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필요성 (1)
“···말도 안 돼.”
작가이기 이전, 그 누구보다도 이야기를 사랑하는 독자이기도 한 나의 내면에서-
강렬한 팬심이 끓어올랐다.
‘랜든 비숍을 직접 볼 수 있다니.’
회귀 전, 고등학생 때의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때 우연히 집어든 것이 바로 랜든 비숍의 대표작 ‘스타라이트 크로니클’의 첫 권 <새로운 제국의 탄생>이었다.
광활한 외계 행성에서 펼쳐지는 가문 간의, 제국과 교단 간의 대립.
음모와 책략, 계략 따위가 숨 쉴 틈 없이 펼쳐지는 가운데에도-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짙은 애수와 경이의 감정에 사로잡혔지.’
나는 그렇게 SF라는 장르에 입문하게 되었다.
판타지가 나의 본진이라면 SF는 두 번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이후 대학에서도,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이 새로운 장르를 향한 사랑은 계속되었다.
특히 랜든 비숍 같은 경우, 전집을 몇 번씩 재독하는 것은 물론 그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잡지라면 뭐 하나 빠짐없이 모아뒀으니까.
‘직장생활을 자그마한 SF 출판사에서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고.’
다양한 종류의 출판사에서 일하긴 했지만.
SF나 판타지, 호러 등 장르 전문 출판사에서 일할 때가 개인적으론 가장 즐거웠다.
다만 내가 편집자로 일할 때 비숍은 이미 노령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고.
아쉽게도 그의 원고를 담당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비숍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니!’
상금보다도 이 특전이 훨씬 더 큰 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포스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저거, 이번에 난리인 것 같더라.”
마침 내 뒤를 지나가던 조셉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가게에서 SF 동호회 모임 하는 거 알지? 거기 사람들이 다 저기 도전하겠다고 난리야 아주.”
“···비숍 때문에요?”
“흐흐, 역시 SF 매니아답게 잘 아는구나.”
나는 조셉 아저씨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매니아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요.”
“니가 매니아가 아니면 대체 누가 매니아인데? 그리고 너, 여기 올 때마다 코믹스보단 SF 코너 쪽에 늘 있었잖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따지자면 레이 브래드버리보단 톨킨 쪽이 더 취향이지만요.”
“아 그건 나도 그래. ···빌보의 생일파티에서 다 같이 노래하는 부분에서 하차할 뻔했지만.”
“푸흐.”
“꾹 참고 봐서 다행이었지. 어쨌거나 저거.”
그의 손가락이 벽면의 포스터를 가리켰다.
“주제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잖냐. 한창 인기 있는 주제.”
“···그러네요.”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조셉 아저씨가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유진, 이건 그냥 내 느낌이지만.”
“네?”
“뭐랄까, 네가 오랫동안 고민하던 게 해결된 것 같은 얼굴이구나.”
“···.”
조셉 아저씨의 그 말에 한순간 아무 대꾸도 못했다.
“아닌가?”
“아뇨, 맞아요.”
고민이 해결된 정도가 아니라, 염원이 이루어졌으니까.
그리고 이젠 그저-
‘목표를 향해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내 표정을 본 조셉 아저씨의 얼굴에도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네드 올 때까지 신간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라.”
그렇게 말을 마친 조셉이 다시 고객 응대를 하러 간 사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라.’
···내게도 절대 낯설지는 않은 장르이긴 하지.
그리고 동시에 한참 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거의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감자-
[소설]
[비소설]
[장르별 분류]
···
어둠 속에 잔상처럼 떠오르는 글자들.
그 가운데, [신작 소재] 폴더가 눈에 띄었다.
‘이제는 어쩌면.’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이야기를 바깥으로 꺼내볼 시점인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린다.
“저, 지금 바로 가볼게요!”
“네드는, 안 기다리고?”
네드에겐 따로 연락하겠다.
그 말을 던지고는 곧바로 가게를 나섰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
다음 날 오후, 아이오와 주립 대학.
무덥던 날씨가 제법 쾌청해진 가운데.
“미스터 레너드!”
