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서 이미지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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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레너드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주제글쓰기’ 활동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틀에 박힌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모두가 함께 있는 가운데, 각자 조용히 생각에 집중해보는 시간 덕분일까.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와줬고-
‘라고, 벌써 제목까지 떠올랐으니.’
주제글쓰기 활동이 계기가 되어 쓰기 시작한 단편소설, 의 서사는 단순하다.
주인공은 엘라 모건이라는 30대 후반 여성.
자상한 남편,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어린 딸과 행복하게 지내던 그들 가족에게-
[“스쿨버스에서 내리다가··· 사고가 났다고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비극이 찾아온다.
하루 아침에 딸을 떠나보내게 된 엘라는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누군가 매순간 내 심장을 쥐어뜯는 기분이야. 데이지 없는 나날을··· 대체 어떻게 버텨야 해?”]
몇 년을 눈물과 고통으로 보낸다.
그러다 부부의 결혼생활마저 위태로워질 때쯤.
[‘바로 이거야.’
엘라는 AI에게 자신의 딸을 기억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데이지가 좋아했던 음식, 책, 드라마 따위에서부터.
말투나 자잘한 습관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AI에게 학습시키기로 말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데이지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과 남편에게서도 잊힐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지.’
···클럽활동 시간에 생각난 것은 일단 그 정도였는데.
기껏해야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고무적인 결과였다.
‘유진! 니 아이디어 너무··· 좋더라.’
내 옆자리에 앉은 샬롯과도 브레인스토밍을 했는데, 가 어떤 작품으로 탄생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는 것.
‘샬롯 너는 논픽션으로 써보려고?’
‘응, 좀 고민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 스타일 자체가 픽션보단 논픽션에 맞는 것 같아서.’
전에도 여러 번 그런 리뷰를 받은 적이 있다며, 하루 이틀 고민해온 게 아니라고.
하지만 논픽션을 써본 경험도 그리 많지는 않아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써보려고 한단다.
‘오, 기대할게.’
‘기대···하지 마아···.’
샬롯은 자신없는 투로 말했지만, 저래 놓고 엄청 잘 써내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도 그녀의 문체나 사고방식 자체가 논픽션에 잘 맞는 것 같으니.
‘브레인스토밍할 때도 상상력에 기대기보다는 자료에서 영감을 얻는 편이지.’
덕분에 나 또한 그녀와의 대화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고 말이다.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 원고를 붙잡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급하게 신경 쓸 일들이 꽤 있었다.
[S&F 담당자_마크 : S&F 3월호에 실릴 피터팬 3부 저자교정 부탁드립니다!!]
[Victoria Chen | 아마라 아체베 디자이너의 표지 러프 보내드립니다.]
[SFF프레스_빅토리아 : 작가님 이메일 인터뷰 의뢰가 세 군데서 들어왔는데···]
<피터 팬> 3부 저자 교정, 단행본용 원고 교정, 표지 시안들을 살펴보고 답을 주는 것 외에도 자잘한 일정들이 있었다.
탁닥, 타다닥—
클럽활동을 마치고 온 지 이틀이 지난 지금도, 노트북 앞에 앉아서 부지런히 할 일을 하는 중.
‘어차피 주제글쓰기 마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으니 는 여유 있게 쓰면 되고.’
빅토리아 첸 팀장에게서 온 메일을 확인해서 답을 보내고, 마크 담당자가 준 교정용 파일을 열어보려던 그때.
지잉- 핸드폰이 진동하며 미스터 케빈의 메시지가 왔다.
[에이전트_케빈 : 작가님! 해외 판권 옥션 관련해서 보고드립니다]
···아 맞다.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후속작업, 그러니까 해외 판권과 영상화 판권 문제도 남아 있었지.
[말씀주신 대로 주피터북스, 에디시옹쉬드, 문학마을, ZOF, 유메분코가 최종 낙찰사가 되었고]
[이 다섯 곳의 해외판권 선인세는 5만 달러 내외이고, 여기서 각종 수수료를 제하고 1달 뒤에 입금될 예정입니다!]
5만 달러.
신인작가의 첫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다.
···세계 최대 출판시장을 자랑하는 미국도 요즘은 그렇긴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초판 3천 부조차 소화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기 때문.
‘그래도 경쟁이 붙은 덕분에 선인세 금액이 좀 올라간 모양이네.’
