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32화 (32/126)

케빈 클레그(2)

*

케빈은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눈앞의 고등학생을 마주 보았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다!’

라이터스홈의 말단 에이전트.

그가 유진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이 일대를 꾸준히 돌아다녔던가.

유진을 찾기 위해 카페도, 볼링장도, 햄버거집도 가봤는데 전부 소용이 없었다.

물론, 그러는 와중 에곤 K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S&F 편집부_마크 : 물론 전달했죠! 근데 아직은 딱히 답이 없으시네요.]

지금은 그저 간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케빈이 속한 라이터스홈뿐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에이전시들이 대기 중이지 않을까.

현재 케빈은 -주립대학에 출강 중인 그를 위해- 회사에서 빌려준 조그만 아파트에서 지내는 중인데.

‘오늘은 그냥, 운동이나 하려고 무작정 나온 건데.’

밖으로 나와 거리를 천천히 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

저 앞.

훤칠하게 생긴 아시아인 고등학생을 발견하고는 대뜸 이름부터 불러버렸다.

‘네?’

···자연스레 멈춰서 뒤를 돌아보는 소년은 영상 속의 유진이 맞았으니.

여하튼.

짤막한 회상을 마친 케빈은 명함을 살피는 유진에게 말했다.

“제가 작가님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했는지 상상도 못 하실걸요, 하하.”

그러자 유진은 잠시 탐색하는 눈빛으로 케빈을 쳐다보았고.

이내 명함 뒷면을 짚어보이며 물었다.

“미스터 케빈, 여기 적힌 건 당신이 담당 중인 작가 리스트인가요?”

“네. 총 열 명 정도-”

“이 중 본인이 직접 발굴한 케이스는?”

“어, 70퍼센트 정도···이려나요?”

케빈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이긴 하지만.’

고등학생은커녕 업계에 빠삭한 전문가를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가장 최근에 계약한 신인 작가의 이름을 슬쩍 대자, 유진의 한쪽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실력은 여전하시네요.”

“여전···하다고요?”

나를 언제 봤다고? 아니 그보다-

“계약!”

“네?”

“저희랑 계약하시죠 유진 작가님. 저희 라이터스홈은 서맨사 윈터, 마커스 그랜트, 노아 하퍼 같은 유명 작가들이 소속된···.”

케빈 클레그가 자사의 홍보 멘트를 쭉 늘어놓고 나자, 유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미스터 케빈, 지금 ‘당장은’ 계약할 의사가 없습니다.”

당장은··· 이라면 나중엔 기회가 있다는 뜻일까?

케빈이 희망을 놓지 않던 그때, 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에이전시 계약이 필요해지면 그땐 다른 사람이 아닌 미스터 케빈에게 제일 먼저 연락드릴 겁니다.”

···유진이 아닌, ‘에곤 K’로서 말이지.

그 같은 권유진의 속내를 까맣게 모른 채 케빈이 눈을 크게 떴고.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약속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저는 이만.”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유진이 뒤돌아서려는 순간.

잔뜩 흥분한 케빈이 그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계약 이야기랑은 상관없이, 커피나 차라도 마시면서 잠깐 얘기라도···.”

“아쉽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네? 아, 혹시 오전부터 급한 일정이-”

“학교 가야죠.”

푸흐, 웃으며 덧붙인 유진은 인사를 하고는 반대방향으로 멀어져갔다.

‘나는, 바보인가.’

···너무 어른스러운 태도에, 상대가 고등학생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케빈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채로 유진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

동네 거리에서 에이전트 케빈을 마주친 건 재미난 우연이었다.

‘그 케빈 클레그가 케빈 C 에이전시 대표였다니.’

이름만 보고선 몰랐는데, 얼굴과 덩치를 보니 뒤늦게 떠오른 덕분이었다.

케빈 C 에이전시.

뛰어난 작품 선구안과 사업 수완으로 계약 작가에게 최상의 결과를 제공할 뿐더러-

‘작가의 장기적인 성장을 지원하는 방침으로 유명했지.’

사실, 출판 에이전시 중에는 상도덕 없는 곳이 꽤 많다.

한창 떠오르는 작가를 굴릴 데까지 굴려서 단물만 뽑아먹는 경우도 부지기수이고.

한철 장사하는 마인드로 작가를 대하는 곳들이 상당한 가운데.

‘···여기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절필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내가 담당했던 저자이자, 케빈C 소속이었던 작가가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제가 데뷔는 화려하게 했지만, 최근 몇 년간 영 성적이 저조했잖아요. 그래서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저한테 손을 내밀어준 게 여기 케빈 C뿐이었거든요.’

