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성(1)
“에곤(Egon) K, 오 나쁘지 않은데?”
깔끔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네드.
어감도 나쁘지 않고, 독일어권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이기도 하고 말이다.
“약간 뭐랄까··· 매드사이언티스트 수퍼히어로 느낌? 인체실험을 좋아할 것 같은-”
“그만.”
그렇게 필명을 정한 뒤.
곧바로 공모전 게시판의 접수 버튼을 눌렀다.
[Egon K. | 사이언스앤드판타지 공모전 - 원고 송부합니다]
···달칵.
클릭 한 번으로 공모전 원고를 전송했다.
후우. 또 하나의 작품을 내보냈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탈력감이 밀려들던 그때.
“야, 그건 그렇고.”
네드가 돌연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았다.
“앰버랑은 어떻게 됐냐.”
“어떻게 되다니.”
“아아니 니 번호 따갔잖아, 왓츠앱 아이디랬나? 그러고 뭐 연락이 왔을 거 아냐.”
···아, 며칠 전의 일 말인가.
‘진짜로 앰버가 와서 좀 당황하긴 했지.’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하자고 할 줄은 몰랐으니까 말이다.
그 후로 어떻게 됐냐며 네드와 아델이 나를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모른다.
“별거 아녔어.”
“뭔데 뭔데.”
“그냥, 수업에서 다같이 토론할 책이 필요한데···.”
나는 잠시, 그녀와 메신저로 나눴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앰버_브라운 : 그래서 말인데, 주말에 서점 같이 안 갈래?]
[앰버_브라운 : 유진 니가 책 좀 골라주라]
[유진_권 : 주말?]
[앰버_브라운 : ㅇㅇ 11시, 체스트넛 서점 앞. OK?]
···뭐랄까.
내가 당연히 오케이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주말에 같이 가서 책 좀 골라달라더라고.”
“끄아, 데이트 신청이잖아.”
“데이트 아니고 책 골라달라는 거였다니까. 그리고.”
네드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못 간다고 했어.”
“···뭐?”
나라 잃은 사람처럼 황망한 눈빛이 되어버린 네드.
[유진_권: 미안, 주말은 어려워]
[앰버_브라운: 곧 보아··· 응? 안 된다고?]
공모전 원고야 끝냈다지만,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작업이 남아 있지 않은가.
[유진_권 : 글 쓸 시간이 주말밖에 없거든]
[앰버_브라운: 아]
[앰버_브라운: 와 그렇구나]
앰버는 -거절당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유진_권: 모처럼 먼저 권해줬는데 아쉽네]
[유진_권: 나중에 여유 생기면 같이 서점 가자]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자.
[앰버_브라운: :-D 좋아 좋아! 소설 다 쓰면 나도 보여줘!]
생기발랄한 답장이 날아왔다.
···그렇게, 앰버와의 메신저 대화는 잘 마무리했지만.
‘왜 니가 이런 반응인데.’
돌처럼 굳어버린 절친을 보며 혀를 찼다.
“주말에 글 써야 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감 일정이 촉박하기도 하고, 개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라서-”
“앰버의 데이트 신청을··· 그것도 서점에 가자고 하는 걸 찼다고?”
“데이트 아니라니까.”
하지만.
네드는 내 말이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장난해? 주말에 같이 서점 가잔 게 데이트가 아니라고? 여자 쪽에서, 앰버가 니 번호를 따갔는데?”
“···.”
진심으로 울분에 가득 찬 태도라고 할까.
“부럽고 멍청한 새끼···.”
“지금 나한테 욕했냐?”
“너는 욕 좀 처먹어도 돼.”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놈이 워낙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데다가···.
‘저건 뭐야.’
방금 전, 네드가 쓰고 있던 내 노트북 인터넷창의 검색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와 문자하는 법 예시 100개(How to text a girl : 100 examples)]
[여자를 웃게 하는 재밌는 문자 120선(120 funny text messages for her to send and make her laugh)]
[왓츠앱에서 여자들한테 좋은 인상 주는 법 4가지(4 ways to impress a girl on WhatsApp)]
···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달 있으면, 어? 홈커밍 파티 아니냐고. 다들 벌써부터 파트너 구하려고 안달인데···.”
아, 홈커밍. 그런 게 있었지.
“앰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앰버 브라운인데···.”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에.
‘좀 짠해지네.’
그러고 보니 네드 이 자식.
서른다섯 살에도 혼자였구나···.
*
정신을 차려보니 또다시 주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주도 바쁘게 보내긴 했네.’
공모전 원고를 보낸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일을 끝내자마자 다음 할 일에 착수했다.
그러니까-
‘<로렌스 수사의 고백> 원고의 개작 작업.’