힐크레스트의 문학교사 레너드 하인스는 옛 제자를 보러 대학 캠퍼스를 방문한 참이었다.
“오랜만이야, 셜리.”
“하하 그러게요. 선생님도 잘 지내셨어요?”
레너드가 이곳 주립대학에서 강사로 지낼 적 가르친 제자 중 한 명.
셜리는 아이오와 대학 출판부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교내 카페테리아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회사는 좀 어때.”
“뭐 여전히 정신없죠. 사람은 적은데 원고가 넘쳐나다 보니···.”
대학 출판부라고 하면 흔히 재미도 인기도 없는 책을 내는 곳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 아이오와 대학 출판부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였다.
‘문학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어느 곳보다도 문예 창작에 특화된 대학이다 보니-
“졸업 논문에 온갖 교지는 물론이고 서클 회지, 개인지까지 편집 의뢰가 쏟아지는데···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대충 낼 수가 없는 책들이란 거.”
그 말대로, 웬만한 상업출판용 원고를 뺨치는 수준이란 걸 레너드 또한 잘 알았으니까.
“그러게. 거기에··· 좀 있으면 셰익스피어 축제, 맞지? 엄청 바쁘겠네.”
“으으 맞아요. 안 그래도 그것 땜에 다들 미치려고 하거든요.”
이곳 아이오와 대학은 매년 하반기에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한 연극, 낭독회, 음악회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며.
이곳 대학 출판부는 매년 ‘셰익스피어 패러디’ 학생 앤솔로지(특정한 주제를 지닌 작품집)를 출간한다.
“그, 앤솔로지에 싣기로 돼 있던 단편 하나가 펑크났거든요.”
이제 와 대체원고를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
“학생들 실력은 좋긴 한데,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피상적인 원고가 대부분이라···.”
한참이나 고충을 늘어놓던 셜리의 눈이 레너드가 들고 온 바인더 속 원고로 향했다.
“근데 선생님, 그 원고는 뭐예요? 로렌스 수사의··· 고백? 설마, 셰익스피어 패러디물이에요?”
“아 이거.”
그것은 교정교열이 완료돼 교지에 실릴 준비를 마친 유진의 원고였는데.
레너드는 설명하는 대신 이렇게만 말했다.
“한 번 읽어보겠나?”
“그럼요, 줘보세요.”
그에게서 바인더 파일을 건네받은 셜리가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 전부였지만.
“···!”
이내 두 눈이 커지더니.
언젠가부터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원고에만 집중했다.
사라락 하며 종이 넘기는 소리.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공기를 채웠다.
레너드 하인스는 그런 제자의 모습을 묘한 만족감 속에서 지켜보았고-
그대로 5분이 흐른 후에야 셜리는 입을 열었다.
“이거, 대체 누가 쓴 거예요? 저희 앤솔로지에 실어도···아니, 아니지, 그러려면 학생 작품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학생 작품이야.”
“맙소사, 정말요?”
잔뜩 흥분한 셜리의 반응에 레너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내 학생 중 하나가 과제로 가져왔지.”
“과제? 말도 안 돼요. 이건 아무리 봐도 과제 제출용 수준이 아닌데.”
“그렇지?”
“그럼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셜리.
딱 봐도 오랫동안 철저한 준비와 구상, 고뇌 끝에 힘겹게 탈고한 작품이라는 것.
“여기, 여기 보세요. 문장이 뭐 하나 의미 없이 쓰인 게 없단 말예요. 전반적인 완성도도 그렇지만, 마지막 페이지 읽는데··· 진짜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니까요?”
신이 나 리뷰하던 그녀의 표정이 돌연 진지해졌다.
“근데 왜 이런 글을 이제서야, 그것도 수업 과제용으로 제출한 걸까요.”
어느새 두 사람은 이 <로렌스 수사의 고백>이 그냥 과제가 아닌, 오랫동안 준비한 작품이라는 전제로 대화하는 중.
“그거야···.”
레너드가 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두려웠던 거겠지.”
“···.”
작가들의 가장 큰 두려움.
···그것은 자식이나 다름 없는 자신의 글이 거부당하는 것이다.
‘세상에 하루 빨리 내 보이고 싶은 마음과.’