지금도 내 통장 안에서 상당한 금액이 잠자고 있는 터라, 돈이 들어와도 큰 감흥이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물욕이 별로 없는 편이기도 하고.’
무언가에 돈을 쓰거나 물건을 사는 데서 딱히 쾌감을 느끼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물건을 잘 골라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는 편에 가깝지.
하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 그 자체.
거기서 오는 마음 든든함이 좋다고 할까.
[에곤_K : 고맙습니다 미스터 케빈, 고생 많으셨어요]
그렇게 답장을 보낸 뒤, 다시금 하던 일에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차가 생기면 좀 많이 좋을 것 같지만.”
지난주였나, 중고 SUV를 한 대 알아봐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하하, 그래. 돈이 많아도 허투루 쓰지 않는 게 좋지.’
현명한 선택이라며 빠른 시일 내에 알아봐주겠다 하시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어차피 스쿨버스를 타니까 딱히 불편한 건 없지만.
‘차로 등하교도 하고, 필요할 때 네드나 아델도 태우고 다니면 좋겠네.’
그런 생각에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던 그때.
지이잉—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또 다른 반가운 이름의 메시지가 떴다.
[랜든_비숍: 원고 수정을 마무리했네. 자네 조언 덕분에 완성도가 좀 올라간 것 같군]
[랜든_비숍 : 어둠속의방문자들_귀환자의 시간.doc]
[랜든_비숍 : 지금 한창 바쁠 시기일 테니 나중에 시간날 때 읽게나]
···물론 할 일이 아주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못 참지!’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정자세로 앉았고.
원고 파일을 다운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꼼짝 않고 다 읽었다.
···다해서 한 30분쯤 걸렸으려나.
“비숍 작가님—!!!”
곧바로 비숍 작가에게 전화를 건 나는 외치고 말았다.
“바로 이겁니다! 진짜로, 완벽해요!”
-허허, 이 친구 호들갑 하고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감출 수 없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
오랜 전통과 강력한 권위를 자랑하며, 평균 매달 7천 부를 발행하는 장르소설 전문 잡지 <사이언스앤드판타지>.
이 잡지의 2월호 부수가 평소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치솟았고.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에곤 K의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2부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을 사전에 직감했던 해리슨 편집장은-
‘그것 보십시오 대표님, 제 말대로 아예 3만 부 찍어버리길 잘하지 않았습니까 으흐흐.’
3만 부 발행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와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이 수치 자체도 매우 고무적이지만, 그보다 더 고무적인 것을 꼽아보자면-
“나도 한 번 정기구독이나 해볼까? 1년 구독하면 훨씬 싸네.”
“오오, 정기구독자한테는 이북을 무료 제공해주는구나.”
“피터팬 2부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같이 실린 다른 작품들도 다 좋은걸.”
원래 이쪽 장르에 어느 정도 관심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기구독할 정도의 열정은 없던 독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SF 장르 독자의 저변 자체가 확대되는 느낌.
여하튼, 그렇게 유입된 신규 정기구독자 중에는-
“다 읽었다.”
20대 후반의 신인 감독, 막성스 라미도 포함돼 있었다.
프랑스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필름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상황.
훈훈한 외모 덕에 배우로도 활동한 바 있는 막성스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좋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좋을 줄이야.”
후우, 심호흡하며 흥분을 가라앉혀 보았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은 도무지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곧 단행본으로 출간된다고 했지···.’
그것도 나오면 바로 사야겠다, 결심하는 막성스.
사실 그는 딱히 SF장르 자체를 좋아하는 독자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잡식성이라고 할까.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다가 취향에 맞는 작품을 발견하면 몇 번이고 재독하는 스타일.
‘하지만,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때는 좀 달랐지.’
물론 그 책도 서너 번을 읽기는 했다.
다시 읽으며 텍스트의 표면 너머에 숨은 함의를 발견할 때마다 소름 돋는 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 책은 그렇게 여러 번 읽은 후에도 계속 갈증이 났으니까.’
뭔가에 중독되기라도 한 사람처럼 더, 더-를 외치다가.
에곤 K의 전작이라는 중편소설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을 읽었고, 이후 2부가 나왔다는 소식에-
“예약 주문하길 진짜 잘했단 말이지.”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지만.
<피터 팬>은 이것대로 너무 완벽한 작품이라는 게 또 다른 매력포인트였다.