6페이지 분량의 초단편을 단편으로 늘려서 쓰는 것.
담당편집자 셜리 맥그로우의 말대로,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핵심은 분량을 ‘어떻게’ 늘리느냐인데.
이미 꽉 닫힌 결말을 지닌 <로렌스 수사의 고백>을 좀 더 디테일하게, 자세히 보여주는 식으로 개작하는 것이 제일 일반적이겠지만···.
‘그러기엔 뭔가 조금 아쉽단 말이지.’
이 부분은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다.
···그리고 지금은 오랜만에 네드네 가족이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온 참이었다.
“흐흐, 자네가 직접 재운 불고기라니 기대가 되는군!”
“조셉, 와줘서 고마워.”
“고맙긴 무슨 말을, 그래, 요즘 좀 어때? 지난번에 소개한다던 그 한국인 작가 작품 말이야···.”
네드가 우리 부모님께 얘기하는 것이 들려왔다.
“맞다, 유진한테 들으셨죠? 다음 주에 오픈하우스라고.”
“그래, 안 그래도 그때 맞춰 가려고 했지.”
“후후 간만에 학교에 가보겠는걸.”
오픈하우스.
학부모가 공식 초청되어 학교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행사를 말한다.
학생들도 이 시기에 맞춰 다양한 퍼포먼스를 준비하는데···.
‘교지 편집부에선 <스쿨씬> 특별판을 전시한다고 했지.’
즉, 내 소설 <로렌스 수사의 고백> 또한 학교 벽에 게시된다는 의미였다.
‘아버지가 그걸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려나.’
문득, 오래전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불쑥 떠올랐다.
‘이걸 남한테 보여주려고 쓴 거냐 지금?’
‘아무나 소설가가 되는 게 아니야, 권유진.’
재능이 없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던···.
그 날카로운 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켠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선 내심 이런 생각이 슬그머니 든다.
아버지가 내 글을 읽고 인정해줬으면 좋겠다는···.
“야, 유진.”
그때.
내 옆자리에 앉은 네드가 나를 슬쩍 찌르며 물었다.
“너, 그거 얘기드렸어? 아, 혹시 아직 비밀인가?”
“음, 뭐.”
‘그거’란 교지편집부 전시회를 말하는 것.
일부러 숨긴 건 아니지만.
놀라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 내 속내를 눈치챘는지 네드가 흐흐 웃었다.
“알겠어, 입 꾹 닫으마. ···그건 그렇고, 공모전은? 결과 나오려면 아직 멀었나?”
소리를 낮춰 묻는 녀석의 질문에, 나 역시 작게 대답했다.
“2주 정도 남았지.”
예선 심사에 1주, 최종심에 1주 정도 소요될 거라는 말에-
“으으으, 아 왜 내가 다 긴장되냐.”
벌써부터 호들갑을 떠는 네드.
“너무 기대하진 마라.”
“뭐? 왜, 내가 보기엔 백 퍼-”
“공모전 결과는 그 누구도 보장 못하는 법이라.”
물론 나는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 재미있는 글이자 잘 쓴 글이라는 확신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동원해서 써낸 글이기도 하지만-
‘최선의 노력이 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애초 글이란 게 그렇다.
정말 재미있고 잘 쓴 것이라 해도 시기를, 출판사를 잘못 만나 영영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일도 수두룩하며.
‘공모전 심사는··· 더 변수가 많고.’
대중성, 그러니까 독자들에게서 얼마나 인기를 끌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심사위원의 성향과 안목으로 결과가 결정되는 셈이니 말이다.
‘뭐, 그래도 내가 아는 <사이언스앤드판타지>라면 대중성도 상당히 고려하겠지만.’
처음부터 너무 큰 기대나 욕심을 가져선 안 된다.
그것이 편집자 생활을 오래 해온 나의 지론이었다.
“한 번 해본 거니까 되면 좋은 거고, 아님 마는 거지.”
“물론 그거야 그렇지만··· 야, 안 되면 내가 더 열받을 거 같은 거 알아?”
설령 내가 미련을 버려도 자기가 버리지 못할 것 같다는 네드의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니가 왜.”
“야, 내가 니 글을 안 읽었음 모르겠는데 읽어봤잖냐. 그게 1등이 아니면 심사의 공정성에 의문을 갖게 될지도.”
“흐흐, 오버하기는.”
내 말에 크으, 소리를 내는 네드.
“내가 말했지? 앞으로 내 안의 피터는 피터 파커가 아니라 피터 팬딧이라고.”
네드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참 어마어마한 영광이네.”
그날 저녁.
