상대에게 눈을 돌렸다.

젊은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는 학자가 아닌가 싶지만 느껴지는 기세로 볼 땐 꽤 수준이 높은 마검사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안에서 그런 사람이라면 한 사람밖에 없다.

가브리엘 스피노자, 왕세자의 참모이자 제멜아크 왕국의 빅터 하네스라는 젊은 천재다.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상대에게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했다. 이것이 바로 어른의 대처라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자리에서 그렇게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미숙하다는 이야기다.

애송이에게 시선을 돌린 나는 왕세자의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는 중년인을 보았다.

흑기사 고든 바이런 후작, 갑옷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이명에 걸맞게 검은색으로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까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특이하게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옷까지 그렇게 입고 있으니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광검제다. 물론 내가 기억 속에서 보았던 여러 모습의 광검제는 저렇게 병적으로 검은색에 집착하진 않았었다. 그냥 검은색을 좋아하는 사람 정도?

곧 8성에 오를 것으로 추정되는 7성의 기사이지만, 전혀 기세가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 저 사람도 기세를 숨기는 물건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숨길 수는 없다. 무심한듯하지만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보고 있는 눈빛과 그냥 서 있는 듯 보여도 언제든지 검을 뽑아 튀어 나갈 것 같은 준비된 자세였다.

그런데도 마치 암살자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세를 숨기는 물건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이 조금 흐릿하다고 해야 하나? 원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인 듯 하다. 가끔 저런 사람들이 있다.

평화로운 지구였을 때는 고충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대격변 후에는 그런 존재감 없는 사람들의 생존율이 무척 높았다. 변이체도 무시할 만큼 미약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다.

그 타고난 능력을 고든 바이런 후작은 잘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누군가의 호위로는 최고의 재능 아닌가?

대표들끼리 별 의미 없는 환담을 얼추 끝내자 준비되어 있던 임시막사로 안내받았다. 말이 막사지 사실 우리 집과 큰 차이 없는 저택 수준의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마법의 힘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크게 체감했다.

이것은 지구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마법보다 더 빨리 더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함께 온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임시 숙소를 배정받고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만 따로 왕세자의 거처로 생각되는 중앙의 가장 큰 막사로 안내받았다.

회의실로 추정되는 커다란 방에 양쪽 국가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인원이 모였다. 수뇌부의 인원도 우리보다는 저쪽이 압도적이다.

일단 우리는 왕세자와 스승님을 제외하고는 나와 슬라이트를 비롯한 젊다 못해 어린 사람들 뿐이었으니까.

반면에 저쪽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보이는 수십명이 앉아있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요. 나는 제멜아크 왕국의 왕세자 티에그린 제멜아크라고 하오. 그럼 우리 서로 통속명이라도 하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먼저 제멜아크쪽에서 한명씩 일어나 자신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했다. 대부분 출발하기 전에 왕실에서 전달해준 문서의 목록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니 기억하고 있던 정보와 얼굴을 연결하는 작업에 불과했다.

그런데 마지막쯤 내가 전달받은 목록에 없던 인물이 나타났다.

“윌리암 와일러스라고 합니다. 던전 탐험가입니다.”

물론 왕실의 정보력에 한계가 있을 수 있고 누락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라는 것이다.

장년과 중년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나이에 윤기 없는 푸석한 회색 머리칼을 가진 음침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서 본 것을 모두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런 느낌일 경우에 틀린 적은 거의 없다. 나는 분명히 저 사내를 본 적이 있다. 다만 어디서 보았는지 확실히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윌리암 와일러스를 끝으로 제멜아크의 긴 소개가 끝나자 라이브러쉬 왕국의 차례가 되었다. 이쪽은 몇 명 되지 않는다.

“크레이브 라이브러쉬요.”

둘째 왕자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 본색을 드러내려는 것인지 아주 짧게 자기소개를 했고 다음 차례로 스승님이 자기소개를 했다.

둘째 왕자 놈의 무성의한 소개에 조금 차갑게 식었던 분위기가 제멜아크쪽에는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는 새롭게 등장한 7성 기사의 등장으로 다시 달아올랐다.

“환영합니다. 브라스 백작의 실력... 기대하겠소.”

여태까지 한마디로 하지 않고 있던 흑기사 고든 바이런 후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바이런 후작님의 실력은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스승님도 지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절대 부드럽지 않았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슬라이트나 자칼이 먼저 소개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스승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바로 옆에 앉다 보니 순서가 그렇게 되었다.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옆에 계신 노엘 브라스 백작님의 제자입니다. 6성 기사이자 3 서클 마법사입니다. 이제 16살로 아직 어리고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 미숙한 점이 보이더라도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내 소개가 끝났는데 잠시 정적이 일어났다. 스승님의 자기소개가 끝났을 때는 여러 사람이 웅성거렸었다. 나름 열심히 생각한 자기소개였는데 말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그다지 중요치 않은 인간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제멜아크의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소문이 자자한 천재를 직접 보니 오히려 소문이 모자라군. 정말 굉장합니다.”

나는 앉다 말고 급하게 일어나 답례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모자랍니다.”

“하하! 우리 스피노자 남작과 좋은 경쟁상대가 될 것 같습니다.”

나이가 되니 곧바로 남작 작위를 내린 건가? 나는 아까보다 더욱 강하게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는 가브리엘 스피노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냥 단순한 질투심이나 경쟁심이라면 저런 적개심도 이해된다. 다만 그 적개심을 씨앗으로 삼아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멜아크 왕국에 명성이 자자한 스피노자 남작님을 많이 보고 배우겠습니다.”

