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2)
*
제법 여유 있는 일주일을 보내고 나자 어느덧 <셰익스피어 앤솔로지>의 출간까지 1주 남은 시점.
이제는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할 타이밍이었다.
[차기작? 뭘 쓰지-]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끼적거리고 있자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작가님께 <피터 팬>의 후속편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S&F(사이언스앤드판타지) 편집부의 제안대로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속편을 집필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다.
‘제일 안정적인 선택이긴 하지.’
쓰기만 하면 원고료도 받고 잡지에도 실릴 테니.
벌써부터 픽스업 소설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최소 3편 이상은 시리즈로 진행하고 싶다는 거고.
‘장편 단행본 출간도 거의 확정이라는 건데.’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톡, 톡톡.
나는 볼펜 끝으로 책상을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바로 속편을 쓰는 건, 좀 아니란 말이지.”
SF씬은 그 어느 장르보다도 독자들 간의 교류가 활발하다.
그 말인 즉, 인터넷의 여러 SF팬 포럼에 이번 공모전 수상작에 대한 리뷰가 올라올 거라는 얘기.
‘속편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는 독자 반응을 보고 판단하는 게 나아.’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기도 하다.
“이제는, 장편으로 승부를 봐야 할 시점이기도 하고.”
신인이 ‘제대로 된 작가’ 취급을 받는 가장 빠른 길.
그것은 -단편이나 그 외 자잘한 작품들을 여러 개 펴내는 것보다- 한 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하는 것이다.
‘그것도, 굵직한 작품 하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자 나도 모르게 손이 볼펜을 움직였다.
[차기작 - 신작 장편소설.]
무엇을 쓸지는 좀 고민해봐야겠지만···.
깔끔한 결론에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던 그때.
지잉-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네드에게서 메일이 왔다.
[Ned_Miller : 생일선물 받아라]
생일 선물? 웬 생일 선물.
곧바로 메일을 열어보자, 아무 내용 없는 본문에-
[첨부파일 : egon_K_the_madscientist.jpg]
그림파일 하나가 첨부돼 있었다.
그것을 클릭해 연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
그것은 슈퍼히어로 코믹스에 나올 법한, ‘에곤 K’의 캐릭터 프로필 그림이었다.
혈색 없는 보라색 피부에, 폭탄 맞은 듯한 머리.
높은 콧대에 쑥 들어간 안와, 광기로 빛나는 눈동자···.
네드 특유의 거칠고 개성 가득한 화풍으로 그려진 에곤 K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미친 놈.”
큭큭 웃으며 네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내 생일 두 달 전이었던 거 알지?”
그 말에 낄낄거리는 네드.
-어때, 맘에 드냐?
“겁나 잘 그렸네.”
-크으, 역시. 이 네드 화백의 에곤 K, 죽여주지 않냐?
“어, 니가 그린 것 중 최고인 듯?”
-아 잠깐, 그 정도야?
“근데 이건 왜 갑자기.”
-왜긴 왜야, 니 프로필로 쓰라는 거지.
네드 놈의 요지는 이랬다.
-다른 수상자들은 다 자기 사진이 실릴 건데, 너만 아무것도 없는 빈칸으로 나오면 좀 많이 그렇지 않겠냐?
···이 자식한테 이런 세심한 면이 있었나.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가운데, 네드의 신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새빠지게 그렸으니까 잘 써먹어보라고.
“어, 고맙다.”
뚝, 통화가 끊긴 뒤.
나는 스마트폰 화면 속 ‘에곤 K’ 캐릭터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괜찮네.’
네드가 언젠가 말했던 대로-
괴실험 끝에 미쳐버린, 그리하여 세상을 저버린 채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과학자가 거기에 있었다.
*
문예창작 클럽의 정식활동이 잡혀 있는 수요일 오후.
‘<6인의 고백>이라, 엄청 궁금하단 말이지.’
학생들이 오기까지 아직 10분 정도 남은 상황.
클럽 지도교사 레너드 하인스는 뒷짐을 진 채 클럽룸 안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셜리 그 녀석, 원고를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이면 자랑이나 하지 말던가.’