우리 두 가족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버지가 케이트와 함께 직접 양념에 재웠다는 불고기가 무척 맛있었다.
*
주말이 여유롭게 지나간 뒤 수요일, 오픈하우스 행사날이 되었다.
상준과 케이트 부부는 아침부터 클로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힐크레스트 고등학교로 향하는 길.
“학교에서 유진을 볼 생각 하니 기대된다 여보.”
며칠 전부터 들떠 있던 케이트와는 달리 상준은 조금 우려가 되었다.
자녀의 학교생활을 직접 보고 오는 게 오픈하우스 행사의 첫 번째 목적이겠지만.
밴드부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 등, 특기를 지닌 아이들이 다양한 재능을 펼쳐 보이는 와중.
‘유진이는··· 올해도 딱히 하는 게 없을 텐데.’
부모 입장에서 아이가 학교에서 존재감도, 열정도 없이 지내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그리 기쁜 일만은 아니니 말이다.
잠시 후, 인파로 가득한 교정 안.
“여보 우리 저쪽으로 가볼까? 교지편집부 전시회래.”
상준은 케이트와 함께 클럽룸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벽에는 커다랗게 확대 인쇄된 교지의 페이지들이 액자 안에 쭉 전시돼 있었다.
‘교지라, 그리운 느낌인걸.’
자신 또한 고등학생 때 문예부에서 교지를 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복도 벽에 다가가 섰다.
학생들이 쓴 기사 몇 꼭지를 지나쳐···.
“어머 이거 봐, 학생이 쓴 소설인가 봐.”
[특별판 특집코너| 초단편소설
<로렌스 수사의 고백>]
“제목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케 하는걸.”
“한 번 읽어보자 여보!”
부부는 복도 벽면을 따라 움직이며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에스칼루스 대공 각하께,
저는 베로나 교구를 담당하는 수사 로렌스입니다.
바야흐로 지난주, 우리 선량한 베로나의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준 사건에 관하여···.]
처음의 한두 문장을 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상준은 이 소설에 단박에 빠져들었다.
‘놀라운 흡입력이야.’
서간체의 특징을 십분 활용한 덕분에.
로렌스 수사가 독자의 눈앞에서 그간의 일을 낱낱이 고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허나 그 두 분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미래를 약속한 연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두 가문의 명예와 미래를 위하여 만들어진 음모로 희생된 두 개의 장기말이었을 뿐···]
이어지는 내용들에 상준의 눈이 커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니!’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
‘잠깐만, 이 소설이 여기 전시돼 있다는 건··· 힐크레스트 학생 중 누군가가 쓴 글이라는 건가?’
고등학생이 쓴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가운데.
상준과 케이트는 그저 홀린 듯 글에 빠져들었다.
“Brilliant(정말 근사해)!”
원래도 셰익스피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케이트는 몇 번이나 감탄성을 냈다.
상준 또한 숨도 쉬지 못한 채 읽어내려가다가-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는걸?’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에 눈을 크게 뜬 순간.
“혹시, 유진 군 아버님 되십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숱많은 턱수염의 인상 좋은 중년 남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영문학 담당교사 레너드 하인스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유진의 아버지 권상준이라 합니다.”
레너드 하인스는 벽에 전시된 소설을 뿌듯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유진 녀석이 굉장하지요.”
“···?”
“이 <로렌스 수사의 고백>, 저도 처음 읽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제 아들의 이름과, 이 소설의 제목인 ‘로렌스 수사의 고백’.
이 둘이 대체 무슨 상관인지 권상준이 고민하는 중에도 레너드의 말은 이어졌다.
“언제 한 번 상담했을 때 작가가 꿈이라고 유진이 지나가듯 언급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나 글에 진심일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아, 어··· 그랬군요.”
레너드가 상준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제가 아직 유진에게는 말을 못 꺼내봤는데, 마침 여기 부모님이 계시니 말씀드려보자면.”
그가 상준과 케이트에게 대학 입시 관련 팸플릿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별 장학제도가 있거든요.”
“어···.”
“아이오와대가 문예창작으로는 전국 2위, 브라운대 다음인 거 아시죠? 그렇다 보니 유진처럼 문학적 재능을 지닌 학생들을 위한 제도가 다양하게 마련돼 있는데-”
“저기 잠시만요 선생님.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우리 유진이랑 그게 무슨 상관인.”
“네?”
잠시, 두 중년 남자는 한 차례 눈을 껌벅거렸고.
레너드 하인스는 뒤늦게서야 벽 구석에 적힌, 그러니까 이 페이지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저자명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 이거 보시죠.”
[-유진 권(힐크레스트 고등학교 10학년)]
“···!”
유진 권.
제 아들의 풀네임을 본 상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