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14화 (14/126)

고등학생? (1)

*

<사이언스앤드판타지> 편집부에선 상당히 깔끔한 답장을 보내왔다.

[식에 참여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작가님. 얼굴과 신상 비공개, 이메일 연락도 잘 알겠습니다. 1등 상금은 약 1개월 내에 알려주신 계좌로 지급될 예정이며···]

계약은 전자계약서로 진행되며, 나의 소설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은 다음 달 <사이언스앤드판타지>에 게재된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수상특전인 ‘랜든 비숍 작가님과의 만남’은 올 하반기 내에 진행될 수 있도록···]

랜든 비숍과 나의 일정을 잘 조율하여 진행해보겠다는 것.

‘···생각만 해도 기대되는걸.’

비숍 작가의 책들을 전부 들고 가서 사인해달라 할까.

그런 즐거운 망상을 펼치는 한편-

“다 썼다.”

<로렌스 수사의 고백>의 개작 작업을 마쳤다.

개작된 후의 제목은 <6인의 고백>.

로렌스 수사, 패리스 백작, 로미오의 시종, 줄리엣의 하녀, 존 수사, 마지막으로 에스칼루스 대공까지.

···총 6인이 각자의 관점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건을 ‘고백하는’ 이야기다.

‘샬롯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지.’

조금 실험적인 시도이긴 했지만, 다 쓰고 보니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푹 몰입한 채로 써서 그런지 일주일 만에 집필을 마칠 수 있었으니.

‘일단은 공동작업실의 효율이 좋았고.’

미스터 레너드의 권유로 가본 문예창작 클럽룸.

장소가 바뀌어서인지 평소보다 집필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게다가-

‘와··· 엄청··· 좋은데? 아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의견인데.’

메신저로만 말하던 샬롯이 갑자기 두 눈을 반짝거리더니.

‘여기 이 하녀의 고백 부분에서 플롯을 살짝 꼬아보는 건 어때? 앞서 로렌스 수사가 말했던 것과 상충되는 내용을 넣어서 독자의 혼란을···.’

메신저도 안 쓰고 육성으로 마구 마구 의견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좀 놀라긴 했지만.”

샬롯이 준 조언들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어릴 적부터 천재 문학소녀로 동네에서 유명했다고.

‘근데 회귀 전의 난 왜 몰랐을까.’

생각해보니 네드랑 아델 외엔 친구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뭐, 어쨌든.

그런 저런 요소들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집필을 마쳐서-

[Eugene Kwon |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개작 관련 메일 보냅니다]

담당자에게 완성본 원고를 보냈다.

“후우···.”

이제야 좀 쉴 수 있겠네.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쉰 순간.

띠링- 하며 새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떴다.

[S&F편집부 | 에곤 K 작가님께 추가로 문의드립니다.]

추가 문의라니 뭘까.

방금 전 메일로 왔던 내용 말고도 또 얘기할 게 있나 싶어 곧바로 메일을 확인하자.

[에곤 K 작가님 안녕하세요, 담당자 마크입니다.

그··· 벌써부터 이런 말을 드리는 게 민망하긴 한데.

혹시 차기작 계획이 있으실까요?]

차기작, 차기작이라고?

[당분간 특별한 계획이 없으시다면, 저는 <피터 팬>의 후속편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S&F 담당자 마크는 민망하다면서 할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인 듯했다.

[<피터 팬>의 세계관이 워낙 매력적이면서도 확장 가능성이 높아, 단편 한 작품으로 끝내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같은 세계관의 중편소설 세 작품을 집필해 이를 한 권의 장편으로 엮어내는 것도 한 번 생각을···.]

이른바 ‘픽스업’ 소설의 출간 가능성까지 제안하는 것이 아닌가.

뭐 작가로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반가운 말이긴 하지만.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벌써부터 차기작 논의는 좀 아니지 않나?

*

바로 그 시각, 아이오와 주립대학 캠퍼스에 자리한 대학 출판부.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은 아늑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어떠세요, 말씀하신 대로 표지 시안을 세 가지 정도 만들어봤는데···.”

회의실에서는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회의가 한창이었다.

“흠.”

