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클레그(1)
*
그날 저녁, 우리는 칠면조 요리를 비롯해 다양한 명절요리를 대접받았다.
부른 배로 잠들고 일어난 다음 날.
“유진, 좀 이따 보자!”
“다녀오마.”
클로이가 낮잠 자는 사이,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두 분만의 시간을 보내러 잠시 나가신 터.
···원래라면 이런 틈을 타 부지런히 집필을 하겠지만.
“자꾸 진행이 막힌단 말이지.”
그러니까,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속편 말이다.
커뮤니티 반응을 보며 보완할 만한 부분도 체크했고, 플롯을 어떻게 진행할지도 이미 다 생각해놨다.
‘말하자면 오디세우스 이야기처럼.’
고향을 떠나 각종 고난을 겪지만 성공적으로 귀환하는 전통적인 영웅의 모험담 형태로.
그런데 어째서···.
‘전혀 안 써지는 걸까.’
피터가 그웬돌린과 재회하는 장면.
그 부분에서 손이 뭔가에 묶이기라도 한 듯 써지지가 않는 상황이다.
이럴 땐 보통 머릿속의 구상에 문제가 있다는 뜻인데,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으니.
“···이럴 땐 잠시 쉬는 게 최고지.”
그런 생각으로 1층 서재로 향했다.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고서점을 운영하셨다는 부모님답게, 서재는 오래된 것부터 새것까지 다양한 책들로 가득했다.
“근사한걸.”
회귀 전엔 딱 한 번 이 집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땐 여기서 지내는 게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 서재에는 아예 들어가볼 생각도 못 했다.
‘근데 지금은 괜찮단 말이지.’
케이트가 어머니에게 내가 변했단 얘기를 전한 걸까.
내가 먼저 살갑게 굴려 한 것도 있지만, 브리짓의 태도 또한 전과는 사뭇 달랐으니 말이다.
“···.”
그러나 저러나, 나는 저자명에 따라 가지런히 꽂힌 책들을 쭉 살펴보았다.
그중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앉아서 읽으려던 그때.
“···유진, 책은 거실에서 보거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등을 돌리자.
하얗게 샌 금발을 짧게 친 노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긴 불을 때지 않아서 춥거든.”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녀와 함께 훈기가 도는 거실로 나왔다.
벽난로 안에서 빨간 불꽃이 날름거리는 가운데.
“<하우스메이드의 증언>, 예전에 북클럽에서 읽었던 책인데 나쁘지 않더구나.”
내 책을 힐긋 보고 그녀가 던진 말에 고개를 들었다.
“북클럽 하세요?”
“꽤 오래됐지.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데···.”
미국은 북클럽, 즉 독서 모임이 아주 활발하다.
브리짓 할머니 또한 그런 북클럽 회원으로, 정해진 책을 읽고 주기적으로 만나서 토론을 한다는 것.
그러다 아주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려던 순간.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유진.”
“···.”
“실은 케이트가 네 얘길 종종 했어.”
브리짓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최근 들어 정말로 많이 달라졌다고. ···엄마도 보면 알 거라고 말이지.”
그 말에 긴장한 걸까.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나 때문에 새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잘 아는 만큼, 내가 곱게 보일 리 없을 테니.
그러나 브리짓 할머니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유진, 난 네가 대견하구나. 어른이라도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에게 다가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새어머니가 대체 뭐라고 얘기하신 걸까.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늘 케이트가 먼저 다가와줬죠. 전 지금껏 그 손을 뿌리치기만 했지만···. 이젠 그냥, 그 손을 잡았을 뿐인걸요.”
타닥, 타닥.
벽난로의 불씨 튀는 소리가 고요한 거실 안을 기분 좋게 채우는 가운데.
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아 그리고, 이것도 봤지.”
“···!”
그것은 다름 아닌 <6인의 고백>이 실린 셰익스피어 앤솔로지.
“케이트가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후후.”
“자랑, 음.”
“부끄러워할 것 없어, 정말로 재밌게 읽었으니까. ···충격적일 정도로 말이지.”
브리짓 할머니 또한 애서가라고 들었다.