그 열정과 정성이 순식간에 부정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사이에서 매순간 갈팡질팡하는 것.
그 같은 양가감정을 레너드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요, 하긴. 작가라면 누구나 그런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죠.”
빠르게 납득한 셜리가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근데 이거 대체 누가 쓴 거예요? 아니, 이런 학생을 대체 어디서 만나신 거예요, 저희 학교 워크샵 출신인가? 아니지, 그럼 제가 먼저 이 원고를 봤을 텐데.”
레너드가 싱긋 웃었다.
“학생은 맞는데, 여기 학생은 아냐.”
“어, 그럼 타 대학? 타 대학 학생이 어떻게 여기까지··· 아, 혹시 컬리지 소속인가? 거긴 연령대가 좀 높은 학생도 많으니-”
“나이는 어려.”
“잠깐만, 어리다뇨?”
레너드의 미소가 더 짓궂어졌다.
“10학년 학생이거든.”
“10··· 학년? 어, 잠깐만요 그러면···.”
셜리의 사고가 한순간 멈춘 듯 보였다.
“그러니까, 그 10학년이라는 게··· 제가 아는 그거, 그러니까.”
마른침을 꼴깍 삼킨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등학생이란 말이에요?!”
*
시간이 훌쩍 지나가 어느새 주말.
지난 며칠을 정신없이 보냈다.
그때 네드네 코믹북스토어에서 봤던, <사이언스앤드판타지> SF 공모전 때문이었다.
“···마감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벌써 꽤 많이 썼네.”
식사하는 시간만 빼면 내내 컴퓨터 앞에 붙어 있었던 덕분일까.
절반 이상 쓴 원고 파일이 내 시야에 담겼다.
원체 쓰는 속도가 빠른 편이긴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멸망 이후의 세계.’
이번 공모전의 주제가 내게 익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직후-
병원 침대에 누운 채 매일 같이 세상의 멸망을 꿈꿨기 때문.
“···.”
···그때를 떠올리니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기분이다.
당시의 난 울분과 분노, 절망으로 가득했다.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 혼자 이런 비극을 겪는 것일까.
‘그러니 기왕, 내게 종말이 찾아왔다면.’
나뿐 아니라 세상 모두가 종말과 마주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머릿속으로 매일같이 세상이 멸망하는 이야기를 상상했다.
···한심한 심보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에.
어떤 때는 핵전쟁이 발발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3차 대전이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미지의 전염병이 돌아 인구 대부분이 죽는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한정된 물자를 두고 서로 다투는 생존자들.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위선과 추악함.
이야기는 상당히 어둡고 참혹하게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결국엔.’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희망처럼.
인간의 선한 본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나곤 했다.
그리하여 깨달았다.
···애초 나는 본성 자체가 뭔가를 오래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고.
“그 후에는, 울분도 조금씩 줄어들었고.”
암울한 시기에 구상했던 아포칼립스 이야기들.
그것들이 그 시절 나의 목표가 되어줬던 덕분에-
‘내가 절망에서 일어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오래전부터 느낀 거지만, 글이란 결국 작가 자신의 욕망을 반영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열망하는 것이야말로 작품 속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전에 생각해둔 소재와 이야기들을 두고 한참 고민했는데.
무엇 하나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그때와 지금의 내가 너무도 달라서일까.
그래서 결국은 그때 써놓았던 걸 그대로 살리는 대신-
‘기존의 소재들을 조금 변형해볼까.’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이지만 현실에 절망하지는 않는 주인공이 등장하되.
조금은 판타지적인, 혹은 동화적 분위기가 섞여도 괜찮을 것 같다.
그간 기록해둔 수많은 아이디어 중.
괜찮은 것만 취사 선택해 조합해가며 한참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피터 팬!’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그런 그를 아포칼립스물에 집어넣는다면? 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그렇게 출발한 것이 바로···.
[<멸망한 세계의 피터팬(Peter Pan in Doomed Land)>]
눈앞에 있는 이 원고였다.
[A.D. 2080.
성인만이 죽음에 이르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창궐한 지 6개월 뒤.]
노트북 화면 속,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피터는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