<로미오와 줄리엣>을 컨셉으로 삼은, 흡사 고전명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

디자이너의 시안들을 살펴보던 셜리 맥그로우가 그중 하나를 골랐다.

“이게 제일 괜찮은데요? 색감도 그렇고 전반적인 배치 구도가.”

“그렇죠? 저도 이게 제일 대중적일 것 같아서···.”

회의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앉자.

그녀의 생각은 자연스레 유진 권 작가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사실, 처음에 통화했을 때만 해도 여전히 긴가민가했지.’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에, 오히려 뭘 몰라서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그러나 얼마 후.

그와 메일을 몇 번 주고받으며 깨달아버렸다.

‘완전··· 베테랑이잖아?’

유진은 소설을 개작할 때 초보작가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을 전부 다 꿰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부분은 담당자님께서 한 번 더 체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미리 자신에게 일러두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게 있었다면-

[···보내주신 계약서 본문 잘 살펴봤습니다. 다른 부분에는 문제가 없는데···]

계약서 문구를 하나하나 검토해보더니, 학생 대상의 앤솔로지에는 걸맞지 않은 조항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본론만 말하자면, 2조4항의 1년 독점권 문구는 빼주셨으면 합니다.]

앤솔로지 출간 계약의 경우.

상업출판에서는 독점권을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대학 출판부에서 내는 앤솔로지, 특히 학생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은 독점기간을 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여라도 향후 자신이 개인 작품집을 출간할 때를 대비해, 미리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는 것.

‘그때는 진짜 깜짝 놀랐지.’

습관처럼, 별 생각 없이 기본 계약서를 보냈다가-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저처럼 뭘 모르는 고등학생을 상대로 출간 계약을 진행하실 때는 전문용어를 비롯, 업계의 일반적인 상식을 같이 설명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호된 훈계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뭘 모르는 고등학생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이지만.’

대체 이 유진 권이라는 작가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미 통화도 해봤는데도 상대가 고등학생이라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으, 커피라도 마셔야겠어.”

한시가 급한 마당에 딴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카페인으로 뇌를 깨워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휴게실의 에스프레소 머신 쪽으로 걸어가던 그때.

[Eugene Kwon |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개작 관련 메일 보냅니다]

띠링-

스마트폰 알림음과 함께 유진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추가로 논의할 거라도 있는 걸까?’

셜리가 곧바로 메일을 열어본 순간.

[완성본 첨부합니다. 여유 있게 살펴보시고 편할 때 답신해주세요.

첨부파일: 6인의 고백.docx]

“어라? 잠깐만···.”

이거 설마, 완성본인가?

완성본이 왜 벌써, 라고 생각하기도 전.

그녀의 손가락이 먼저 첨부파일을 열어보았고-

‘···.’

익숙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로렌스 수사의 파트를 넘어가자.

‘이건 패리스 백작의 시점!’

패리스 백작, 로미오의 시종, 줄리엣의 하녀, 존 수사.

마지막으로-

“에스칼루스 대공의··· 파트까지.”

총 6명에 달하는 조연들.

그들 각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한 편의 단편소설이 펼쳐져 있었다.

[<6인의 고백>]

셜리는 맨 앞으로 다시 돌아갔다.

로렌스 수사의 파트를 빠르게 읽고 난 뒤 패리스 백작의 파트를 읽기 시작했고···.

“셜리? 셜리, 뭐 해.”

“···.”

휴게실에서 커피를 홀짝 대던 그녀의 동료가 말을 걸었지만.

셜리는 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깐만, 지금 원고 보는 중이야? 폰으로?”

동료가 혀를 찼다.

제대로 프린트해서 보든가, 하다 못해 모니터 화면으로 보지 왜 사무실 한복판에 서서 스마트폰으로 읽고 있단 말인가.

‘꼭 뭔가에 홀린 사람 같네.’

그러나 저러나.

셜리 맥그로우의 원고 읽기는 계속되었다.

한참 더 있다가, 그러니까 동료가 큰 컵에 가득 찬 커피를 전부 다 마셨을 때쯤에야-

“···말도 안 돼.”

그녀의 입이 열렸다.

“왜 그래 셜리?”

“그냥 미쳤어.”

“미치다니.”

