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86화 (186/206)

185. 엘프 여왕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조금 전에 올라프 후작과도 얘기했지만, 공식적으로 엘프의 숲에서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인간은 없다. 그것이 300년 정도 됐다.

내가 살아나온다면 공식적으로는 엘프의 숲에 들어가 살아나온 최초의 인간이 될 것이다. 비공식적으로는 분명 광검제가 이곳에 들락거렸을 테니 최초는 아닐 것이다.

물론 아직 내가 살아나오는 것이 확정된 것이 아니다. 근처에 다가가고 있을 뿐인데 숲 전체에서 적의가 느껴진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다.

마치 숲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생명 같다. 숲 안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느껴진다. 아마 외곽을 경비하는 엘프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멈춰있을 땐 마치 숲과 하나가 된 느낌이다.

천천히 걸어가 마침내 숲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곳에 발을 들였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발에 닿는 풀의 느낌이 다르다. 나에겐 그냥 이름 모를 잡초일 뿐이지만, 이것 역시 숲의 일부다.

엘프의 숲 안에서 엘프는 무적이라고 하던가? 엘프 여왕의 실력에 가려져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과거 마왕의 침공 당시에도 악마들의 침공을 받은 엘프들의 숲은 엘프 여왕 없이도 수천에 달하는 악마들을 막아낸 적이 있다.

지금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숲 전체가 엘프와 같다. 엘프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상대가 어디에 있든지 알아낼 수 있다.

악마가 아니라 라이브러쉬 왕국의 전력이 몰려와도 엘프의 숲을 뚫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근처에서 움직이는 엘프들은 분명히 나에게 강렬한 적의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숲 안쪽으로 들어가는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공격도 없었다. 근처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거리를 두고 따라다니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엘프들은 지금처럼 나무 위에서 뛰어다니니 길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 난감해졌다. 내가 엘프의 숲 안에 들어와서 길을 내겠다고 나무를 베어내는 미친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정말 돌아가지 못하고 나무 거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눈앞을 가로막았던 울창한 수풀과 나뭇가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무들 주변으로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것들이 보였다.

‘정령이구나’

엘프의 뛰어난 능력이라고 하면 역시 정령이다. 인간 정령사는 매우 희귀하지만, 엘프는 거의 모든 엘프가 정령을 다룰 줄 안다고 했다.

풀과 나무들이 움직여 만들어준 길을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들어가야 하지? 엘프의 여왕을 만나러 왔는데 그 정도 큰 기운은 근처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더 들어가자 깔끔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 중앙에는 둥근 탁자와 그것을 둘러싼 의자도 있었다. 그런데 결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탁자와 의자가 땅에서 솟아난 나무뿌리가 자연스럽게 그런 모양으로 자란 것이다. 정령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것이니 인위적이 아니라 정령위적이라고 해야 할까.

탁자와 의자에는 사용감이 있었다. 평소에 이곳을 이용하는 엘프들이 꽤 많았다는 얘기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의자를 골라 앉았다. 이곳까지 안내한 것을 보면 여기서 기다리라는 뜻일 거다.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아름다운 곳이다.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할까.

울창한 숲에 들어간다고 해서 무조건 자연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포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름 모를 새들과 벌레들이 합창하듯이 노래를 부르고 저 멀리서 무언가 동물의 소리도 들린다.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지구의 대척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이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이런 곳에선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엘프의 숲을 그렇게 감상하고 있을 때 정면의 숲에서 오늘의 주인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프 여왕 이시리엘, 과거 마왕을 처치했던 용사 중 한명, 그리고 인간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기에 현재까지 이 세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용사이며 세계 유일의 초월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예법으로 인사를 올렸다. 엘프에게 인간의 예법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엘프의 여왕이지 내가 섬기는 왕은 아니다. 그저 경의를 표하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프의 여왕,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엘프 여왕이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다. 마법과는 다르다. 마치 숲의 그 자리에서 태어난 느낌이었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느냐?”

아무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육성으로 낸 소리 같지 않았다. 숲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소리가 목소리의 형태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실수였다. 이미 기억 속에서 엘프 여왕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인사였다.

“모습을 드러낼 분이 여왕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엘프들은 저렇게 멀리 있을 뿐이니까요.”

일단은 그렇게 둘러댔다.

“거짓말, 너희 인간들은 늘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지만,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부엌에서 튀어나온 바 선생을 보는듯한 눈빛이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나도 인간이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는 엘프의 숲 전통을 지킬 것만 같았다.

딱히 적의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엘프 여왕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세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던전에서 광검제나 멸악의 마법사를 만날 때도 그랬다. 초월자라고 해서 엄청난 기세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약해빠진 나를 배려한 것이었겠지만, 엘프 여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앞에 있었고 분명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당장 뒤돌아서 초감각으로 살핀다고 해도 여왕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위압적이었다.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는 마을이나 도시와 하나가 될 수 있나? 혹은 국가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눈앞의 엘프 여왕은 자신의 나라나 마찬가지인 이 거대한 엘프의 숲과 하나가 되어있었다.

