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같지만 다른 세상의 나
교주와 부교주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하면 윌리암 와일러스를 지금 죽이는 것이 잘못된 선택일지도 모른다.
부교주 놈이 분명히 보복하러 오겠지. 그런데 여기서 윌리암 와일러스를 살려둔다고 해서 부교주가 나를 살려줄까? 몇 년 어쩌면 십몇년쯤 더 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는 날 죽이러 올 것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힘을 얻는 순간 부교주나 교주를 죽인다. 세상 어디에 숨어있더라도 찾아서 죽일 것이다.
“스승님 기막을 부탁드립니다.”
내 부탁에 스승님이 곧바로 기막을 쳤다.
“스승님 지금 뒤를 치지요.”
“저 침입자를 공격하자는 말이냐?”
“아니요. 마신교를 치는 겁니다.”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이 김경식과 힘을 합쳐 밖에 있는 반마들을 쓸어버리면 된다. 김경식이 밀리고 있긴 하지만 거의 백중세인 상황에서 7성 기사 둘이 가세하면 힘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나는 그사이에 안으로 숨어들어가 윌리암 와일러스를 제거한다. 밖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어쩌면 안에 남아있는 나머지 호위들까지 밖으로 내보낼지도 모른다. 그 틈을 노린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이 아니면 던전을 나가기 전까지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제처럼 김경식이 날이 밝을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김경식이 만약 죽는다면 윌리암 와일러스도 정성화의 거짓말을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김경식이 죽었을 때 나오는 보물도 문제다. 만약 대 마왕용 무기의 파츠가 윌리암 와일러스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 그 녀석은 기억을 읽을 수 있으니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해하지만, 저 사람이 우리와 함께 싸우겠느냐?”
“그것은 제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만약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시작할 필요가 없겠지요.”
“나야 네 결정에 따르겠지만, 저쪽은 어떻게 하겠느냐?”
스승님의 말씀도 맞다. 스승님이야 내 결정에 거의 무조건 따라주시는 분이지만 고든 바이런 후작은 다른 문제다.
나는 고든 바이런 후작을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위를 설득하면 되는 일이다.
“왕세자를 설득할 생각입니다. 기막을 부탁드립니다.”
스승님이 고든 바이런 후작과 몇 마디를 나눈 후 우리는 함께 왕세자를 찾아갔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예, 전하 저는 지금이 마신교를 처단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왕세자는 절대 바보가 아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저들을 지금 처리하는 것은 좋아. 그렇다면 당장 내일부터 밤의 습격을 직접 막아내야 하는 우리의 피해가 너무 커지지 않겠는가?”
우리의 피해다. 제멜아크의 피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더 이상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전하, 저도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언제까지 우리를 지켜줄 것이란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때 옆에서 왕세자를 보좌하고 있던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맞습니다. 전하. 저들은 적입니다. 인류의 적이지요. 저들이 이곳에서 저렇게 직접 적을 막아내는 것은 이 던전의 보물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들이 저 습격자를 처치하고 안내인에게 열쇠를 얻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밖에 검제와 검성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던전을 나가는 순간 처치하고 빼앗으면 되지 않겠는가?”
“제가 전에 윌리암 와일러스에게 던전 밖에 검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는데도 저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밖에 검제님과 검성님이 계시다고 해도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자네 전에 했던 것과 말이 달라진 것 아닌가?”
역시 왕세자 자리를 딱치쳐서 얻은 것은 아닌지 쓸데없이 예리하다.
“그것은 일부러 윌리암 와일러스가 들으라고 한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어야 우리가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저들은 인간이 아니라 반마입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지금처럼 기막을 치는 것이 아닌 이상 엿들을 능력이 있지요.”
왕세자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까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끝을 봐야 합니다. 전하께서도 애초에 불의와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탄하지 않으셨습니까?”
왕세자가 고민에 빠졌다. 많은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더 줘야 한다.
“저들의 병력은 저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렇겠지. 아직 건물 안에서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측근들이 모두 나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병사들 사이에 200명 정도의 반마가 숨어있습니다.”
“뭐라고?”
왕세자를 비롯한 고든 바이런 후작과 가브리엘 스피노자까지 모두가 놀랐다.
“그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물어왔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저는 이미 반마들과 여러 번 전투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라이브러쉬의 왕도에서도 싸운 적이 있었고 스승님의 영지에서 발견된 제국의 던전도 마신교에서 먼저 선점하고 있었지요. 그 과정에서 반마들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거짓은 진실 속에 숨기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은 법이다. 제멜아크의 정보력도 매우 높다고 했으니 암테일 영지의 던전을 내가 공략했다는 것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흐음”
그런데 내 의도와 달리 한숨과 함께 왕세자의 눈이 더욱 깊어졌다. 고민이 깊어졌다는 소리다. 하지만 왕세자에게 그리 긴 시간을 줄 수가 없다. 지금도 김경식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조금씩 계속 밀리고 있었다. 만약 김경식이 마법 생명체가 아니라 진짜 인간이었다면 벌써 패배했을 것이다.
“그만한 병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언제고 저들이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는 뜻입니다. 갑자기 내부에서 200명의 반마가 날뛰게 되면 그 피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왕세자의 고민이 길어질 때 여태까지 조용히 관망하고 있던 고든 바이런 후작이 입을 열었다.