“원고가 미쳤다고! 푸흐흐, 진짜로 미쳤어!”

내가 보기엔 니가 미친 것 같은데···.

“안 되겠어, 지금 당장 작가님한테 연락해봐야겠어!”

편집자라기보단 극성팬 같은 기세로 스마트폰을 드는 그녀의 모습에, 동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

<6인의 고백> 원고를 보낸 지 30여 분 만에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담당자님, 잘 지내셨어요? 메일을 엄청 빨리 확인하셨네요.”

벌써 다 읽은 걸까.

참 부지런한 스타일이구나 생각하던 그때.

-와, 악, 왁, 원고가···.

스마트폰 저편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어··· 왜 그러세요? 원고에 무슨 문제라도-”

-미쳤어요!

나의 우려 섞인 목소리는 이내 튀어나온 그녀의 감탄사에 묻혀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아니 그러니까, 아 왜 이렇게 횡설수설하게 되지···.

우리 담당자님이 좀 많이··· 흥분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꼬박 10여분간.

나의 담당편집자는 <6인의 고백>에 대한 감상··· 아니 찬사를 늘어놓았다.

“어··· 너무 좋게만 말씀해주시는 거 아니고요?”

-무슨 말이세요! 진짜라니까요? 솔직히 저, 은근 걱정했거든요···.

<로렌스 수사의 고백>이 지닌 초단편으로서의 매력.

그것이 단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릴까 봐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훨씬 좋아요! 여러 층위의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해줬다고 할까요?

명쾌하면서도 예리한 분석이었다.

<6명의 고백>.

이 작품은 같은 사건을 여러 명의 시점으로 보여주고.

맨 마지막에야 완전한 진상이 드러나는 식의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으니까.

‘흔히 편집자는 제1의 독자라고도 하지.’

최초의 독자가 초고를 어떻게 읽어주느냐가 작가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법.

나 또한 제1 독자의 평가에, 마음이 놓이는 동시에 기분이 좋아졌다.

“좋게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보내놓고 조마조마했거든요.”

-정말요? 작가님이 조마조마하는 모습이라니 상상이 안 되는걸요.

“나름 실험적인 시도이다 보니 확신이 안 섰거든요. 근데 뭐랄까, 이렇게 조연들 시점에서 사건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담담하게 말하는 와중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진실과 사실이 어떻게 다른 건지 또 한 번 고민하게 되었달까요.”

그러자, 한 박자 후에야 담당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그 얘기 너무 좋은데요? 나중에 저자 소개글에 넣는 거 어떨까요?

“아, 담당자님. 안 그래도 얘기드리려고 했는데.”

내 이름 권유진.

그 외에는 아무런 소개글도 넣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히자, 담당자 셜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으어어어 왜요··· 너무··· 아쉬운데···.

그래도 그녀는 내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으며.

-이번 주 안에 교정을 마쳐서 보내면, 아마 2주 뒤에는 최종 제작본이 나올 거예요.

셰익스피어 축제가 시작되는 9월 첫 주.

나는 그때 아이오와 주립대학 출판부를 방문하기로 했다.

-아 맞다, 아까 얘기드리는 걸 깜박했는데.

통화를 마치기 전, 담당자 셜리가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다섯 명의 조연들 캐릭터가 너무 생생해서 좋았어요!

“괜찮았나요?”

-괜찮다마다요!

각 캐릭터의 복합적인 심리를 드러내는 방식 자체가 굉장히 현대적이면서도.

-캐릭터 자체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느낌이랄까요? 연구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캐릭터 해석이라고 봐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래서인가.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다.

“아, 그거 다행이네요. 제가 이래 봬도 셰익스피어 작품을 열심히 연구했거든요. 논문도 꽤 많이 읽었고.”

뭐니 뭐니 해도 셰익스피어야말로 영문학의 꽃이지 않느냐- 라고 덧붙이자.

-셰익스피어··· 연구요? 논문까지 읽으면서?

아차.

-저, 작가님. 고등학생··· 맞는 거죠? 그, 진짜로··· 10학년?

의구심이 잔뜩 묻어나는 담당자의 목소리.

“아, 네. 10학년, 맞는데···.”

어쩐지 내가 말해놓고도 좀 민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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