괴로워하던 자신을 곁에서 끝없이 다독여주고, 제 힘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것.

···그런 곳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최상의 에이전시가 아닐까.

‘그것도 그렇지만, OSMU 사업 수완도 훌륭했지.’

이곳 작가들 대부분은 엄청난 딜을 통해 대형출판사와 계약한 것은 물론.

꽤 많은 작품들이 영화, 드라마, 게임, 뮤지컬 등 다양한 2차 저작물로 만들어졌다.

그 덕분인지, 케빈 C 에이전시는 창사 10년 만에 뉴욕에서 손꼽히는 명문 에이전시로 거듭난다.

아까 명함 뒷면에 적힌 담당 작가에 관해 질문한 것도 그 때문.

그들 중 절반 이상이 향후 10년 내에 유명작가가 되는 이들인데-

“대부분이 본인이 계약한 작가라고 했지.”

그 말인 즉, ‘지금’ 케빈 클레그의 능력 또한 믿어볼만 하다는 것이다.

···이제 곧 에곤 K에게도 에이전트가 필요해질 테니까.

‘해외 판권은 물론이고 영화화 같은 2차 판권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에이전트 없이는 사실상 감당하기가 쉽지 않지.’

제안을 해온 제작사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곳 담당자들과 수차례 연락을 주고받고, 필요하다면 미팅도 해보고, 그중 어떤 선택이 내 작품에 최선일지 고민하고···.

이런 걸 작가 본인이 하기엔 에너지 소모가 크다 보니, 작가 커리어 차원에서도 에이전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여하튼, 미스터 케빈에게는 필요한 시점이 되면 ‘에곤 K’로서 연락하기로 하고-

오늘은 간만에 맞이한 여유로운 주말.

나는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2부를 집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2부의 핵심은 피터가 외부에서 겪는 고난, 그리고 웬디와의 화해.’

고향을 떠난 영웅은 필연적으로 위기를 겪기 마련이다.

좀도둑질을 당하기도 하고, 무장한 무리에게 습격당하기도 하는 피터.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식량을 약탈해간 소년들과 재회하게 된다.

[눅눅하고 어두침침한 폐건물 안.

깨진 창문 새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 아래, 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진 아이들의 모습이 피터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들은···.’

얼굴을 알아본 피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내부 다툼이 벌어졌던 것일까.

몇 명은 이미 숨이 끊어져 죽음의 냄새가 났고, 나머지도 대부분 의식을 잃은 가운데.

“···너는, 그때 그 빌어먹을 새끼-”

“피터.”

유일하게 눈을 뜬 소년의 곁으로, 피터는 서슴없이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입안에 물을 몇 모금 흘려넣어주자 소년은 그것을 달게 마셨고, 잠시 망설이더니-

“고마워. ···피터.”

처음으로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지난번에 마주쳤을 때··· 네가 그랬지. 멸망 이후의, 세계에선··· 식량이나 생존을, 흐으, 확보하는 것보다도.”

몇 번이나 거친 숨을 내쉬어가며, 간신히 말을 잇는다.

“인간으로서 남아 있기가 더 어려운 법이라고.”

“그만 말해, 피가 너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어.”]

그대로 숨이 끊어진 소년 앞에서 잠시 묵념하는 피터.

이어지는 2부의 하이라이트에서 자신이 입원해 있던 병원의 비상물자를 뒤지던 중, 실험실의 극비 서류를 발견한다.

“···그게 바로, 이 피터 팬딧 자신과 연관된 실험이었음을 알고서는 충격을 받는 거지.”

그건 그렇고.

한참을 앉아서 썼더니 머리가 띵하다.

창문을 열어 찬공기를 들어오게 하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가운데.

“···노래나 들을까.”

요즘은 습관처럼 사운드클라우드에 접속하곤 하는데.

다름 아닌-

[Love Confession (1 month ago)

| Ash]

재생 1.3K회 좋아요 31

아델의 패밀리 네임 ‘애시번’을 가지고 만든 닉네임 ‘Ash’.

재생횟수가 벌써 천을 넘어갔을 뿐더러, 초반에 잠깐 NEW & HOT 리스트에 오른 덕분에 댓글도 달렸다.

-노래 진짜 좋네요!

-목소리가 분위기 있어요

-와 가사가 넘 좋음··· 본인이 직접 쓴 것?