애초 새어머니가 서점을 운영하게 된 것도 부모님의 영향이라고.
그래서인가, 그 평가가 더욱 뜻깊게 느껴지는 가운데.
“다음에 또 새 작품을 쓰면 꼭 보여주려무나. 아, 그러고 보니.”
브리짓 할머니가 신이 난 얼굴로 ‘지난달에 북클럽에서 재미있게 읽은 소설’ 얘기를 꺼냈다.
“제목이 아마···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이었을 거야.”
“···네?”
어안이 벙벙해진 내게 그녀는 <피터 팬>이 얼마나 근사한 소설인지를 한참 늘어놓았고.
“다음 편이 언제 나올지 모르겠구나. 테레사 말로는 2편이 없을 수도 있다는데, 아니, 애들이랑 그렇게 헤어져놓고 2편이 안 나오면 안 되지···”
웬디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피터가 다시 돌아가는 장면을 꼭 보고 싶다는 말에-
“어떻게요?”
대뜸 묻고 말았다.
···사실, 그 장면이야말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으니까.
“음?”
“저도 그거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피터가 웬디를 배신한 셈이잖아요.”
동료들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대신,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줄 거짓을 택한 주인공.
···그런 피터가 어떻게 동료들의 품으로 돌아가느냐는 것.
“웬디랑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졌는데 다시 괜찮아지기가-”
“글쎄, 그게 틀어졌다고 표현할 정도인가? 사실, 난 그 장면을 보며 떠오른 게 있단다.”
···그것은 바로, 나의 새어머니 케이트가 우리 아버지와 결혼할 당시의 일.
지금이야 잘 지내지만, 결혼한 지 1년 정도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 왕래하지 않고 지냈던 걸로 안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어. ···물론, 딸애가 걱정되는 마음이 아예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럼에도.
케이트가 자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허락해달라 했다면-
“나는 네 결정을 믿고,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겠다고. 언제든 내 도움을 청하라고 했을 거야.”
하지만 새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툭 터놓고 얘기하는 대신, 일단 아버지와 혼인 신고를 해버린 뒤에-
“그때 가서 네 아버지가 전처와 사별했고, 다 큰 아이까지 있다는 걸 털어놓았지.”
“···.”
아, 이건 케이트가 잘못했는걸.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노인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드리웠다.
“그 사실 자체도 놀라웠지만··· 난 내가 딸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상처를 받았던 것 같아.”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래, 나중에 케이트도 그렇게 말했지.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너무 화나서-”
후욱, 숨을 들이마신 노인이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너를 빌미로 삼아 더 화를 냈는지도 모르겠구나. ···미안하다, 유진.”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습니다, 피차일반인데요.”
그 말에 풋, 웃음을 터뜨리는 브리짓 할머니.
“여하튼, 피터가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난 웬디를 보니, 그때 일이 떠올랐어. 그래서일까.”
피터와 웬디가 화해하는 장면을 작중에서 보면 좋을 것 같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웬돌린은, 피터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어.’
동시에-
지금껏 내가 어떤 부분에서 막혀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될지도 알게 되었으니.
‘이젠, 다음 내용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심장이 기대감으로 부드럽게 요동쳤다.
*
우리는 브리짓 할머니 댁에서 이틀을 더 보냈다.
할머니와 내가 책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케이트는 놀라면서도 몹시 기뻐했고.
“할머니이이~ 샤랑해요, 뽀뽀!”
“잘 가라, 우리 귀염둥이들.”
“귀염둥이들?”
“왜, 유진도 귀염둥이가 맞지.”
브리짓 할머니의 말에 새어머니는 클로이와 나를 번갈아보다가 풋 웃음을 터뜨렸고.
“그건 아니죠, 브리짓···.”
그녀와 친근하게 대화하는 내 모습에, 아버지는 놀라면서도 대견스러워하는 듯했다.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부우웅—
30분쯤 지나자 늘 그렇듯 클로이가 곤히 잠든 가운데.
‘휴가철에도 고생이 많으시네.’
나는 폰을 열어 S&F 담당자 마크가 어제 저녁에 보내왔던 메시지들을 다시 살펴봤다.