셜리 맥그로우.
그의 제자이자 대학 출판부 편집자로 일하는 그녀의 말에 따르면-
‘진짜로 미쳤다니까요 선생님? 아 이거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어떻게 보여드릴 수도 없고···.’
그 <로렌스 수사의 고백>을 대체 어떻게 개작했길래 그렇게 야단법석인 걸까.
유진이 오면 좀 보여달라고 해볼까, 그런 생각까지 하던 그때.
“안녕하세요 미스터 레너드.”
“안녕하세요!”
문이 열리며 클럽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오늘 첫 참여네요, 반갑습니다.”
유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레너드 하인스는 평소처럼 가볍게
‘유의어대기 게임’을 진행시켰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지정된 단어의 유의어를 제일 많이 댄 사람이 이기는 거야.”
말하자면 학생들의 어휘력 증진을 위한 워밍업 활동이라고 할까.
“그럼 샬롯부터 시작할까?”
열 명이 채 안 되는 인원 사이에서 시작된 유의어대기 게임.
평소라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게임이 끝나기 마련이었지만-
“잠깐만, 지금 몇 분째야?”
···오늘은 상황이 좀 달랐다.
“30분.”
“지금··· 혼자서 계속 하고 있는 거 맞지?”
“와, 미쳤다.”
“어떻게 저렇게 해?”
눈에 경악의 빛을 띤 채 웅성거리는 클럽원들.
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Explain, portray, narrate, represent, tell, define, express···.”
주어진 단어는 ‘describe’.
기껏해야 서너 개씩 유의어를 내놨던 다른 학생들과 달리-
“Delineate, interpret, specify, trace, show···.”
무슨 기계처럼 끝없이 유의어를 뱉어내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만큼이나 어안이 벙벙해하던 레너드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만, 유진.”
“네?”
“음, 그 정도면 이제 충분할 것 같구나.”
그 말에 유진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잘난척 비슷하게 돼버렸다고 생각하며.
앞으론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는 한편, 예전 기억이 슬쩍 떠올랐다.
‘병실에서 늘 했으니까 말이지.’
환자의 삶.
심지어 움직일 수도, 누군가와 대화할 수도 없는 환자의 삶은 무료함 그 자체다.
외로움보다도 더 지독한 무료함이 자신을 덮칠 때마다, 유진은 머릿속으로 이 유의어게임을 했다.
‘Depict, outline, lay out, draft···.’
describe의 유의어를 아직도 한참은 더 댈 수 있을 정도였다.
때로는 반의어도 떠올려보고.
때로는 속담이나 격언, 그마저도 다 떨어질 때쯤엔 단어의 어원을 떠올려보곤 했다.
그래.
···평소 혼자서 하던 걸 다른 사람과 같이 한다는 생각에 너무 신이 났나 보다.
유진이 담담하게 그런 결론을 내린 것과는 달리-
‘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미친 재능··· 완전 부럽다.’
‘나도 뭐 하나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데.’
질투와 선망, 경쟁심···.
이 자리에 함께한 클럽원들은 저마다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진의 글이 교지에 실린 후로 내내 그의 존재를 주시해왔기도 하고 말이다.
미스터 레너드 또한 학생들의 그런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 누구나 복잡한 감상에 빠질 수밖에 없지.’
그럼에도 유진에게 클럽 가입을 권유한 것은.
유진에게나 다른 학생들에게나, 함께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압도적, 혹은 천재적 재능이라는 것은 분명 실재하지만.’
그런 것을 마주하고 나서도.
절망하지 않고 ‘나만의 글’을 차근차근 써나갈 수 있는 것 또한 다른 형태의 재능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래 가는’ 재능이라고 할까.
레너드는 자신의 학생들 또한 그렇게 오래 갈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가 되길 바랐다.
“자, 오늘은 그럼 이쯤 할까.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편하게 남아서 집필하도록.”
절반 정도가 나간 후.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유진 곁으로 학생 서너 명이 다가왔다.
[샬롯_데인즈 : 유진! 같이 클럽활동하게 돼서 넘 좋다! (≧◡≦)]
샬롯을 돌아보며 미소 지어 보이자.
