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74화 (174/206)

173. 통로 저편의 붉은 눈

치안관, 행정관, 집사의 물건은 애장품만 모아놨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많았다. 소거법을 적용했다. 아주 오래 사용한 듯한 물건은 뺀다.

그것은 2년 전 사람이 바뀌기 전에 진짜들이 사용했을 물건들이다. 2년 이내에 들인 물건 중에 자주 사용하거나 혹은 항상 가지고 다녔을 법한 물건들이 중요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추리고 추렸는데도 대충 40여개의 물건이 남았다. 하지만 큰 상관은 없다. 사이코 메트리로 기억을 읽어도 내가 원하는 정보가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뿐더러 꼭 오늘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는 것이다. 일단 끌리는 물건 셋을 골라서 기억을 읽었다. 경지가 높아지면서 하려면 한두 개 정도 더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부작용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아쉽게도 세 가지 물건의 기억을 읽으면서 중요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른 수확이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철통같이 영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태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을 대상으로 생각하다 보니 주의하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밤하늘을 날아서 빠져나가는 것이 감각에 걸려 왔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었다. 병사와 기사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나는 이럴 줄 알고 영주성 전체를 감지 범위 내에 두고 있었다.

일부러 남성만 검사한 뒤 나머지에게 반마의 시체를 보여주고 검사를 종료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일 다시 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성 중에 섞여 있는 반마가 도주를 시도할 것이라고 여겼다. 반대로 도주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거나 양동 작전을 위해 왕세자와 영주 가족에게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와 가까운 곳에 모여서 쉴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예상은 아주 정확히 들어맞았다.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보자 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는 변이체 두 마리가 보였다.

“전부 살릴 필요는 없겠지?”

역시나 양동 작전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두 마리의 반마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조각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밑에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며 나는 하늘로 날아올라 도망간 반마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참 먼저 출발했지만 반마는 멀리 가지 못했다. 나처럼 비행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날개의 힘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형 변이체였다.

비행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지간한 새 보다는 빠른 속도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나는 녀석을 멀리서 추격했다.

잘하면 포교자가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반쪽이지만 변이체답게 놈은 고도를 높여 쉬지도 않고 날개를 움직였다. 그렇게 반나절 이상을 날아서 동이 틀 때쯤 도착한 곳은 어느 산 중턱이었다.

이곳의 지명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지방이 모든 지명을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 아주 유용한 물건이 있다.

“아스트로퍼 여기가 어디야?”

나는 몰라도 아스트로퍼라면 알 수 있다.

-리비 자작의 영지에 있는 로모프 산이야.

“중요한 곳인가?”

-아니, 반대야. 딱히 자원이 없어서 버려진 산이야.

“숨어있기 딱 좋은 곳이군.”

잘하면 오늘 포교자를 만날 수도 있겠는데?

“리비 자작도 남부 연합에 속한 귀족이던가?”

-아니야. 남부라고 전부 설탕이나 밀을 기르는 것은 아니야. 리비 자작령은 광석이 주요 수입원이라고 되어있었어.

광물을 주로 다루는 영지이니 오히려 자원이 없는 산은 방치가 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포교자와 마신교가 리비 자작령을 완전히 접수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남부 연합에 속하지 않았으면서 남부 연합을 조종하는 본부를 운영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산 중턱에 착륙하여 날개를 접고 변이를 풀며 원래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반마는 다행히도 내가 기억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자작의 딸이 반마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나름 왕도에서는 인기 절정인 몸인데 나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으니까.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수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어쨌든 자작의 딸은 아니었고 생김새로 보아하니 영주성에서 일하는 하녀 정도로 보였다.

변이를 풀고 인간으로 돌아온 하녀가 찢어진 옷 덕분에 드러난 알몸을 가릴 생각도 없이 폐광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것은 은근히 폐광을 좋아한다.

나도 천천히 고도를 낮춰서 폐광의 입구 앞에 내려섰다. 내가 내려서자마자 폐광 안에서 고음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입구에 몇 명이 숨어서 경비를 서고 있는 것 같더니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아니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인간이니 의심하고 보는데 당연한가?

그 와중에 나를 뒤에 달고 온 여성에게 뭐라고 호통을 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안에서 느껴지는 반마로 추정되는 것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인데?”

이 정도면 최소한 지역 거점 정도는 될 듯 하다. 그리고 변이를 마친 반마들이 폐광 안에서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좋은 선택이었지만, 이제 반마 정도는 몇 마리가 몰려오든, 나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중에는 사제 윌리암 와일러스의 호위 역할을 했던 반마들처럼 제법 강한 반마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슈바르거트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반마들의 비명을 노래로 삼아 반마들이 뿜어내는 검은색의 피를 무대로 만든 공연히 끝났을 때 주위에는 수십마리의 반마들이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잠시 수확의 시간을 가졌다. 몇 가지 능력이 추가되었고 기존의 능력이 강화된 것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큰 도움이 될 능력들이었지만, 이제는 내 전투력 상승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들이다.

앞으로 내가 상대할 상대는 최소한 부교주 혹은 마왕의 힘을 내려받은 교주다. 그들에게 이런 잡다한 능력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막는 사람도 사라졌으니 폐광 탐험을 해볼 시간이었다.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방심은 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포교자의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사제처럼 정신 계통의 능력이 아닐까 싶지만, 같은 정신 교란은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면 내가 접해보지 못한 정신계 능력이니 방심해서는 안된다.

