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엘프의 숲
가장 먼저 나를 떠난 것은 슬라이트였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하기도 했었다. 6성까지는 우리 집에서 수련을 핑계 삼아 머물 수 있었지만, 7성부터는 단순히 수련으로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큰형님이 후계자 수업을 받으라고 한다.”
나는 계속 의심했었지만, 슬레이프 백작은 정말로 슬라이트에게 공작가를 물려주려고 하고 있었다.
“축하한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었네”
“이게 진짜 축하받을 일일까?”
슬라이트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당연히 공작가로 돌아가면 엄청난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른 가문들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피를 튀기며 싸우는데 그거에 비하면 훨씬 낫지.”
“그거야 그렇긴 한데”
“잘 배워서 공작가를 이끌어봐.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라. 전생의 군대에서 들었던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슬라이트는 천재다. 비록 검술 외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거야 경험을 쌓다 보면 해결되는 문제다.
정치니 뭐니 해도 이 세계에서 대접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무력이고 슬라이트는 그것을 얻었다. 슬라이트가 에인프라흐 공작 정도 나이가 된다면 지금 공작의 경지는 가볍게 뛰어넘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에인프라흐 공작가는 지금 성세를 유지할 수 있다.
슬레이프 백작이 행정과 정치 쪽으로 공작가를 지탱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에 맞는 인재를 영입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일이다.
“예전에 말이야.”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슬라이트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다 귀찮고, 부담되면 네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말 기억나냐?”
그런 말을 했었다. 그때는 슬라이트가 이렇게 성장할 줄 몰랐다. 그저 재능은 있는데 인생 막살고 있는 망나니를 계도해볼까 했던 생각으로 뱉은 말이다.
“기억한다.”
“일단 해보마. 대충 할 생각은 없다.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러다 안되면 돌아올 테니 여기에 내 자리 하나만 남겨놔라.”
그런데 슬라이트가 돌아올 일이 있을까? 세상에 절대란 것은 없다고 하지만 슬라이트가 후계자 수업에 지쳐서 우리 집으로 돌아올 확률은 고블린이 던진 짱돌에 드래곤이 맞아 죽을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그래, 네 방은 언제나 그대로 있을 거야.”
슬라이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크게 변하곤 한다. 언제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의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고맙다.”
그리 멀리 이사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슬라이트와 나는 길게 악수를 했다. 그렇게 슬라이트는 우리 집을 떠나 공작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슬라이트가 돌아왔다. 슬라이트는 첫날부터 너무 힘들었다며 불평을 잔뜩 늘어놓으며 저녁밥을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자식을 우리 집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슬라이트가 돌아간 후에 며칠간 조용하던 자칼이 나를 찾아왔다. 자칼 역시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슬라이트는 형과 조카들이 건재했지만, 자칼은 에르하트 후작가의 적자였다. 호랑이 같은 누나가 있다고 해도 이 세계는 아직 여성 차별이 만연한 곳이다.
애초에 자칼의 누나인 비올라의 성격이라면 자칼의 후계를 방해하는 요소를 자기 손으로 모두 분쇄해버릴 것이다.
“빅터 있잖아···.”
“돌아간다고? 그거야 이미 알고 있지.”
“으, 응 그렇게 됐어.”
처음 만났을 때보단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자칼은 자칼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뭐 다른 게 있었나?
“아버지가 너를 후작가에서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셔.”
“어려울 건 없지.”
“그래? 다행이다.”
“내가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응, 바쁘니까.”
“아무리 바빠도 친구 아버지가 부르시는데 한번 갈 정도는 되지”
이 자식도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이들이 나의 인성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듯 하다.
자칼이 은근히 미소를 짓는데 뭔가 소름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저 미소의 의미는 무엇이지?
이미 비올라가 왕도로 내려와 체류하고 있었기에 나는 자칼과 함께 에르하트 후작가의 비행선을 타고 북부로 향했다.
에르하트 후작가의 비행선은 여태까지 내가 타봤던 비행선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왕실과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비행선은 고급 저택의 응접실 같은 느낌이라면 에르하트 후작가의 비행선의 내부는 장식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고 비행선 본연의 기능을 살리는데 주력했다는 느낌이었다.
비행선을 내부만 봐도 가풍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비행선을 하나 주문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터라 좋은 참고가 되었다.
에르하트 후작가의 비행선은 내부를 꾸밀 돈으로 성능을 올린 것인지 다른 비행선보다 조금 더 빨랐다. 대신 비행 중에 조금 흔들리기도 하고 승차감은 조금 떨어졌는데 나는 그냥 빠른 것이 더 좋게 느껴졌다.
그러나 비행선을 산다고 해도 내가 직접 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야 직접 날아다니는 편이 훨씬 편하고 빠르니까. 가장 많이 비행선을 이용할 사람은 아마도 스승님이 아닐까? 스승님의 취향을 한번 여쭤봐야겠다.
그렇게 며칠 비행 끝에 도착한 북부의 에르하트 영지는 내가 자랐던 서부와 이번에 반쯤 뒤집어엎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남부 영지와는 당연하지만,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전생에 보았던 소설 속의 북부 영지는 척박하고 항상 눈이 쌓여있는 그런 곳이지만, 아노더스의 북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남부보다 살짝 서늘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에르하트 영지 바로 위에 있는 곳이 엘프의 숲이다. 거대한 숲이 존재하는 곳인데 기후가 그렇게 가혹할 수가 없다.
다만 사람들의 덩치가 확실히 더 크긴 하다. 산업도 남부처럼 농업 위주가 아니라 목축업이나 임업, 광산업에 치중되어 있어서 느낌이 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내가 자랐던 서부가 가장 가난한 곳이 아닌가 생각도 드는데 통계상으로 보면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동부가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동부라고 해도 주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다.