‘한 명의 작가가 이렇게 다른 풍으로, 그것도 두 작품 모두 매력적으로 쓸 수 있다니···.’
원작자 에곤 K를 향한 강렬한 호기심은 어느새 팬심으로 바뀌어버린 지 오래.
막성스는 노트북을 켜 자신의 SNS에 접속했다.
[@_Maxence_Lamy]
[783 Followers, 41 Following, 61 Posts]
팔로워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한 명이라도 더 이 놀라운 책을 읽어봤으면 싶은 마음에-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들고 찍은 셀카.jpg]
[@_Maxence_Lamy]
[인생 책에 이렇게 또 한 권이 추가됨.]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 등등···.
SNS 계정을 총동원해 에곤 K 데뷔작에 관한 게시글을 남겼고.
‘맞다, 굿리즈에도 서평 써야지.’
아마존을 비롯해 각종 서점 사이트에는 이미 별점과 서평을 빠짐없이 남긴 터였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행동하는 독자였으니 말이다.
사실, 막성스 라미가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라는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맥스, 부담을 좀 내려놓는 건 어때?’
뉴욕필름아카데미에서 수학할 시절 찍은 단편영화 <사라진 여름>.
그 작품을 계기로 ‘막성스 라미’라는 이름은 촉망 받는 신인으로 떠오르게 됐는데.
‘좋은 영화를 찍으려는 열정, 아주 좋지. 근데, 억지로 짜내려고 하면 될 것도 안 되기 마련이야.’
훌륭한 차기작을 향한 열정만큼이나 부담감에도 시달리던 그에게, 동기 한 명이 추천해준 책이 바로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였다.
‘꼭 밤에 읽어봐, 알았지? ···소름끼치게 무서울 거다, 흐흐.’
그때는 무서워봤자 얼마나 무섭겠나 싶었지만.
‘와 진짜로 무섭잖아···.’
그런데도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막성스는 고통스러운 쾌감에 시달리며 홀린 듯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버렸고.
바로 그날 밤.
‘···허억!’
꿈속에서 ‘호수괴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가 시릴 정도로 공포스러운 악몽을 꾸다 깨어난 후에도 여전히 그 이미지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는데.
‘떨쳐버리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걸.’
···그것은 한국에서라면 ‘신내림’이라고 부를 법한 경험에 가까웠다.
그 이미지를 제 손으로 붙잡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생생하게 그려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대로 말라죽을 것 같은, 지극히 영화감독다운 열망에 사로잡힌 끝에-
‘안녕하세요, 그··· 에곤 K 작가님의 신작, 네, 그거요. 혹시 영화 판권이 아직 유효할까요?’
맨땅에 헤딩하듯이 SFF프레스에 영화 판권 문의를 넣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은 반쯤 포기한 상태에 가까웠다.
답변이 올 만한 시기가 지났기도 했지만.
[SF씬의 신성, 에곤 K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에 영화화 제안 넘쳐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헐리우드 측에서 쏟아지는 러브콜]
그런 유의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것을 보니, 자신에게 그 같은 영광이 돌아올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막성스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스토리보드의 형태로나마 그려내고 있었다.
하나 하나, 세심하게.
···누구든 그 보드만 봐도 한 편의 영화를 연출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지금은 전체의 50퍼센트 정도가 완료된 상황.
사각사각, 막성스가 둔탁하게 깎은 2B 연필을 들고서 보드 작업에 몰두하던 그때.
지이잉—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네, 막성스 라미입니다. 네···?”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전화 거신 분이··· 에곤 K의 에이전트이시고.”
핸드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에너지가 넘쳤다.
-네 맞습니다! 케빈 클레그라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저희 에곤 K 작가님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영상화 판권 문의를 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잠깐만, 대체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 걸까.
-에곤 K 작가님께서는 막성스 라미 감독님이 이 작품의 영상화 작업을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멍하니 듣고 있던 막성스가 한 박자 후에야 말했다.
“네···? 잠깐만요, 그러니까··· 저에게, 영상화를···. 진짜로요?”
내가 혹시 꿈을 꾸는 걸까 싶어 되묻자.
폰 반대편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맞습니다! 작가님이 이전에 <사라진 여름>을 인상 깊게 봤다고, 감독님께 이 작품을 꼭 맡기고 싶다고···.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짐과 동시에-
“이야아아아——!!!”
막성스는 아직 통화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벌떡 일어나 탄성을 질렀다.