“저야말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내가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건네자 가브리엘 스피노자도 답했다.

다음으로 슬라이트가 문제없이 자기소개를 했고 자칼이 벌벌 떨면서도 생각보다 큰 문제 없이 소개를 마쳤다.

“라이브러쉬는 정말 대단한 인재들이 많군요.”

제멜아크 왕세자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지만, 이번엔 말에 뼈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자국의 귀족들을 순간 차가운 눈빛으로 쓸어보았다.

너희들은 뭘 했지? 라는 느낌이었다. 눈빛을 받은 귀족들이 머리를 들지 못했다. 역시 이 왕세자도 그리 만만한 인간이 아니다.

그 와중에 단 한명만이 왕세자의 눈빛에 겁먹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윌리암 와일러스였다.

여러모로 특이한 인간이다. 그런데 분명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봤는지 아직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스테이시까지 자기 소개를 했다. 스테이시는 다시 입을 닫고 마법으로 글을 써서 자기소개를 마쳤다.

자기소개를 마친 후에는 제국의 유산 발굴에 관한 이런저런 논의가 있었지만 이미 왕국 차원에서 모든 것이 조율한 것을 다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제멜아크는 이번에 확실히 큰마음을 먹었다. 왕세자와 함께 제국의 유산 공략에 참여하는 인원이 무려 6천명이다. 그리고 그중 3천명이 던전에 함께 들어간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 슬쩍 보았지만 아마도 모두 정예가 아니다. 처음부터 그럴 속셈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제멜아크는 멤파이 자작가에서 했던 것처럼 인간을 던져 제물로 사용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슬슬 한계가 왔는지 둘째 왕자 놈의 자세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저녁 식사 때 뵙도록 하지요.”

제멜아크의 왕세자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기가 막힌 순간에 회의를 멈추었다. 사실 구색을 갖추고 있을 분 의미가 없는 회의이긴 했다.

회의를 마치고 우리는 각자의 숙소로 안내받았다. 둘째 왕자는 수행원들과 함께 따로 숙소를 배정받았고 바로 옆의 숙소에 모두 들어가게 되었다.

“제멜아크의 인사를 만나본 소감은 어떠냐?”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스승님이 물으셨다.

“흑기사는 인상적이었습니다만 나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한 사람 윌리암 와일러스가 거슬렸을 뿐이다.

“그 제멜아크의 천재는 신경 쓰이지 않더냐?”

“아직 어리더군요.”

라고 말했지만,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이제 스무살이라고 들었으니 나보다 네살이나 많았다.

“하하!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나도 조금은 그렇게 느꼈다. 그래 그들이 제국의 유산을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에 대해서는 이곳에 오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직접 본 제멜아크의 전력을 본 후에도 생각했다.

아무리 많은 인원을 모았다고 해도 암테일 영지에 있던 던전의 수준으로만 생각해도 제멜아크의 공략대가 운이 따르지 않는 한 제국의 유산을 공략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조금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 정도냐?”

“예, 제국의 던전은 정말 악랄합니다. 숫자가 많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방법으로 해결한 멤파이 자작령의 던전도 있었지만, 정말 운이 좋았던 경우라고 봐야 했다.

거기에 이곳은 아스트로퍼가 말하기를 스트라이더 시리즈가 핵으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그래서 잠시 시간이 났을 때 아스트로퍼에게 그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스승님과 대화를 마치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 아스트로퍼를 불러냈다.

“아스트로퍼 나와봐”

-이젠 나가도 되는 거야?

그렇게 묻기에는 벌써 나와 있었다.

“비행선 안에서 말했던 던전에 핵으로 설치되었다는 형제 있잖아. 누군지 알 것 같아?”

-아, 그거? 생각이 날듯도 하고 안 날 것 같기도 하고?

아스트로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뻔하다.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정말 대단한 천재가 맞다.

그런데 너무 뛰어난 나머지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영역까지 만들어버렸다. 광검제가 아스트로퍼를 가져가지 않은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른다.

“뭔가 원하는 것이 있나?”

-형제를 모으길 원해. 다만 아무 형제는 안돼.

“의미가 있나? 백룡이처럼 또 합체라도 하는 거야?”

-비슷해. 너도 손해는 아닐 거야. 형제들을 모을수록 나는 더 강해진다!

뭐 아스트로퍼가 강해진다면 나도 강해지는 것이니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스트라이더 시리즈를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다.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을게. 약속하지.”

-정말 약속?

“그래 약속”

-좋아, 한번 믿어주도록 할게. 형제 중에 듀알리움 재질로 만들어진 형제가 필요해.

“그건 뭐지? 들어본 적도 없는 재질인데?”

-당연하지, 주인님이 만들어낸 합금이니까.

어쩐지 백룡이나 아스트로퍼나 재질이 좀 특이하게 보인다는 생각은 했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직접 만들어서 자신만 사용한 재질인 듯 하다.

“내가 그것을 확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거야. 대신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손에 넣도록 할게. 그럼 제국의 유산에 설치된 네 형제에 대해 알려줘.”

-내 주변에 형제들이 여러 개 있었어. 그런데 내가 옮겨지기 전에 여러 형제가 한명씩 사라졌거든. 그런데 그중에서 던전에 설치될만한 형제는 딱 한명이었어.

“그래서 그게 누구고 어떤 기능이 있는데?”

-777번 아스트라호

아스트로퍼와 번호대가 비슷하니 이름도 비슷한 것인가? 그보단 기능이 중요하다.

“기능은?”

-이공간.

“아공간이 아니라 이공간?”

-그래 이공간.

예상보다 훨씬 까다로운 문제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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