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49화 (149/206)

149. 신들의 황혼

벽을 뚫고 날아가 마당을 뒹굴고 있던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일어서자마자 방향을 잡지 못하고 또 어딘가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저건 왜 데려온 거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광검제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요. 저래보여도 굉장한 천재입니다. 금방 적응하겠지요.”

“그러는 너는 아무렇지도 않군?”

“전 이미 한번 경험이 있어서요.”

내 대답에 관심을 보인 것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였다.

“이런 경험이 있다고? 누가? 그렇게 마법이 발전한 거야?”

마법사는 마법 생명체가 되어서도 성격이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광검제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를 그냥 마법 생명체라고 볼 수는 있는 걸까? 이 사람들은 이 세계의 신이나 마찬가지다.

“아뇨, 마법은 아닙니다. 저도 어떻게 누가 그런 힘을 줬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그런 힘을 잠시 얻어서 사용한 적이 있지요.”

“너도 갔었나?”

광검제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

“얼기설기 지은 것 같은 오두막 그곳에 갔었나?”

“진짜로 갔던 것인지 꿈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요.”

광검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뭐라고 입술을 작게 달싹였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그런 거구나?”

하지만 그것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에게는 들렸는지 뭔가 알았다는 말과 표정을 지었다.

“네가 이번 세대의 용사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용사라고? 여태까지 살면서 내가 천재는 아니어도 멍청하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대화의 진도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용사들은 그곳에 가는 듯 해.”

“그럼 멸악의 마법사님께서도 그곳에 가신적이 있는 겁니까?”

“아니, 난 용사가 아니었는걸?”

“용사가 아니셨다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사람들이 용사라고 불러주긴 했지. 하지만 그곳에 갔던 것은 아렌밖에 없었어. 진짜 용사는 아렌 뿐이었던 거지.”

광휘의 기사 아렌 세인티아, 지금은 농축된 무언가가 되어 내 아공간 안에 있는 그분이다. 이걸 이 사람들이 알면 날 죽이려고 할까? 아니 애초에 이걸 만든 것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이니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용사란 것은 뭡니까?”

“세상을 구할 자격이 있는 사람, 일종의 운전면허증 같은 거라고 할까?”

광검제가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럼 광검제께서도 그곳에 가셨습니까?”

“지구에서는 간 적이 있다. 하지만 이곳에선 가지 못했지.”

“하지만 이곳에서도 세상을 두 번이나 구하셨잖습니까.”

“운전면허라고 하지 않았나? 운전면허가 없다고 차를 운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그리고 내 기억에 있는 것은 아렌과 함께한 한 번뿐이다. 그 이후에 나 혼자 세상을 구했다면 그때는 아마도 오두막에 갔을 것이다.”

“전 그곳에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요.”

“나도 그랬다.”

어이가 없었다. 역시 그곳에서 보았던 두 명은 신이었던 것 같다. 뭐 그런 무책임한 신이 다 있지? 덕분에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아쉬웠다.

나는 원래도 무신론자였지만, 대격변 이후의 세상을 겪으며 세상에 신은 없다는 확신을 했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세상이 그렇게 멸망하는 것을 두고 보지 말았어야 했다.

인간이야 지은 죄가 많으니 멸망시킨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구에 있던 것이 인간뿐인가? 인간보다 수천 배, 수만 배는 되었던 그 수많은 다른 생명체들도 모두 같이 멸망하지 않았나.

“그보다 저건 금방 적응 못할 것 같은데?”

광검제가 턱짓으로 여전히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탄력 좋은 공처럼 사방을 들이받으면 날아다니고 있는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가리켰다.

금방 적응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멀리에서 느껴지는 피체둘라의 기운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기다려주지 못하겠군. 우리끼리 가도록 하지”

광검제가 먼저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서 멸악의 마법사가 따랐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데려갈까 하다가 저런 상태면 데려가지 않는 것이 나을 듯 하여 그들의 뒤를 따랐다.

“가, 같이 갑시...크학!”

뒤에서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래도 천재니까. 금방 적응하고 따라오지 않을까?

가볍게 움직인다고 했지만, 그 속도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빠른 속도를 보여준 사람은 지글러 후작이었다. 물론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에인프라흐 공작이나 국왕이 더 빠르겠지만, 보여준 것만 따지면 그렇다. 그런데 지금 우리 셋이 움직이는 속도는 체감상으로 지글러 후작의 몇 배는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초월자의 영역이고 시야다. 이미 한번 경험이 있지만 그때는 전투하느라 제대로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체험판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적보다 강대한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말했지만, 여긴 훈련소야.”

이동하는 도중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정확히는 좀 전의 광검제처럼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말소리가 바로 귀 옆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고 있었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전음이 이런 것일까? 비슷한 기술을 만든 모양이다.

“우리가 마왕을 상대한 것을 직접 본 사람은 없어. 있을 수가 없었지. 보통 사람은 근처에 다가올 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정확히 마왕이 가진 힘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어. 우리 시절에도 이미 마왕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 용사들이 아니었어도 막을 수 있었던 것 아니야? 이러면서 말이야.”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인간은 본래 그런 동물이니까.