···

아직 조회수는 그리 높지 않지만, 내 친구가 만든 노래가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을 받는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달까.

‘네드와 아델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에곤 K로서 낸 책이 화제가 될 때마다 그 둘이 나보다 더 신나하던 것이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거기다 아델 본인도-

‘유진, 네드. 나, 니들 말 듣길 잘한 것 같아.’

물론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기록하거나,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 자신의 곡을 듣고 좋다고 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솟아난다는 것이다.

“자, 이 정도면 충분히 쉬었고.”

속 아델의 목소리가 끝나고 난 뒤, 나는 가볍게 손목을 털어준 후 자리에 앉았다.

이제 뒤를 이어서 써볼까.

[피터는 자신이 발견한 자료 속 한 구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이랜더증후군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대체 언제부터 시행된 프로젝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여기에 입원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왜 이런 실험을 벌인단 말인가? 노화를 막는 것도 아니고, 아예 성장 자체를 멈추게 하는-

“···아.”

머릿속에 번개같이 찾아온 깨달음 속, 피터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냈다···]

타닥, 다다다닥—

머릿속에서 나오길 기다렸던 텍스트들이 내 손을 타고 화면 위로 펼쳐졌다.

그렇게 기세를 타고 쭉 써나가길 30분째.

반쯤 무아지경에 빠진 채로 쓰다가, 똑똑- 노크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머, 내가 방해했나? 저녁 먹자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길래.”

새어머니 목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집중했었나 보다.

“방해라뇨, 전혀. 같이 밥 먹어야죠.”

나는 화면을 가득 채운 텍스트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추세라면 2편은 물론, 3편도 일사천리로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갓 구워 보들보들한 미트로프와 신선한 샐러드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아버지가 할 말이 있다며 서재로 나를 불렀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책상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얼굴이 어쩐지 비장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생각하며 그 맞은편에 앉는데.

‘저건.’

아버지의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사춘기 자녀와 대화하는 법>, <10대의 마음을 여는 부모의 한마디>, <고등학생 자녀와 사이 좋아지는 법>···.

‘···.’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아버지가 나를 마주 보더니, 체크카드와 일련의 서류를 건넸다.

“이거 받아라, 유진아.”

그것은 계좌의 상세내역이 적힌 명세서.

[2024-01-01 SFF Press | $66,124.00]

그것은 하드커버판과 페이퍼백판을 합쳐, 지금까지 팔린 5만 부가량에 대한 인세였다.

‘6만 6천 달러···.’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자, 아버지가 설명을 이어갔다.

“SFF프레스에서 입금한 인세다. ···네가 쓴 거니, 네가 직접 관리하는 게 맞겠지.”

인세 정산용으로 새로 개설한 계좌이며, 비밀번호도 언제든 바꾸면 된다고.

“하지만 아버지, 꼭 저한테 다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학자금이라든가-”

“유진아. 너나 클로이 학자금을 마련하는 걸 비롯해서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건 이 아버지와 케이트의 몫이야.”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부드럽게 미소짓는 아버지.

“네가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는 건 잘 알지만, 아버지에게서 부모의 역할을 빼앗지 말아다오.”

“···빼앗다니요.”

아버지도 참.

픽, 헛웃음이 지어지는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건 고등학생이 관리하기엔 지나치게 큰 돈이 맞지만. ···나는 유진이 널 믿는다.”

담담하게 꺼낸 그 말에 한순간 살짝 목이 메어왔다.

‘유진이 널 믿는다.’

···이 말을, 회귀 전의 내가 얼마나 듣고 싶어했던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잘해야 했는데.

그렇게 건강이 확 나빠지시기 전에 화해했어야 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도 조금씩 나누었어야 했는데···.

수많은 후회로 가득했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 머릿속엔 복잡한 상념이 가득했지만.

나는 이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심장이 부드럽게 요동치고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가운데.

썰렁하던 서재 안이 한결 따스하게 느껴지고, 아버지 또한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덧붙였다.

“주식계좌 좀 개설해주실래요?”

“···응? 주식?”

“네, 돈을 그냥 계좌 안에 묵혀두면 아깝잖아요?”

내가 이런 쪽에 빠삭한 편은 아니지만.

‘뭐, 미래 우량주 정도는 알고 있잖아?’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을 정도로 안전하게 투자할 자신은 있다.

다만-

“···.”

내가 알던 내 아들이 맞나···?

-라고 묻는 듯한 아버지의 눈빛 앞에 한순간 뜨끔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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