폐광은 생각보다 꽤 깊이가 있었다. 광물이 많은 지역이니 무언가가 있을까 하고 깊이 파서 조사를 했을 것이다. 이래서 광산을 찾는 것이 어렵다.

이렇게 깊게 파고 개발을 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시간과 물질 모두 큰 손해를 보게 된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시간을 대폭 아낄 수 있겠지만, 돈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가니 마법으로 광맥을 찾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몇 개의 조잡한 함정을 피하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간헐적으로 반마들이 튀어나와 나를 막아섰지만, 수십마리가 함께 덤벼들어도 어쩌지 못한 나를 한두마리가 어쩔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가 쫓아왔던 비행형 변이체 여성도 있었다. 날개를 위협적으로 파닥거리며 덤벼들었지만, 날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 광산 통로 안에서는 오히려 날개가 방해되었다.

그래서 편하도록 날개를 잘라주었다. 그래도 뭔가 불편해 보여서 팔과 다리도 잘라주었다. 그러나 죽이진 않았다.

“너는 죽이지 않아. 오래 살게 될 거야. 고마워해도 좋아.”

출혈을 막고 쉽게 재생이 되지 못하도록 친절하게 상처를 묶어주기도 했다. 정말 고마웠는지 기괴한 소리를 질렀지만,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악마다.

아스트로퍼가 나를 비난했지만, 나는 악마를 잡는 사람이다. 지구에서 강력계 형사들이 강력범을 잡다 보면 형사들도 점점 그렇게 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그런데 사실 지구에 변이체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은 악마보다 더한 일을 해왔었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사실 변이체는 인간을 죽이기만 하지 그 이상의 무언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원래 악마보다 나쁜 것이 인간이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잘 포장된 여성 반마를 포장해서 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다.

여성 반마를 실험체로 마탑에 던져주고 여성형 반마도 구분할 수 있는 약을 만들어달라고 할 생각이다. 그녀는 좋은 실험재료가 되어줄 것이다.

그 후로 세 번 정도 반마가 나를 습격했지만, 그 후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폐광의 끝에는 한 남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이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성은 우묵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지?”

“네가 포교자인가?”

인사도 없는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해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한동안 정적 이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녀석이었다.

“나는 포교자님이 아니다.”

“나는 빅터 하네스라고 한다.”

“아아···.”

남성은 뭔가 깨달은 것처럼 탄성을 질렀다.

“나를 아는가?”

“요즘 가장 유명하신 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리고 우리쪽에서는 더욱 유명하지.”

“그럼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겠군.”

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교자도 아니면 너는 뭐지?”

“나는 교에서 장로의 신분을 맡고 있지.”

장로라고 하니 꽤 높은 신분 같기는 한데 포교자가 아니라서 실망이었다.

“장로는 몇 명이나 있지?”

“잘 모르네, 꽤 많겠지”

장로 하나에 대략 50여명의 반마가 붙어있었으니 대체 반마를 얼마나 만들어놓은 거지?

“그래서 이곳에 내가 왜 왔는지는 알겠지?”

“자네는 왜 우리를 적대하는가?”

“악마를 싫어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아니, 단순히 그런 이유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네.”

생각보다 꽤 예리한 질문이다.

“세상 하나를 잃어보면 알게 돼”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성을 보며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잠깐 나는 이렇게 움직이지 못하는 몸일세. 자네들이 말하는 반마도 아니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남성은 하반신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내며 양손을 위로 올려 싸울 의사가 없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천을 걷어낸 남성의 하반신에는 두 다리가 없었다.

“왜 반마가 되지 않았나? 다리 정도는 쉽게 고칠 수 있었을 텐데.”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되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더군.”

“어쨌든 그래서 살려달라는 건가?”

“그렇네. 꽤 좋은 정보를 줄 수 있네.”

장로 정도 되면 아는 것이 꽤 많을지도 모른다.

“좋아. 그럼 포교자는 어디에 있지?”

“모르네”

나는 슈바르거트를 들어 올렸다.

“잠깐! 그것은 교주님도 모를걸세. 어디에서 누구의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네.”

“모습을 바꾼다는 건가?”

“그렇다네”

“포교자의 다른 능력은?”

신체 변형 능력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정보다.

“그건···.”

남성이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남성의 뒤에서 익숙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통로였다. 그렇다는 것은 부교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통로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손톱을 달고 있는 거대한 손이 한번 휘둘러졌고 장로는 손톱의 숫자만큼의 조각이 되어 붉은 피를 흩뿌리며 날아가 벽에 기하학적인 그림을 만들었다.

그리고 손이 사라지며 통로 저편에 거대한 괴수의 머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머리만큼이나 커다란 붉은색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었다. 부교주는 한참이나 그렇게 노려보다 통로를 닫았다.

몇번이나 통로를 통해 저편으로 넘어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그러지 못했다. 위험한 지가 강력히 나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성의 경지에 오르고 이제는 부교주와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모자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나를 죽인다고 했던 부교주도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부교주의 실체를 보았으니까. 그리고 아직 한참 더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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