[작가님 이거 이거!!! 미쳤습니다!!!
대체 무슨 일로 또 이렇게 흥분하나 싶었더니.
[뉴욕타임스! 뉴욕타임스 메인에 리뷰가 떴어요!!!!!]
뉴욕타임스, 일명 NYT.
미국 최대의 일간지 NYT는 문화예술계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다.
유명 순문학 작품, 혹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외에는 잘 다루지 않는 그 깐깐한 곳에서-
‘에곤 K, 이제 겨우 첫 장편 데뷔소설을 낸 신인의 리뷰를 실었다?’
이건 진짜로 흥분할 만한 소식.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그그그그리고!!!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
그중 YA 하드커버 부문에 올랐다는 소식에는, 나도 육성으로 감탄성을 내뱉었으니까.
‘미친.’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와 케이트의 입에서도 그 소식이 나왔다.
“유진, 어제자 NYT에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리뷰 난 거 봤니?”
“그럼요, 엄청 좋게 써줬던데요.”
“실제로 좋으니까 그렇게 쓴 거지.”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드물게 솔직한 말.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케이트의 말이 이어졌다.
“거기에 베스트셀러 리스트까지! 이건 진짜 엄청난 거야, 유진.”
그녀의 말을 듣자 마크의 메시지 내용이 떠오른다.
[작가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페이퍼백 버전도 곧 출간된다고 얘기드렸죠?]
[페이퍼백 버전엔 ‘NYT 베스트셀러’라는 마크를 붙일 예정입니다!!!]
NYT 리스트만 보고도 책을 구매하는 독자 수가 상당하기 때문에, 이런 마크를 붙이는 것.
그러니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가 이 리스트에 -비록 20위로 간신히- 입성한 것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영광인 셈이다.
“요즘 매일 매일 새로 올라오는 기사들 보느라 신이 난다니까. 여보, 당신도 그렇지 않아?”
“하하, 그렇지.”
두 분이 즐겁게 얘기하는 가운데.
나는 NYT 리뷰의 마지막 구절을 눈에 담았다.
[(전략)···모든 독자가 내면의 괴물을 만나게끔 안내하는, 대담하고도 충격적인 소설. 지금까지 이 책에 바쳐진 찬사는 거짓이 아니다. - <뉴욕타임스>]
*
1월 첫 주, 겨울방학이 끝났다.
한동안 한적해졌던 동네도 다시금 활기를 되찾은 가운데.
‘날이 추워도 운동을 게을리해선 안 되지.’
나는 두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새벽 조깅에 나섰다.
코 끝에 와닿는 바람이 차가웠지만 몸의 열기 덕분에 그리 춥지는 않던 그때.
“···유쥐이인!”
누군가 목청이 터져라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순간.
곰처럼 거대한 체구의 험상궂은 사내가 서 있었다.
‘···뭐야.’
순간 움찔했지만, 고개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은 무서워도 눈빛이 맑았다.
음, 맑은 눈빛이라니까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유진, 당신이 맞았군요! 제가 얼마나 학생을 만나고 싶어했는지-”
“실례지만 누구신지.”
경계하며 물러서자, 남자는 자신의 트레이닝복 차림을 뒤늦게 눈으로 훑었고.
“아, 이거 죄송합니다. 초면에 제 소개도 드리지 않았군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라이터스홈
케빈 클레그|출판에이전트]
···케빈 클레그라면, 전에 메일을 보낸 에이전트 중 한 명이 아닌가.
“일전에 제가 보낸 메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6인의 고백>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계약 제안을 드렸는데···.”
그거야 아는데, 왜 이렇게 이름이랑 얼굴이 익숙한 느낌일까.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민하던 그때.
‘···!’
오래전의 기억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케빈C 에이전시 설립자| 케빈 클레그]
[뉴욕 출신인 케빈 클레그는 미국의 명문 에이전시 라이터스홈에서 경력을 시작한 후, 10년 가까이 에이전트로 일하다 케빈 C 에이전시를 설립했다···]
향후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며 승승장구하는 전무후무한 문학 에이전트.
···케빈 C가 바로 이 케빈 클레그였음을 이제야 기억해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