그녀 옆에 서 있던 남학생 두 명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 유진, 난 로완이야.”
미식축구 선수 같은 체구와는 대조되는, 미성의 목소리를 지닌 로완.
“난 제이든. 반갑다.”
도수 높은 안경, 통통한 체격의 제이든.
···로완, 제이든, 샬롯.
이 셋이 힐크레스트에서 문예창작 쪽으로 제일 유명한 학생들이라고 했던가.
언젠가 에이든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기, 유진.”
“응?”
“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로완이 살짝 긴장한 어투로 물었다.
“그··· 넌 보통 어떤 식으로 집필해?”
“아, 나도 궁금했는데.”
그들의 대화를 곁에서 지켜보던 레너드도 슬쩍 다가왔다.
그 또한 유진의 집필 방식이 궁금했던 것.
“음, 딱히 특별한 건 없는데?”
“아니 아니, 샬롯이 그러는데 너 엄청 빨리 쓴다며.”
“그래, 손이 눈에 안 보일 정도라고.”
“···그 정도는 아닌데.”
유진은 입안으로 혀를 찼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작가라면 누구나 다른 작가의 집필 방식을 궁금해하는 법.
“음, 나는 초고를 대충 쓰는 편이라서.”
“그래?”
“어. 일단 손에서 나오는 대로 한 챕터를 쭉 쓰고, 그다음에 수정하는 식?”
“오! 그래서 속도가 빠른 거구나.”
유진의 설명을 듣던 레너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초고는 쓰레기라던 헤밍웨이의 말이 또 한 번 생각나는군.’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지 않았는가.
유진은 아마도 저렇게 써낸 초고를 가지고 수없이 퇴고를 반복하는 식으로···.
“아 그럼 혹시, 유진 너만 괜찮다면, 초고도··· 살짝만 보여줄 수 있어?”
“로완, 그건 좀 아니지.”
로완을 만류하려는 제이든에게 유진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 난 괜찮아. 잠시만.”
그리고는 자신이 오늘 아침까지 쓰던 원고를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유진, 나도 봐도 되겠니?”
“그럼요.”
로완, 제이든, 샬롯. 거기에 교사 레너드까지.
총 네 명이 유진의 노트북 주변을 둘러싸고 섰고.
“···.”
잠시, 적막이 흘렀다.
“잠깐만, 이게.”
“유진, 이거··· 초고 파일 맞아?”
“어, 왜?”
유진은 그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고라기엔 너무··· 완벽한데?’
레너드 하인스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고.
순간, 수많은 문학지망생들을 키워온 베테랑 교사인 그의 머릿속에 벼락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쓰레기 같은 초고를 수없이 퇴고하여 정갈하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냥 초고가 원래부터 이런 상태였던 것!’
샬롯은 작은 소리로 “그럴 줄 알았지”라며 후우 한숨을 내쉬었고.
“···.”
로완과 제이든은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가운데.
“유진, 그러면···.”
레너드 하인스가 저도 모르게 -목이 졸린 듯한 소리로- 물었다.
“혹시 <로렌스 수사의 고백>도··· 그냥, 초고 상태로··· 제출한 거냐?”
“음.”
유진은 단어를 골라가며 대답했다.
“초고는 아니고, 당연히 퇴고를 했죠.”
“아.”
멍하니 그런 소리를 내던 교사 레너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면 그거, 정말로··· 과제용으로 써낸 소설이겠구나?”
“네?”
과제를··· 내주었으니까 과제용 소설을 써낸 거겠지?
대체 무슨 의도로 던지는 질문일까,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음, 선생님이 내주셨던 과제 아니었나요?”
“어 그거야 그렇지, 내가 내줬지. 근데 그러면··· 일주일 만에 썼다는 거잖아.”
“어, 뭐, 네.”
“어떻게 일주일 만에 그런 소설을···.”
레너드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가운데, 유진은 생각했다.
‘음. 사실은 전날에 쓴 거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
그로부터 1주일 뒤, 어느덧 9월이 다 지나간 가운데.
아이오와 주립대학 캠퍼스에서 셰익스피어 축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