“저도 여기서 결단을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을 이용해 던전을 공략하고 밖으로 나갔을 때 과연 그것을 우리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든 바이런 후작이 말하는 것은 실리가 아닌 명예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저와 저 습격자의 말이 통할 때 얘기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지요.”
“자네는 저자와 말이 통하는가? 몇 마디 하는 것을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네만.”
제멜아크쪽에서 김경식의 혼잣말을 들었던 것은 7성 기사였던 고든 바이런 후작뿐이었다.
“네, 특이한 고대어를 사용합니다. 저는 운 좋게 던전에서 그것을 배울 수 있었지요. 지난번 안내인을 만났을 때 말이 통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저희도 그것을 몰라 피해를 입었었지요. 물론 윌리암 와일러스에겐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왕세자가 결단을 내렸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가?”
“제 말이 통한다면 브라스 백작과 바이런 후작께서 저자와 함께 반마들을 상대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윌리암 와일러스를 처리하지요.”
“그럼 나머지는 숨어있는 반마들과 잔당을 처리하면 되겠군.”
“그렇습니다.”
바보가 아니니 말이 잘 통해서 좋다.
“그런데 괜찮겠는가? 자네 혼자 그자와 측근을 상대하는 것이?”
“제 목숨 하나 건사할 정도의 실력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통로를 열고 들어가 숨으면 된다.
“그것은 제가 보증하지요. 제가 키운 제자가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스승님도 한마디를 보태주셨다.
“실력이 있다는 것이야. 보면 알긴 하지만···.”
“맡겨 주십시오.”
“그럼 해보지.”
왕세자의 결단이 내려지자 일을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와 왕세자가 전투를 지켜보며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과 마법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하고 우리도 슬라이트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준비하라고 일렀다.
준비가 대충 되어가는 모양이 되자 나는 홀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손에는 이미 아스트로퍼가 변한 검이 들려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양쪽이 모두 나를 경계하기 시작하며 전투가 잠시 중단되었다. 반마가 아니라 진짜 변이체였다면 내가 근처에 왔다고 해서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역시 반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돌개미 여왕처럼 저것들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반마가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여전히 검을 변이체들을 향해 겨누고 있었지만 나를 경계하고 있는 김경식을 향해 속에 눌러왔던 말을 내뱉었다.
“경식이 형”
이 김경식은 내가 알던 그 김경식이 아님을 안다. 같은 지구의 사람도 아니었고 심지어 실제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나도 지구의 대한민국에 살던 생존자 강한수가 아니라 빅터 하네스다. 그래도 한번은 이렇게 불러보고 싶었다.
“나를 알아?”
반마들에게 고정되어 있던 김경식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알지, 알았었지”
“넌 누구지?”
“강한수였지만, 지금은 빅터 하네스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형한테 검술을 배웠어.”
“내가 검을 가르쳐준 사람은 강한수가 아니라 강현수인데? 그리고 너 같은 외국인도 아니었고.”
저쪽 세상의 나는 한수가 아니라 현수였던건가?
“알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형은 저기 안에 있는 정성화를 죽이려는 거지?”
“그래, 그런데 어제와 오늘은 이상한 잡것들이 방해하는군.”
“그거 우리가 도와줄게. 저기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이 도와줄거야. 괜찮을까?”
“처음 보는 너를 어떻게 믿지?”
김경식은 여전히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때를 대비한 답이 있었다. 다른 세상의 김경식이지만 비슷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이 말이 분명히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 친구면 영원히 친구고 한 번 적은 영원히 적이기 때문이지.”
내가 알던 김경식이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너는 내 친구인가?”
“맞아. 그리고 저 앞에 쓰레기들은 내 적이지.”
“좋다. 기억은 없지만, 한번 믿어보지.”
김경식은 씨익 웃으며 제의를 승낙했다. 김경식은 이런 사람이었다. 대격변 이후 험난한 세상에서 살기에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도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생각해보니 저런 성격이라면 대격변 이전이라고 해도 살기 어려웠을 것 같기는 하다. 그때도 이미 대한민국은 헬이라고 불렸으니까. 착한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세상이었다.
나는 즉시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에게 신호했고 두 명의 전략 병기가 질풍처럼 달려오기 시작했다.
“굉장한데?”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의 실력을 바로 간파한 김경식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멈춰있던 반마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곧바로 달려온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이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고 하듯이 화려한 검술과 막강한 오러를 뿜어내며 전장에 참여했다.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반마들 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이놈들 배신이냐!”
뒤로 물러난 보통 반마들 사이에서 아직 인간 모습으로 남아있던 놈 중의 하나가 소리쳤다. 반마들을 통제하는 놈이 있다면 아마도 저놈일 것이다. 저놈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괴물들이 날뛰는 곳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소리쳤던 녀석을 계속 주시했다. 원래는 곧바로 국방부 건물 내부로 숨어들려고 했었는데 저 녀석은 처리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김경식 하나만으로도 거의 동수였던 전투는 두 명의 실력자가 합류하자 일방적으로 반마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두 무인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그 기세가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며 모두의 시선이 그쪽에 몰려 있을 때 나는 슬그머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