비행선에서 내리자 던전 안에서 함께 했던 적이 있는 북부 기사단이 정렬하고 있다가 군례를 올리며 환영했다.
나를 향한 것도 있겠지만, 대성해서 돌아온 북부의 후계자를 반기는 것이다. 자칼이 그에 답하듯이 씩씩하게 군례를 올리자 기사단 쪽에서 큰 함성이 쏘아졌다.
“인기 좋은데?”
“아, 아니야.”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는지 이미 자칼의 얼굴은 레이저를 맞았을 때의 내 얼굴보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서 오시게!”
정렬한 기사들의 끝에 거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했다. 북부의 호랑이 올라프 후작이었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새삼스럽게 정말 덩치가 컸다.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손으로 청하는 손을 잡고 악수를 하자 올라프 후작이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 때문일 것이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아도 몇단계 강화된 신체 강화 덕분에 올라프 후작의 근력에 밀리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올라프 후작도 놀랐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타고나는 힘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얼마나 힘이 세면 신체 강화를 몇 단계나 올린 나와 비슷하다는 것인가. 진짜 조상 쪽으로 올라가면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대단하군! 고맙네 우리 아들을 잘 단련시켜 주었어.”
“자칼이 스스로 잘 성장한 것일 뿐 제가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겸손하기도 하군. 하하하!”
가까이에서 듣는 올라프 후작의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는 성량이 어찌나 큰지 오러로 귀를 보호해야 하나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다.
나와 인사를 마친 올라프 후작은 기다리고 있던 자칼을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사정을 모르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곰이 작은 아이를 덮치는 것으로 오해할법한 장면이었다.
“잘했다. 역시 내 아들이다!”
그리고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자칼의 어깨를 팡팡 내려치는데 자칼이 오러를 둘러 어깨를 보호하는 것이 보였다.
자칼은 약간 인상를 찡그렸지만 그래도 즐거워 보였다. 지금이니까 이 정도지 전에는 이것을 어떻게 버텼는지가 의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북부의 후계자를 살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칼이 즐거워하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대성해서 돌아온 북부의 후계자를 맞이한 에르하트 영지에 축제가 선포되었다. 영지 전체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뿌려졌다. 마차를 타고 손을 흔들며 대로를 가로지르는 자칼에게 주민들이 열광했다.
저녁에도 영주성에서 대단한 규모의 연회가 열렸다. 왕도에서 연회를 질릴 정도로 참석하긴 했지만, 북부의 연회는 좀 달랐다.
중앙의 연회처럼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 그냥 전체가 떠들면서 먹고 마시는 잔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영주인 올라프 후작의 성격처럼 좀 화끈하다고 해야 할까.
고기와 술병이 날아다니는 광란의 파티가 지나고 난 후 나는 조용히 올라프 후작에게 부름을 받았다.
“하네스 백작을 부른 이유가 있네.”
둘만의 독대에서 올라프 후작은 작게 속삭였다. 이 사람도 작게 말할 수 있었구나. 그런데 기막을 둘러놨기 때문에 딱히 작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나를 불렀을 리가 없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랬다면 조금 전의 연회에서 감사의 표시로 무슨 보물이라도 하나 건네줬어야 했다.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있다네.”
“사람입니까?”
조금 이상한 질문이기는 했지만, 올라프 후작은 놀란 것처럼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럴 것 같았다. 북부의 호랑이가 나를 불렀다면 북부에만 존재하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군요. 언제 뵐 수 있을까요?”
“오늘 밤이네”
“미리 약속이 되어있던 겁니까?”
“아닐세 자네가 약속 장소로 나가면 그분이 찾아오시겠지. 그게 가능한 분이니까.”
“그렇겠지요.”
“자네는 긴장하지도 않는 것 같군. 경지가 높아져서 그런 것인가?”
“아니요. 많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정말이다. 이 만남은 나라도 긴장이 된다. 만나야 할 존재가 보통 존재가 아니니까.
북부에서 올라프 후작이 극존칭을 붙이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누구일까.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한다면 변이체도 포함이 되겠지만, 올라프 후작이 변이체에게 극존칭을 붙이진 않을 테니까.
“그럼 준비되면 나와 함께 나가세나.”
“전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와 올라프 후작은 몰래 비밀통로를 통해 영주성을 빠져나왔다. 비밀 통로는 엘프의 숲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는 높은 성벽 근처로 이어져 있었다.
몰래 빠져나왔다고는 하지만 올라프 후작의 거대한 덩치가 쉽게 가려지겠는가.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못 본 척 해줬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 감각에서도 그렇게 느껴졌다.
정작 올라프 후작은 자신이 대단히 비밀스럽게 빠져나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행복을 부술 정도로 내가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올라프 후작과 함께 보통 사람은 절대 발을 들일 수 없는 인간과 엘프 사이의 중간지대를 달렸다.
이곳에 발을 들이는 인간은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에르하트 후작가다.
그런 중간지대를 넘어서 장엄하기까지 할 정도로 거대하게 펼쳐진 엘프의 숲 가장자리에 이르자 올라프 후작이 멈추어 섰다.
“이곳입니까?”
“아닐세,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네 자네는 저 안으로 들어가게”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분이 허락한 일이니 괜찮겠지. 축하하네 400년만에 처음으로 엘프의 숲에 발을 들이는 인간이 된 것이네.”
“처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가? 어차피 그들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으니 자네가 처음인 것으로 치지. 그럼 난 가네”
올라프 후작은 거대한 덩치를 돌려 왔을 때처럼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엘프이 숲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