뭔가 작은 깨달음이 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엘프 여왕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궁술을 보여주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나 같은 겨우 9성 기사 정도는 수수깡 부러뜨리듯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그냥 솔직해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죄송합니다. 예전에 여왕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를?”

엘프 여왕의 눈빛이 바뀌었다. 역시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저는 물건에서 기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님이 만든 물건의 기억을 읽다가 여왕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안녕! 오랜만이야!

아스트로퍼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여왕에게 인사를 했다.

“너는···.”

아스트로퍼를 본 엘프 여왕의 얼굴에 처음부터 표정이라는 것이 생겼다. 참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엘프 여왕은 아름다웠다. 지구의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에서 엘프는 매우 아름다운 종족으로 그려지고는 하는데 이것은 그것을 뛰어넘었다.

아직 보통 엘프를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모든 엘프가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완벽한 미인을 한명 꼽으라면 나는 무조건 엘프 여왕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아름답다고 할까? 딱히 아름답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 여왕의 얼굴에 분노, 회한, 후회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갔다.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나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어디까지나 나는 엘프 여왕이 불러서 이 자리에 왔다.

“네가 어떤 인간인지 보고 싶었다.”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엘프 여왕이 살고 있는 곳은 인간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엘프의 숲이다. 그렇다고 다른 엘프들이 인간과 교류하는 것도 아니다. 내 정보가 엘프의 숲 안으로 들어갈 일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건 대체 누가 알려주는 거지? 궁금한데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맞습니다.”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너는 그것을 막을 힘이 있느냐?”

“지금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했다.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는 마왕의 강림체라고 하는 교주를 막아낼 수 없다. 그런데 눈앞의 엘프 여왕이 힘을 보태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혼자는 아니었지만, 이미 과거에 마왕과 싸운 경험이 있는 엘프 여왕이다. 그것을 떠나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솔직히 진짜 초월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광검제가 보여줬던 그 경지는 너무 멀리 있어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그날이 오기 전에 강해져야겠지요.”

사실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하지만, 말해놓고 보니 조금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감정이 하나도 없는 여왕의 시선을 마주하자니 주눅이 들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여왕이 움직였다.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은 새하얀 발로 마치 풀 위를 스쳐 지나가듯 걸어온 여왕이 맡은 편 의자에 앉았다.

“앉거라, 긴 이야기가 될 듯 하구나.”

내가 자리에 앉자 여왕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숲 안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령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 정원사인 뮤어 아이번이 다루는 하급 정령과는 차원이 다른 정령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 정령이 나무로 만들어진 잔을 배달하고 있었다. 정령은 나와 여왕의 앞에 잔을 하나씩 내려놓고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잔이지만, 무슨 나무로 만들어진 것인지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그런데 이것도 나무를 깎고 잘라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있었고 이름 모를 나뭇잎 한장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 엘프들이 마시는 차인 것 같은데 물을 끓여서 우려내는 것이 아닌 찬물로 우리는 차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차를 배달한 정령이었다. 하급 정령도 아닌 그것보다 훨씬 윗급의 정령이 배달하는 것을 보니 전생에 애용했던 배달 서비스가 생각났다.

차를 배달하고 돌아가는 정령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여왕이 입을 열었다.

“너는 정령에도 자질이 있구나?”

“자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보일 뿐입니다.”

“떠나기 전에 정령을 하나 붙여주마. 도움이 될 것이야.”

“감사합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주면 받는다. 나도 이제 전용 배달부가 생기는 건가? 사실 정령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정령과 계약하더라도 나에게 잘 붙어있을지는 모르겠다.

뮤어 아이번도 정령 때문에 지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마시거라. 좋은 것이다.”

여왕이 배달된 차를 권했다. 물에 담궈져 있는 알 수 없는 나뭇잎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먹고 죽는 것을 권하지는 않았을 테니 가볍게 입을 축였다.

“음?”

처음 느껴보는 맛이었다. 미각이 어지간히 둔한 나이지만, 그렇다고 맛없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생과 현생을 합쳐 마셔본 어떤 차나 음료수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맛이었다.

맛은 그렇다고 해도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섭식 강화 능력으로 인해 먹는 것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능이 활성화된 지금 섭식 강화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처음 느껴봤다.

입만 축인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면 사탕을 한포대 정도 먹은 느낌이다. 동시에 마나홀과 오러홀이 동시에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지구의 마나를 처음 느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런 나의 반응을 보며 여왕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몇초 지나지 않는 동안 표정을 수십번 바꾸는 묘기를 보여줬으니 그것이 재밌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입에 맞나 보구나?”

“굉장합니다. 이 차는 무엇입니까?”

“어머니 나무의 잎이다.”

“네?”

뭔가 굉장한 것을 마셔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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