“그래서 만든 체험판 같은 거야. 원래는 초급과정부터 해서 더 많은 것이 있었는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더라고 그러던 와중에 황제가 부탁해서 던전처럼 구조를 바꿨지. 네가 지금부터 경험할 것은 훈련소의 마지막 과정이야. 기회가 한 번뿐인 것은 알지? 잘 보고 잘 배우도록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7성 기사들이나 에인프라흐 공작의 실력을 볼 때도 배운 것이 많았고, 성장했다. 그런데 초월자들의 전투를 본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용사니 뭐니 그런 것보다 내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도록 했다. 아직 부교주도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인데 그 이상을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남쪽 경계쯤이었다. 여기가 무슨 동이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울의 경계를 상징하는 해태상이 도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의 가운데에 마왕이 있었다. 마왕, 혹은 피체둘라라고 불리는 존재. 어쩌면 내가 살았던 지구를 멸망시킨 장본인일 수도 있는 존재다. 나의 최대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교주의 본체라고 해야 할까? 교주는 저 피체둘라의 강림체라고 했으니 그럴 것이다.

처음 본 마왕 피체둘라는 괴물이 아니었다. 역사서에 보면 용사들이 상대했던 마왕은 삼두육비의 괴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드래곤처럼 생긴 삽화를 넣은 경우도 있었다.

물론 다 상상이었다. 용사들이 직접 자신들의 전투를 직접 본 사람은 없다고 말했으니까. 마왕은 그런 모습이겠거니 하고 기록한 문서들이다.

용사들이 마왕의 외모를 제대로 전해주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대로 전해줬어도 그렇게 적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왕 피체둘라는 너무 멀쩡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미남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남도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의 남성이었다.

무슨 재질인지 알 수 없는 검은색의 롱코트를 입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였다. 느껴지는 기운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틀림없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란 것은 특유의 느낌이 있기 마련이다. 라이브러쉬나 제멜아크의 왕세자처럼 타고난 지배자의 느낌이 난다거나 간신처럼 느껴진다거나 하다못해 저건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이런 느낌이 있다.

그런데 마왕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저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저것은 구현된 마왕에 불과하지만, 이 세계가 구현된 것을 보면 그런 것까지 똑같이 재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랜만이군.”

광검제가 먼저 마왕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가? 나에게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네”

태도도 무척 점잖다. 저것이 몇 개의 세상을 멸망시키거나 하려고 했던 한 마왕이 맞긴 한 건가?

“아마 우리의 마지막 만남일 거야.”

“그런가? 그건 아쉽군.”

적이었던 두 절대자의 대화는 오히려 오래된 친구와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다른 친구들은 오지 않는 건가?”

“대신 신입생을 데려왔지.”

“호오”

마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표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웃음에서조차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웃은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네 아들인가?”

“몇백년 사이에 농담 연습이라도 한 건가? 나를 웃기려고 한 것이라면 천년은 더 연습해야겠군.”

“아니, 정말로 그런 느낌이 들어서 물어본 것이네”

“아니다.”

과연 마왕은 예리했다. 겉모습으로 보면 나를 광검제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머리카락 한 올도 없었다.

겉모습만 보자면 광검제는 그냥 잘생긴 아시아인이고 나는 전형적인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에 가깝다. 하지만 마왕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잔소리는 그만두고 한번 붙어보지. 신입생에게 교육을 시켜줘야 하니까 말이야.”

“그럼 화려하게 한번 해봐야겠군.”

마왕이 손에서 검이 솟아났다. 붉은색의 검신을 가진 검이다.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슈바르거트다. 광검제도 따라서 검은색의 검신을 가진 검을 꺼냈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사라졌다.

콰아아앙!

천둥의 수백 배는 될듯한 세상이 무너지는듯한 소리가 상공에서 울려 퍼졌다. 임시지만 초월자의 영역에 올라선 나로서도 둘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소리는 몇백미터나 솟아올라 격돌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 충격파가 땅에 닿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충격파를 고스란히 맞은 고층 빌딩이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길가에 놓여있던 집채만 한 바위가 공깃돌처럼 굴러다닌다.

마치 세상의 멸망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여파에서 벗어나 있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시전한 보호막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시지만 초월자가 되었으니 여차하면 싸움에 끼어볼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어림도 없었다. 보호막을 나가는 즉시 죽는다. 미친 듯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위험한 지가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보이진 않지만, 상공에서 연달아 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엄청난 충격파가 서울을 휩쓸어버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제법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공략대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은 사람의 싸움이 아니다. 그야말로 신의 전투다. 물론 마왕은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광검제는 그래도 근본은 인간이 아닌가?

“굉장하지?”

옆에 서서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웃으며 묻는다. 이곳에서는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하지만 이 여자도 역시 괴물이다.

저런 충격파를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고 있었다. 나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서 있는 곳은 솜털 하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안전했다.

“저게 원래 마왕보다 약한 것이라고요? 얼마나 약하게 조정된 겁니까?”

“절반 정도일까?”

어이가 없었다. 저게 절반의 힘이라고? 그럼 원래 용사들과 마왕의 싸움은 얼마나 엄청났던 것일까? 목격자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잘 안 보이지?”

“전혀 안 보입니다.”

“네가 아직 경지가 낮아서 힘을 더 주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괜찮니?”

“주십시오.”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어차피 위험한 것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눈을 살짝 덮었다. 안구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가 눈알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익숙한 고통이다.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재생력이 망가진 눈을 복구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뭔가 타버린 모양이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손이 떨어지고 망가졌던 눈이 재생되면서 서서히 시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너 그이와 이런 것까지 비슷하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감탄을 뒤로 하고 내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보이기 시작했다. 신에 가까운 어쩌면 신일지도 모르는 두 절대자의 마지막 전투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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